불평등은 무엇에서 시작되는가
⊙ 진정한 리얼리스트,김유정
「동백꽃」과 「봄봄」의 작가 김유정은 암울한 식민지 시절 해학과 익살로 웃음과 여유를 선사해 주었다.
하지만 그런 까닭에 자칫 어떤 이들은 김유정의 소설을 당대 현실에 대한 치열하고 진지한 성찰의 결과물이 아니라 한바탕 웃고 마는 소극(笑劇)에 불과하다고 오해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김유정은 웃음의 미학 못지 않게 냉철한 현실인식도 함께 보여준 작가였다.
스물아홉이라는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 탓에 남겨진 작품이 많지는 않지만 그는 분명히 식민지 조선의 피폐한 농촌 현실을 날카롭게 묘사한 작가임에는 틀림없다.
작품 「만무방」은 그의 이런 면모를 보여주기에 매우 적절하다.
「만무방」은 아무리 땀 흘려 농사를 짓고 수확을 해도 기득권층에 자기 몫을 모두 내놓아야 하는,그래서 결국 도적으로 전락해 버린 응칠과 응오 형제의 비극적 이야기이다.
원래 '만무방'이란 '염치없이 막돼먹은 사람'을 뜻하는데 이에 해당하는 인물이 바로 형 응칠이다.
응칠은 전과 4범의 건달이자 절도에도 능한 노름꾼이며,온갖 윤리를 배반하는 전형적인 '만무방'이다.
물론 그가 처음부터 '만무방'은 아니었다.
그러나 빚은 늘어가고 갚을 도리는 없다 보니 종국에는 나락으로 떨어져 버리고 말았다.
형 응칠과 달리 동생 응오는 모범적인 농사꾼이다.
그러나 응오는 곡식이 다 여물었는데도 수확을 하지 않는다.
벼를 수확해봤자 남는 것은 빚뿐이라는 절망감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누군가 벼를 몰래 훔쳐가는 일이 벌어지고 마을 사람들은 모두 응칠을 의심하게 된다.
응칠은 억울한 누명도 벗고 동생 논도 지키기 위해 도적을 기다리는데 아이러니하게도 그 도적은 그 논에서 힘겹게 농사를 지었던 다름 아닌 동생 응오였다.
일 년 농사를 짓고도 남는 것은 등줄기를 흐르는 식은땀뿐이라는 생각이 결국 선량한 농민 응오마저 도둑으로 내몰게 한 것이다.
⊙ 불평등이 만무방을 만들다
응칠,응오 형제를 도둑으로 몰아간 것은 분명 가난 때문이다.
물론 개인의 가난은 게으름과 나태,무지함으로부터 올 수 있다.
문제는 아무리 땀 흘려 일하고 부지런히 농사를 지어도 응오는 가난을 극복할 수 없었다는 사실이다.
다음 인용된 부분을 읽어보면서 그들의 가난이 어디로부터 연유한 것인지 살펴보기로 하자.
응오는 진실한 농군이었다.
나이 서른하나로 무던히 철났다 하고 동리에서 쳐주는 모범 청년이었다.
그런데 벼를 베지 않는다.
남은 다들 거둬들였고 털기까지 하련만 그는 벨 생각조차 않는 것이다.
지주라든 혹은 그에게 장리를 놓은 김참판이든 뻔질나게 찾아와 벼를 베라고 독촉하였다.
"얼른 털어서 낼 건 내야지" 하면 그 대답은,"계집이 죽게 됐는데 벼는 다 뭐지유………" 하고 한결같이 내뱉는 소리뿐이었다.
하기는 응오의 아내가 지금 기지 사경이매 틈은 없었다 하더라도 돈이 놀아서 약을 못 쓰는 이 판이니 진시 벼라도 털어야 할 것이다.
그러면 왜 안 털었던가.
한 해 동안 애를 졸이며 홑자식 모양으로 알뜰히 가꾸던 그 벼를 거둬들임은 기쁨에 틀림없었다.
꼭두새벽부터 엣,엣,하며 괴로움을 모른다.
그러나 캄캄하도록 털고 나서 지주에게 도지를 제하고,장리쌀을 제하고,색초를 제하고 보니 남은 것은 등줄기를 흐르는 식은땀이 있을 따름.(중략)
이놈을 가을하다간 먹을 게 남지 않음은 물론이요 빚도 다 못 가릴 모양.
에라,빌어먹을 거 너들끼리 캐다 먹든 말든 멋대로 하여라,하고 내던져 두지 않을 수 없다.
- 김유정 「만무방」
흔히들 '만무방'을 설명할 때 일제 식민지 치하의 피폐한 농촌현실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작품으로 평가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에는 모순된 현실의 원인을 단지 제국주의와 식민지라는 구조에서만 바라보게 한다.
다시 말해 식민지로 모든 갈등을 수렴하게 만들어 내부에 존재하는 다른 요인들에 대한 논의 자체를 축소시키거나 불가능하게 만들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모든 현실의 문제를 식민지 경험 때문이라고 간주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
물론 제국주의가 임금노동자를 배출하기 위해 농민들의 삶을 더욱 가혹하게 조장한 측면이 없지는 않지만 농촌의 모순을 모조리 제국주의와 식민지의 관계에서만 파악하는 것은 논의를 획일화시킬 위험이 있다.
인용된 부분에서 보듯이 응오는 성실한 농사꾼이었지만 경작한 곡식의 주인이 될 수는 없었다.
왜냐하면 지주와 장리(長利)를 놓은 김참판의 몫으로 돌아가고 나면 남는 게 없기 때문이다.
아무리 성실하게 노동을 해도 응오가 가난의 굴레로부터 벗어나는 것은 요원해 보인다.
그렇다면 응오의 노동이 생산한 가치는 어디로 가는가.
앞서 말했듯 그것은 땅을 소유하고,자본을 독점하는 이들에게 돌아간다.
결국 불평등한 경제적인 차이가 응오를 자신이 생산한 재화로부터 소외를 당하게 하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응칠과 응오의 가난은 식민지적 특수성보다도 근원적으로 주어진 경제적 불평등에 기인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아무리 노력해도 해결되지 않는 불평등.
도대체 인간은 언제부터 이처럼 불평등한 환경에 놓이게 된 것일까.
또 이러한 불평등은 무엇으로부터 기인하는 것일까.
⊙ 인간 불평등의 기원
1753년 프랑스 디종 아카데미는 「메르퀴르 드 프랑스」(Mercure de France)라는 학술지에 '인간 사이의 불평등의 기원은 무엇이며,불평등은 자연법에 의해 허용되는가?'라는 논문 현상 공모를 실시한 적이 있다.
그리고 이 논문 공모에 「사회계약론」과 「에밀」로 유명한 계몽철학자 루소가 응모하게 되는데 바로 그 논문이 '인간 불평등 기원론'이다.
루소는 이 글을 통해 자연상태의 인간이 어떻게 해서 불평등한 상황에 놓이게 되었는지를 논리적으로 추론해 보인다.
루소에 의하면 만인이 평등을 향유할 수 있었던 원초적 자연상태는 분명 행복한 상태였다.
그러나 자연 재해라든지,다른 동물들과의 경쟁이라든지,인간의 점차적인 수적 증가에 따라 상대적으로 자원이 결핍되는 등 자연상태에는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인간은 공동체를 이루고 살아가게 된다.
문제는 공동생활을 하는 순간 인간은 전에는 몰랐던 타인의 시선을 느끼게 된다는 것이다.
불행히도 이는 불평등과 악덕의 시작이었다.
타인과의 비교의식과 자신의 우월성을 확인받으려는 욕망이 나타났고 이것이 소유욕과 결합되면서 불평등이 출현하게 된 것이다.
혼자서 두 사람 몫을 차지하는 것이 유리하다는 것을 알아차리자 평등은 사라져 버렸고 숲은 인간이 노동해야 할 들판으로 변했으며 곡식의 수확은 물질적 풍요를 가져다 준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불평등을 심화시켰다.
또한 토지와 같은 생산수단의 사유화는 소유 여부에 따라 인간을 경제적으로 종속시키는 결과를 낳았던 것이다.
결국 인간 불평등은 인간이 자연상태로부터 벗어나 공동체,곧 문명사회를 이루고 살아가면서 생겨난 부산물로 볼 수 있다.
⊙ 불평등한 풍요
작품 「만무방」에서 응칠과 응오는 들판에서 노동하지만 토지를 소유하지 못한 까닭에 스스로 생산한 곡식을 향유할 수 없었다.
우리가 살아가는 지금 이 시대는 어떠한가. 분명히 우리는 일제 강점기의 피폐한 농촌현실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물질적 풍요를 누리며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풍요가 불평등을 사라지게 했는가.
답은 부정적이다. 소위 20대 80사회,그리고 심화된 양극화의 문제는 불평등이 오히려 예전보다 심화되었음을 말해준다.
200년 전 루소의 고민이나 일제 강점기 작가 김유정이 목도한 식민지의 현실이나 생활고에 시달려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이들이 존재하는 작금의 현실은 크게 다르지가 않다.
그렇다면 불평등을 어떻게 해야 할까.
루소는 인간 불평등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자연상태를 회복해야 한다고 했지만 스스로도 그 가능성에 대해서는 회의적이었다.
아마도 불평등 문제는 문명사회를 포기하지 않는 한 끝없이 지속될 것이다.
다만 그 정도가 공동체 자체를 붕괴시킬 만큼 심각하지 않게 관리하는 것은 반드시 필요하다.
구성원 모두가 '만무방'으로 변하는 일만큼은 막아야 하지 않겠는가.
전주 상산고 교사 etika1@naver.com
⊙ 진정한 리얼리스트,김유정
「동백꽃」과 「봄봄」의 작가 김유정은 암울한 식민지 시절 해학과 익살로 웃음과 여유를 선사해 주었다.
하지만 그런 까닭에 자칫 어떤 이들은 김유정의 소설을 당대 현실에 대한 치열하고 진지한 성찰의 결과물이 아니라 한바탕 웃고 마는 소극(笑劇)에 불과하다고 오해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김유정은 웃음의 미학 못지 않게 냉철한 현실인식도 함께 보여준 작가였다.
스물아홉이라는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 탓에 남겨진 작품이 많지는 않지만 그는 분명히 식민지 조선의 피폐한 농촌 현실을 날카롭게 묘사한 작가임에는 틀림없다.
작품 「만무방」은 그의 이런 면모를 보여주기에 매우 적절하다.
「만무방」은 아무리 땀 흘려 농사를 짓고 수확을 해도 기득권층에 자기 몫을 모두 내놓아야 하는,그래서 결국 도적으로 전락해 버린 응칠과 응오 형제의 비극적 이야기이다.
원래 '만무방'이란 '염치없이 막돼먹은 사람'을 뜻하는데 이에 해당하는 인물이 바로 형 응칠이다.
응칠은 전과 4범의 건달이자 절도에도 능한 노름꾼이며,온갖 윤리를 배반하는 전형적인 '만무방'이다.
물론 그가 처음부터 '만무방'은 아니었다.
그러나 빚은 늘어가고 갚을 도리는 없다 보니 종국에는 나락으로 떨어져 버리고 말았다.
형 응칠과 달리 동생 응오는 모범적인 농사꾼이다.
그러나 응오는 곡식이 다 여물었는데도 수확을 하지 않는다.
벼를 수확해봤자 남는 것은 빚뿐이라는 절망감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누군가 벼를 몰래 훔쳐가는 일이 벌어지고 마을 사람들은 모두 응칠을 의심하게 된다.
응칠은 억울한 누명도 벗고 동생 논도 지키기 위해 도적을 기다리는데 아이러니하게도 그 도적은 그 논에서 힘겹게 농사를 지었던 다름 아닌 동생 응오였다.
일 년 농사를 짓고도 남는 것은 등줄기를 흐르는 식은땀뿐이라는 생각이 결국 선량한 농민 응오마저 도둑으로 내몰게 한 것이다.
⊙ 불평등이 만무방을 만들다
응칠,응오 형제를 도둑으로 몰아간 것은 분명 가난 때문이다.
물론 개인의 가난은 게으름과 나태,무지함으로부터 올 수 있다.
문제는 아무리 땀 흘려 일하고 부지런히 농사를 지어도 응오는 가난을 극복할 수 없었다는 사실이다.
다음 인용된 부분을 읽어보면서 그들의 가난이 어디로부터 연유한 것인지 살펴보기로 하자.
응오는 진실한 농군이었다.
나이 서른하나로 무던히 철났다 하고 동리에서 쳐주는 모범 청년이었다.
그런데 벼를 베지 않는다.
남은 다들 거둬들였고 털기까지 하련만 그는 벨 생각조차 않는 것이다.
지주라든 혹은 그에게 장리를 놓은 김참판이든 뻔질나게 찾아와 벼를 베라고 독촉하였다.
"얼른 털어서 낼 건 내야지" 하면 그 대답은,"계집이 죽게 됐는데 벼는 다 뭐지유………" 하고 한결같이 내뱉는 소리뿐이었다.
하기는 응오의 아내가 지금 기지 사경이매 틈은 없었다 하더라도 돈이 놀아서 약을 못 쓰는 이 판이니 진시 벼라도 털어야 할 것이다.
그러면 왜 안 털었던가.
한 해 동안 애를 졸이며 홑자식 모양으로 알뜰히 가꾸던 그 벼를 거둬들임은 기쁨에 틀림없었다.
꼭두새벽부터 엣,엣,하며 괴로움을 모른다.
그러나 캄캄하도록 털고 나서 지주에게 도지를 제하고,장리쌀을 제하고,색초를 제하고 보니 남은 것은 등줄기를 흐르는 식은땀이 있을 따름.(중략)
이놈을 가을하다간 먹을 게 남지 않음은 물론이요 빚도 다 못 가릴 모양.
에라,빌어먹을 거 너들끼리 캐다 먹든 말든 멋대로 하여라,하고 내던져 두지 않을 수 없다.
- 김유정 「만무방」
흔히들 '만무방'을 설명할 때 일제 식민지 치하의 피폐한 농촌현실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작품으로 평가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에는 모순된 현실의 원인을 단지 제국주의와 식민지라는 구조에서만 바라보게 한다.
다시 말해 식민지로 모든 갈등을 수렴하게 만들어 내부에 존재하는 다른 요인들에 대한 논의 자체를 축소시키거나 불가능하게 만들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모든 현실의 문제를 식민지 경험 때문이라고 간주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
물론 제국주의가 임금노동자를 배출하기 위해 농민들의 삶을 더욱 가혹하게 조장한 측면이 없지는 않지만 농촌의 모순을 모조리 제국주의와 식민지의 관계에서만 파악하는 것은 논의를 획일화시킬 위험이 있다.
인용된 부분에서 보듯이 응오는 성실한 농사꾼이었지만 경작한 곡식의 주인이 될 수는 없었다.
왜냐하면 지주와 장리(長利)를 놓은 김참판의 몫으로 돌아가고 나면 남는 게 없기 때문이다.
아무리 성실하게 노동을 해도 응오가 가난의 굴레로부터 벗어나는 것은 요원해 보인다.
그렇다면 응오의 노동이 생산한 가치는 어디로 가는가.
앞서 말했듯 그것은 땅을 소유하고,자본을 독점하는 이들에게 돌아간다.
결국 불평등한 경제적인 차이가 응오를 자신이 생산한 재화로부터 소외를 당하게 하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응칠과 응오의 가난은 식민지적 특수성보다도 근원적으로 주어진 경제적 불평등에 기인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아무리 노력해도 해결되지 않는 불평등.
도대체 인간은 언제부터 이처럼 불평등한 환경에 놓이게 된 것일까.
또 이러한 불평등은 무엇으로부터 기인하는 것일까.
⊙ 인간 불평등의 기원
1753년 프랑스 디종 아카데미는 「메르퀴르 드 프랑스」(Mercure de France)라는 학술지에 '인간 사이의 불평등의 기원은 무엇이며,불평등은 자연법에 의해 허용되는가?'라는 논문 현상 공모를 실시한 적이 있다.
그리고 이 논문 공모에 「사회계약론」과 「에밀」로 유명한 계몽철학자 루소가 응모하게 되는데 바로 그 논문이 '인간 불평등 기원론'이다.
루소는 이 글을 통해 자연상태의 인간이 어떻게 해서 불평등한 상황에 놓이게 되었는지를 논리적으로 추론해 보인다.
루소에 의하면 만인이 평등을 향유할 수 있었던 원초적 자연상태는 분명 행복한 상태였다.
그러나 자연 재해라든지,다른 동물들과의 경쟁이라든지,인간의 점차적인 수적 증가에 따라 상대적으로 자원이 결핍되는 등 자연상태에는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인간은 공동체를 이루고 살아가게 된다.
문제는 공동생활을 하는 순간 인간은 전에는 몰랐던 타인의 시선을 느끼게 된다는 것이다.
불행히도 이는 불평등과 악덕의 시작이었다.
타인과의 비교의식과 자신의 우월성을 확인받으려는 욕망이 나타났고 이것이 소유욕과 결합되면서 불평등이 출현하게 된 것이다.
혼자서 두 사람 몫을 차지하는 것이 유리하다는 것을 알아차리자 평등은 사라져 버렸고 숲은 인간이 노동해야 할 들판으로 변했으며 곡식의 수확은 물질적 풍요를 가져다 준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불평등을 심화시켰다.
또한 토지와 같은 생산수단의 사유화는 소유 여부에 따라 인간을 경제적으로 종속시키는 결과를 낳았던 것이다.
결국 인간 불평등은 인간이 자연상태로부터 벗어나 공동체,곧 문명사회를 이루고 살아가면서 생겨난 부산물로 볼 수 있다.
⊙ 불평등한 풍요
작품 「만무방」에서 응칠과 응오는 들판에서 노동하지만 토지를 소유하지 못한 까닭에 스스로 생산한 곡식을 향유할 수 없었다.
우리가 살아가는 지금 이 시대는 어떠한가. 분명히 우리는 일제 강점기의 피폐한 농촌현실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물질적 풍요를 누리며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풍요가 불평등을 사라지게 했는가.
답은 부정적이다. 소위 20대 80사회,그리고 심화된 양극화의 문제는 불평등이 오히려 예전보다 심화되었음을 말해준다.
200년 전 루소의 고민이나 일제 강점기 작가 김유정이 목도한 식민지의 현실이나 생활고에 시달려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이들이 존재하는 작금의 현실은 크게 다르지가 않다.
그렇다면 불평등을 어떻게 해야 할까.
루소는 인간 불평등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자연상태를 회복해야 한다고 했지만 스스로도 그 가능성에 대해서는 회의적이었다.
아마도 불평등 문제는 문명사회를 포기하지 않는 한 끝없이 지속될 것이다.
다만 그 정도가 공동체 자체를 붕괴시킬 만큼 심각하지 않게 관리하는 것은 반드시 필요하다.
구성원 모두가 '만무방'으로 변하는 일만큼은 막아야 하지 않겠는가.
전주 상산고 교사 etika1@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