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cus] 북한 테러지원국 해제 '음지에서 양지로?'


美와 핵 시설 검증 합의…자금·식량난 '숨통'

미국이 10월 12일 0시(한국시간)를 기해 북한을 테러지원국에서 해제했다.

지난 1987년 12월 KAL(대한항공) 858기 폭파 사건으로 1988년 1월 미국이 북한을 테러지원국으로 지정한 지 20년9개월 만이다.

'테러지원국'은 미국의 용어이고 미국의 국내법이지만 전 세계적으로 미치는 영향이 막강하다.

북한이 미국과의 핵 협상에서 테러지원국 해제에 그토록 큰 공을 들였던 것도 테러지원국 명단에서 삭제됨으로써 얻을 수 있는 상징적,실질적 이득이 크기 때문이다.

북한 입장에서는 20년 동안의 외교적 숙원을 이뤄낸 셈이고 미국은 북한으로부터 테러지원국이라는 굴레를 벗기는 대신 핵 시설 검증에 대한 북한의 동의를 얻어낸 것이다.

⊙ 테러지원국 해제의 의미는?

테러지원국 해제는 미 행정부가 의회에 통보함으로써 절차가 시작된다.

의회는 45일 간의 조정 기간을 거쳐 의회가 반대 의견을 제출하지 않을 경우 국무부 장관이 이에 서명함으로써 발효된다.

이번에 콘돌리자 라이스 미 국무장관이 서명함으로써 한국 시간으로 12일을 기해 발효됐다.

이번에 테러지원국 해제가 이슈가 된 것은 지난해 10월 북핵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6자회담에서 한국,미국,일본,중국,북한,러시아 등 6개국이 북핵 해결을 위한 핵불능화(핵 시설 및 핵 물질,무기 등을 쓰지 못하게 무력화한다는 뜻)의 상응조치로서 미국이 북한에 제공하기로 한 일종의 대가로 합의했기 때문이다.

즉 북한은 핵 시설 등을 불능화하고 미국은 이에 상응하는 조치로 북한을 테러지원국에서 해제키로 한 것이다.

이는 북한이 제시한 요구사항이었고 북한은 그만큼 테러지원국에서 벗어나기를 소망해 왔다.

여기서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은 테러지원국 해제가 북한이 핵을 불능화하는 것에 대한 상응조치로 이뤄진다는 점이다.

미국은 북한이 핵 시설 및 핵무기를 보유하고 핵 물질을 개발하는 것이 그 어떤 것보다 가장 강력한 국제 테러 지원 가능성이라고 판단해 왔다.

북한이 이것을 불능화하는 것은 테러지원국 가능성이 그만큼 낮아진다고 판단한 것이다.

테러지원국이라는 것은 말 그대로 국제 테러 행위를 지원하는 국가라는 것이고 북한은 대표적인 테러지원국으로 악명을 떨쳐왔다.

하지만 악명보다 더 무서운 것은 테러지원국으로 인해 적용되는 각종 법이다. 무기수출통제,수출관리법,국제금융기관법,대외원조법,적성국교역법 등 5개 미국 법률을 포함해 모두 19개의 제재가 테러지원국의 국제 행위를 제한하고 있다.

이것이 가능한 것은 물론 미국이 유엔을 비롯한 국제기구에 가장 많은 돈을 내고 있고 가장 큰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 테러지원국은 무기 수출도 맘대로 못하고,국제 금융기관으로부터 차관 등의 지원도 받지 못하며 다른 국가의 대외 원조 대상이 되지도 못하고 국제 교역도 함부로 할 수 없다는 뜻이다.

테러지원국 해제의 의미는 북한이 이런 굴레로부터 벗어났다는 뜻이다.

⊙ 북한과 미국의 이해득실

일단 북한으로서는 20년9개월 만에 테러지원국이라는 오명을 벗는다는 상징적 의미 하나만으로도 남는 장사다.

특히 위에서 언급한 5개 법 중 국제금융기관법은 국제통화기금(IMF),세계은행 같은 국제금융기구가 테러지원국에 차관 제공이나 지원을 위해 해당 국제기구의 자금을 쓰지 못하게 하고 있다.

북한은 이 조항에서 벗어나게 돼 국제차관 등 급한 자금의 수혈은 물론 장기적으로 식량난과 같은 현안을 해결하는 데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북한은 테러지원국 해제로 무기 수출과 관련해 받았던 각종 제약도 상당히 벗어나게 된다.

긴장국면 해소로 남북 경협에도 긍정적으로 작용할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전략물자 수출 통제 규정의 완화로 개성공단 등 북한지역에 대한 남한의 설비 반출이 종전보다 쉬워지는 만큼 경제 분야의 활성화가 예상되기 때문이다.

물론 북한이 남는 장사만 한 것은 아니다.

결론적으로 북한이 이번 미국과의 힘겨루기에서는 이긴 셈이 됐지만 테러지원국에서 해제되는 과정에서 미국에 다시 한번 좋지 않은 인상을 남겼다.

11월4일 대선을 통해 새롭게 등장할 미국 행정부가 어느 쪽이 되든 북한에 대해 안 좋은 인식을 갖게 될 것은 필연적이다.

북한에 비해 미국은 별로 얻은 것이 없다.

북한은 애초 비핵화 2단계인 핵불능화 과정을 이행하도록 돼 있었기 때문에 그 과정으로 복귀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미국은 굳이 북한과의 협상에서 지렛대가 되는 테러지원국 해제카드를 포기할 필요는 없었다.

조지 부시 행정부는 내년 1월로 끝나는 임기 내 북한의 핵불능화라는 2단계 목표달성의 동력을 되살렸다는 점에서 이번 핵검증 합의를 나쁘지 않은 결과로 판단하는 듯하다.

대선이 얼마 남지 않은 시점의 부시 대통령 입장에서는 일단 6자회담 판이 깨지는 것을 막으면서 구색을 갖춘 핵검증 합의를 도출해 냈다는 것이다.

양무진 북한대학원대학교 교수는 "부시 정부는 북핵 진전이라는 외교적 성과가 필요했고 북한도 테러지원국 해제에 대해 새 정부와 협상하는 데 부담을 느낀 것으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그러나 미국은 북한이 영변 핵시설을 재가동하겠다고 벼랑 끝 외교를 구사하는 데 끌려가다가 테러지원국 해제카드를 일찌감치 써버렸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무엇보다 미신고 시설에 대해서는 북한의 동의를 얻어야만 검증이 가능하도록 합의해 줌으로써 스스로 발목을 잡았다.

⊙ 그렇다면 이제 북한은 정상국가?

그렇진 않다.

북한은 여전히 다양한 국제 사회의 제재를 받고 있다.

국제연합(UN)의 제재를 비롯해 북한 인권문제,대량살상무기 확산에 따른 각종 제한 조치가 남아 있다.

즉 아직 북한은 대한민국과 같은 정상 국가가 아닌 국제 사회로부터 인권 및 대량 무기 확산 등으로 계속 감시받고 제재를 당하는 일종의 비정상국가인 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 테러지원국 해제 조치로 인해 다른 국제 사회의 제재 조치에도 변화가 있을 수 있다.

북한의 태도 여하에 달린 것이긴 하지만 앞으로 북핵 문제가 진전되는 것에 따라 다른 국제사회의 제재도 순차적으로 풀릴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여기서 눈여겨 봐야 할 것은 이번 미국의 북한 테러지원국 해제가 잠정 조치라는 점이다.

미국은 북한이 핵 불능화를 완전하게 하지 않을 것을 우려해 나름대로의 안전 장치를 뒀다.

북한이 핵 문제에 있어 다시 생떼를 쓸 경우 테러지원국 해제라는 잠정 조치를 원상회복한다는 것이다.

미국의 대북 테러지원국 해제 과정은 전형적인 국제 정치 협상의 사례다.

어느 쪽도 파국을 원치 않지만,상대방의 진심을 알 수 없기에 밀로 당기는 수싸움을 하면서 결국 하나씩 주고 받으며 타협안을 이끌어냈다.

임원기 한국경제신문 기자 wonki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