웃음은 사회의 진보를 가져온다
⊙ 웃음을 통해 살아가다
로베르토 베니니가 감독과 주연을 맡았던 영화 「인생은 아름다워」에서 주인공 귀도는 참 익살스러운 인물이다.
영화 속에서 잊을 수 없는 내용은 그가 아들 죠수아를 안심시키기 위해서 유태인 포로수용소의 위태로운 삶을 선택받은 자들의 신나는 놀이이며 게임이라고 말해주는 설정이다.
1000점을 먼저 따는 사람이 1등상으로 탱크를 선물로 받는다는 아버지의 이야기에 아들 죠수아는 나무 궤짝 속에 숨어 있다가 독일군으로부터 목숨을 건지게 된다.
비록 귀도는 독일군에게 잡혀 총살을 당하게 되지만 그 순간에도 그는 자신을 바라보고 있을 아들에게 웃음과 윙크를 보내며 마치 게임을 하듯 장난스럽게 걸어 나간다.
만약 귀도가 죽음 앞에서 초조하거나 불안해했다면 죠수아 역시 희생당했을 것이 분명하다.
결국 아들 죠수아를 살려낸 것은 아무리 위험천만해도 여유를 잃지 않는 귀도의 웃음과 재치라고 해야 할 것이다.
해학과 익살은 우리의 고전 판소리에서도 흔히 찾아볼 수 있다.
가난과 굶주림에 괴로워하면서도 웃음을 잃지 않는 흥부도 있고,양반 이몽룡을 비꼬는 재치 있는 입담을 지닌 방자도 있다.
판소리뿐만이 아니다.
「봉산탈춤」에서 말뚝이가 양반을 놀려대는 장면이나 아내를 범한 역신을 보며 노래를 부르던 처용의 면모에서도 우리는 웃음과 여유를 쉽게 찾을 수 있다.
이처럼 우리 문학의 한켠에는 익살과 해학,풍자로 나타나는 웃음의 미학이 자리 잡고 있었던 것이다.
근대문학에서 해학과 풍자로 창작을 한 작가로는 김유정을 떠올릴 수 있다.
정치사회적인 억압이 극에 달했던 식민지 시절,김유정은 웃음의 미학을 통해 극도의 긴장과 초조를 이완시켜 주었던 것이다.
⊙ 웃음,경직성을 유연성으로
대개 웃음은 개인적인 정서의 표출이라고 생각하기가 쉽다.
물론 웃음은 개인적인 것이다.
그러나 어떤 개인적인 행위라도 그것이 사회적 맥락에 놓이게 되는 한 예기치 못했던 의외의 의미를 지니게 마련이다.
웃음의 사회적 의미를 진지하게 고찰한 베르그송은 웃음이란 "인간이 사물이나 기계처럼 딱딱해져서 유연성을 상실하여 '비사회적인 존재'가 되는 현상에 대한 사회적 징벌"이라고 말한다.
그는 한 사회는 구성원들이 유연성을 확보할 때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면서 진보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므로 베르그송에 따르면 경직된 인간은 사회성을 저해하는 인물이 되고,유연성이 사라진 사회는 진보의 가능성이 그만큼 줄어들게 된다.
베르그송이 강조하는 웃음의 사회적 기능은 여기에 있다.
웃음은 경직된 사회를 유연하게 만들고 각 개인들을 타인과 조화할 수 있도록 재적응시키며,날카로운 면을 둥글게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웃음은 단지 미학적이거나 개인적인 데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사회의 진보를 가능하게 한다는 의미를 지닌다.
작가 김유정이 소설을 쓰던 시절은 식민지 시대였다.
다시 말해 정치 사회적 억압이 극에 달했던 시기였고,뿐만 아니라 식민정책으로 인해 자작농은 몰락하고 지주와 마름에 의한 소작농에 대한 착취 역시 그 정도가 심했던 시절이었다.
일제는 식민지배를 위해 민족 내부가 계층 간의 갈등과 모순 속에 빠지도록 조장했는데 그런 까닭에 당시의 현실은 민족에게 닥친 외부적인 시련 못지않게 내부적으로도 심한 갈등이 표출되던 시기였다.
지주와 마름 대 소작농의 대결구도는 빈번한 소작쟁의로 이어져 갈수록 계층사이의 오해와 불신은 높아져 간 것이다.
이런 상황 속에서 사회적 진보란 요원한 일일 수밖에 없었고 일제는 이점을 식민지배에 철저히 활용한 측면이 적지 않다.
작가 김유정은 이처럼 갈등과 모순으로 경직되어 버린 현실을 웃음과 해학으로 유연하게 만들어보고자 한 점에서 큰 의미를 지닌다.
⊙ 「동백꽃」의 긴장-마름의 딸과 소작농의 아들
김유정의 대표작 「동백꽃」에는 갈등과 모순의 관계였던 마름과 소작농의 관계가 제시되어 있다.
그러나 당시의 여느 소설과 달리 작품 안에는 심각한 관계가 없다.
오히려 사춘기 남녀를 대상으로 하여 한편의 청춘 로맨스를 보는듯한 느낌을 갖게 만든다.
그러잖아도 저희는 마름이고 우리는 그 손에서 배재를 얻어 땅을 부치므로 일상 굽실거린다.
우리가 이 마을에 처음 들어와 집이 없어서 곤란으로 지낼 제 집터를 빌리고 그 위에 집을 또 짓도록 마련해 준 것도 점순네의 호의였다.
그리고 우리 어머니 아버지도 농사 때 양식이 달리면 점순네한테 가서 부지런히 꾸어다 먹으면서 인품 그런 집은 다시없으리라고 침이 마르도록 칭찬하곤 하는 것이다. (중략)
나는 멍하니 섰다가 점순이가 매섭게 눈을 홉뜨고 닥치는 바람에 뒤로 벌렁 나자빠졌다.
"이놈아! 너 왜 남의 닭을 때려죽이니?" "그럼 어때?"하고 일어나다가,"뭐 이 자식아! 누 집 닭인데?"하고 복장을 떼미는 바람에 다시 벌렁 자빠졌다. (중략)
그러다 점순이가 앞으로 다가와서,"그럼,너 이 담부턴 안 그럴 테냐?"하고 물을 때에야 비로소 살 길을 찾은 듯싶었다.
나는 눈물을 우선 씻고 뭘 안 그러는지 명색도 모르건만,"그래!"하고 무턱대고 대답하였다.
"요 담부터 또 그래 봐라,내 자꾸 못살게 굴 테니." "그래 그래,인젠 안 그럴 테야." "닭 죽은 건 염려 마라. 내 안 이를 테니." 그리고 뭣에 떠다밀렸는지 나의 어깨를 짚은 채 그대로 퍽 쓰러진다.
그 바람에 나의 몸뚱이도 겹쳐서 쓰러지며 한창 피어 퍼드러진 노란 동백꽃 속으로 폭 파묻혀 버렸다.
- 김유정,「동백꽃」
「동백꽃」은 모두가 잘 알고 있듯이 사랑에 빠진 점순이와 점순이의 마음을 잘 받아주지 못하는 우직한 '나'의 이야기이다.
인용문에서 보듯 '나'는 소작인의 아들로서 점순네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가 없고 그런 까닭에 점순이의 시선을 부담스럽게 느낄 수밖에 없는 처지이다.
다시 말해서 '나'는 소작인의 아들이기 때문에 점순이에게 함부로 할 수가 없는 것이다.
짧은 에피소드로 그려진 작품이지만 분명히 작품 속에는 당대의 마름과 소작인의 관계가 설정되어 있다.
한 가지 다른 점은 당대의 작품들이 마름과 소작인의 관계를 갈등관계로 묘사한 반면,이 작품에서는 마름이 단지 착취와 수탈의 주체가 아니라 소작농에게 대단히 호의와 배려를 베푸는 존재로 그려져 있다는 사실이다.
그런 까닭에 작품의 주요 갈등은 점순이의 욕망과 이를 받아들일 수 없는 '나'에 집중되고 실제 현실에서 끊임없이 갈등을 벌이던 마름과 소작인의 긴장은 잠시 멈춰진다.
서로는 상대를 향해 보다 더 차분한 시선을 가질 수 있게 되며,또한 계층을 뛰어넘은 젊은 청춘들의 사랑 이야기를 보며 화해의 가능성도 조심스럽게 생각할 수 있는 것이다.
⊙ 웃음은 미래를 생각하게 한다
인간이 지닌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판단은 삶을 살아가는 데 대단히 중요한 기능을 한다.
현재 상황이 지닌 우여곡절을 제대로 분간하지 못하고 위험을 위험으로 파악하지 못한다면 생각지도 못한 끔찍한 결과를 맞이할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생각만으로 삶을 살아간다면 기계와 같은 경직성을 피할 수가 없다.
따라서 인간에게는 합리적 이성 못지않게 유연하며 여유가 있는 태도도 반드시 필요하다.
작가 김유정의 경우를 떠올려 보자면 식민지적 상황이 무엇인지를 정확히 인식하는 것도 중요하지만,현실을 지나치게 심각하게 받아들여 갈등을 더욱 악화시키는 것은 옳지 못한 일이다.
오히려 한 발짝 떨어져 상대에 대해 여유 있게 생각하고 웃음으로 다가선다면 상대의 격한 태도도 때로는 누그러들 수 있는 법이다.
그리고 그런 유연한 상황에서 미래에 대한 전망도 생각해 볼 수가 있다.
영화 「인생은 아름다워」에서 아들 죠수아를 살린 것은 독일군에 강렬히 맞선 아버지 귀도가 아니라 목숨이 다할 때까지 익살과 재치가 넘쳤던 귀도였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나그네의 옷을 벗기는 것은 매서운 바람이 아니라 따사로운 햇볕이다.
전주 상산고 교사 etika1@naver.com
⊙ 웃음을 통해 살아가다
로베르토 베니니가 감독과 주연을 맡았던 영화 「인생은 아름다워」에서 주인공 귀도는 참 익살스러운 인물이다.
영화 속에서 잊을 수 없는 내용은 그가 아들 죠수아를 안심시키기 위해서 유태인 포로수용소의 위태로운 삶을 선택받은 자들의 신나는 놀이이며 게임이라고 말해주는 설정이다.
1000점을 먼저 따는 사람이 1등상으로 탱크를 선물로 받는다는 아버지의 이야기에 아들 죠수아는 나무 궤짝 속에 숨어 있다가 독일군으로부터 목숨을 건지게 된다.
비록 귀도는 독일군에게 잡혀 총살을 당하게 되지만 그 순간에도 그는 자신을 바라보고 있을 아들에게 웃음과 윙크를 보내며 마치 게임을 하듯 장난스럽게 걸어 나간다.
만약 귀도가 죽음 앞에서 초조하거나 불안해했다면 죠수아 역시 희생당했을 것이 분명하다.
결국 아들 죠수아를 살려낸 것은 아무리 위험천만해도 여유를 잃지 않는 귀도의 웃음과 재치라고 해야 할 것이다.
해학과 익살은 우리의 고전 판소리에서도 흔히 찾아볼 수 있다.
가난과 굶주림에 괴로워하면서도 웃음을 잃지 않는 흥부도 있고,양반 이몽룡을 비꼬는 재치 있는 입담을 지닌 방자도 있다.
판소리뿐만이 아니다.
「봉산탈춤」에서 말뚝이가 양반을 놀려대는 장면이나 아내를 범한 역신을 보며 노래를 부르던 처용의 면모에서도 우리는 웃음과 여유를 쉽게 찾을 수 있다.
이처럼 우리 문학의 한켠에는 익살과 해학,풍자로 나타나는 웃음의 미학이 자리 잡고 있었던 것이다.
근대문학에서 해학과 풍자로 창작을 한 작가로는 김유정을 떠올릴 수 있다.
정치사회적인 억압이 극에 달했던 식민지 시절,김유정은 웃음의 미학을 통해 극도의 긴장과 초조를 이완시켜 주었던 것이다.
⊙ 웃음,경직성을 유연성으로
대개 웃음은 개인적인 정서의 표출이라고 생각하기가 쉽다.
물론 웃음은 개인적인 것이다.
그러나 어떤 개인적인 행위라도 그것이 사회적 맥락에 놓이게 되는 한 예기치 못했던 의외의 의미를 지니게 마련이다.
웃음의 사회적 의미를 진지하게 고찰한 베르그송은 웃음이란 "인간이 사물이나 기계처럼 딱딱해져서 유연성을 상실하여 '비사회적인 존재'가 되는 현상에 대한 사회적 징벌"이라고 말한다.
그는 한 사회는 구성원들이 유연성을 확보할 때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면서 진보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므로 베르그송에 따르면 경직된 인간은 사회성을 저해하는 인물이 되고,유연성이 사라진 사회는 진보의 가능성이 그만큼 줄어들게 된다.
베르그송이 강조하는 웃음의 사회적 기능은 여기에 있다.
웃음은 경직된 사회를 유연하게 만들고 각 개인들을 타인과 조화할 수 있도록 재적응시키며,날카로운 면을 둥글게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웃음은 단지 미학적이거나 개인적인 데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사회의 진보를 가능하게 한다는 의미를 지닌다.
작가 김유정이 소설을 쓰던 시절은 식민지 시대였다.
다시 말해 정치 사회적 억압이 극에 달했던 시기였고,뿐만 아니라 식민정책으로 인해 자작농은 몰락하고 지주와 마름에 의한 소작농에 대한 착취 역시 그 정도가 심했던 시절이었다.
일제는 식민지배를 위해 민족 내부가 계층 간의 갈등과 모순 속에 빠지도록 조장했는데 그런 까닭에 당시의 현실은 민족에게 닥친 외부적인 시련 못지않게 내부적으로도 심한 갈등이 표출되던 시기였다.
지주와 마름 대 소작농의 대결구도는 빈번한 소작쟁의로 이어져 갈수록 계층사이의 오해와 불신은 높아져 간 것이다.
이런 상황 속에서 사회적 진보란 요원한 일일 수밖에 없었고 일제는 이점을 식민지배에 철저히 활용한 측면이 적지 않다.
작가 김유정은 이처럼 갈등과 모순으로 경직되어 버린 현실을 웃음과 해학으로 유연하게 만들어보고자 한 점에서 큰 의미를 지닌다.
⊙ 「동백꽃」의 긴장-마름의 딸과 소작농의 아들
김유정의 대표작 「동백꽃」에는 갈등과 모순의 관계였던 마름과 소작농의 관계가 제시되어 있다.
그러나 당시의 여느 소설과 달리 작품 안에는 심각한 관계가 없다.
오히려 사춘기 남녀를 대상으로 하여 한편의 청춘 로맨스를 보는듯한 느낌을 갖게 만든다.
그러잖아도 저희는 마름이고 우리는 그 손에서 배재를 얻어 땅을 부치므로 일상 굽실거린다.
우리가 이 마을에 처음 들어와 집이 없어서 곤란으로 지낼 제 집터를 빌리고 그 위에 집을 또 짓도록 마련해 준 것도 점순네의 호의였다.
그리고 우리 어머니 아버지도 농사 때 양식이 달리면 점순네한테 가서 부지런히 꾸어다 먹으면서 인품 그런 집은 다시없으리라고 침이 마르도록 칭찬하곤 하는 것이다. (중략)
나는 멍하니 섰다가 점순이가 매섭게 눈을 홉뜨고 닥치는 바람에 뒤로 벌렁 나자빠졌다.
"이놈아! 너 왜 남의 닭을 때려죽이니?" "그럼 어때?"하고 일어나다가,"뭐 이 자식아! 누 집 닭인데?"하고 복장을 떼미는 바람에 다시 벌렁 자빠졌다. (중략)
그러다 점순이가 앞으로 다가와서,"그럼,너 이 담부턴 안 그럴 테냐?"하고 물을 때에야 비로소 살 길을 찾은 듯싶었다.
나는 눈물을 우선 씻고 뭘 안 그러는지 명색도 모르건만,"그래!"하고 무턱대고 대답하였다.
"요 담부터 또 그래 봐라,내 자꾸 못살게 굴 테니." "그래 그래,인젠 안 그럴 테야." "닭 죽은 건 염려 마라. 내 안 이를 테니." 그리고 뭣에 떠다밀렸는지 나의 어깨를 짚은 채 그대로 퍽 쓰러진다.
그 바람에 나의 몸뚱이도 겹쳐서 쓰러지며 한창 피어 퍼드러진 노란 동백꽃 속으로 폭 파묻혀 버렸다.
- 김유정,「동백꽃」
「동백꽃」은 모두가 잘 알고 있듯이 사랑에 빠진 점순이와 점순이의 마음을 잘 받아주지 못하는 우직한 '나'의 이야기이다.
인용문에서 보듯 '나'는 소작인의 아들로서 점순네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가 없고 그런 까닭에 점순이의 시선을 부담스럽게 느낄 수밖에 없는 처지이다.
다시 말해서 '나'는 소작인의 아들이기 때문에 점순이에게 함부로 할 수가 없는 것이다.
짧은 에피소드로 그려진 작품이지만 분명히 작품 속에는 당대의 마름과 소작인의 관계가 설정되어 있다.
한 가지 다른 점은 당대의 작품들이 마름과 소작인의 관계를 갈등관계로 묘사한 반면,이 작품에서는 마름이 단지 착취와 수탈의 주체가 아니라 소작농에게 대단히 호의와 배려를 베푸는 존재로 그려져 있다는 사실이다.
그런 까닭에 작품의 주요 갈등은 점순이의 욕망과 이를 받아들일 수 없는 '나'에 집중되고 실제 현실에서 끊임없이 갈등을 벌이던 마름과 소작인의 긴장은 잠시 멈춰진다.
서로는 상대를 향해 보다 더 차분한 시선을 가질 수 있게 되며,또한 계층을 뛰어넘은 젊은 청춘들의 사랑 이야기를 보며 화해의 가능성도 조심스럽게 생각할 수 있는 것이다.
⊙ 웃음은 미래를 생각하게 한다
인간이 지닌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판단은 삶을 살아가는 데 대단히 중요한 기능을 한다.
현재 상황이 지닌 우여곡절을 제대로 분간하지 못하고 위험을 위험으로 파악하지 못한다면 생각지도 못한 끔찍한 결과를 맞이할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생각만으로 삶을 살아간다면 기계와 같은 경직성을 피할 수가 없다.
따라서 인간에게는 합리적 이성 못지않게 유연하며 여유가 있는 태도도 반드시 필요하다.
작가 김유정의 경우를 떠올려 보자면 식민지적 상황이 무엇인지를 정확히 인식하는 것도 중요하지만,현실을 지나치게 심각하게 받아들여 갈등을 더욱 악화시키는 것은 옳지 못한 일이다.
오히려 한 발짝 떨어져 상대에 대해 여유 있게 생각하고 웃음으로 다가선다면 상대의 격한 태도도 때로는 누그러들 수 있는 법이다.
그리고 그런 유연한 상황에서 미래에 대한 전망도 생각해 볼 수가 있다.
영화 「인생은 아름다워」에서 아들 죠수아를 살린 것은 독일군에 강렬히 맞선 아버지 귀도가 아니라 목숨이 다할 때까지 익살과 재치가 넘쳤던 귀도였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나그네의 옷을 벗기는 것은 매서운 바람이 아니라 따사로운 햇볕이다.
전주 상산고 교사 etika1@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