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몽을 꿈꾸는 청춘들의 우정과 사랑
연재를 시작하며…
필자는 '소설 이야기'를 통해 어려운 논술 주제를 현대 소설로 풀어 갈것입니다.
삶의 다양한 모습을 담고 있는 우리 소설이야말로 폭넓은 논술 주제를 알기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소재가 될 것입니다.
소설을 감상하며 논술의 배경지식도 쌓아봅시다.
⊙ 연애와 계몽 사이에서
한국의 본격적인 근대장편소설로 평가받았던 춘원 이광수의 '무정'은 계몽성과 오락성이 공존한다.
작품의 줄거리는 일본 동경에서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이형식이 경성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치면서 시작된다.
그는 미국 유학을 준비하는 김장로의 딸 선형에게 영어를 개인지도 하면서 차츰 연정을 품는다.
그러다가 옛 은사의 딸인 영채가 하숙집으로 찾아오면서 갈등이 생기는데 그동안 영채는 아버지를 위해 기생이 되면서도 형식과 정혼했다는 사실을 상기하며 절개를 지켜왔다.
형식은 신여성 선형과 구여성 영채 사이에서 방황하게 되고 그 사이 영채는 겁탈을 당하게 된다.
그녀는 자살을 결심하지만 때마침 동경 유학생 김병욱을 만나 마음을 다잡고 유학을 준비한다.
시간이 흘러 이들 모두는 유학길에 서로 만나게 되는데 때마침 터진 삼랑진 수해 극복을 위한 자선 음악회를 함께 열며 민중계몽에 대한 의지를 불태운다.
작품의 줄거리를 통해서 알 수 있듯이 작품을 관통하는 오락적 요소는 분명 연애담이다.
형식을 사이에 두고 선형과 영채,두 여성이 배치되고 있는 전형적인 삼각관계인 것이다.
그러나 이 작품은 단순히 통속적인 이야기만은 아니다.
그 이유는 작품 속에 내재된 계몽성에 있다.
계몽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어둠을 밝히는 일이다.
당시 근대적인 문명의 세례를 받지 못한 식민지 조선은 어느 작가의 표현대로 '묘지'나 다름없는 곳이었다.
작가는 이러한 전근대적인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해 '계몽'을 작품 이면에 배치하여 자신이 지향하는 세계를 구체화해냈던 것이다.
⊙ 계몽이란 무엇인가 - '스스로 생각할 용기를 가져라!'
계몽은 문자 그대로 깨우침이다.
그렇다면 계몽을 실천하는 가장 효율적인 방법은 무엇인가.
그것은 다름 아닌 교육이다.
'무정'의 등장 인물 간 관계에서 연애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다름 아닌 선생과 제자의 관계이다.
첫째 형식과 선형은 연인인 동시에 선생과 제자 사이로 엮여 있다.
뿐만 아니다.
형식은 직업이 교사여서 주변 사람들은 모두 형식이 깨우침을 전달하는 상대가 된다.
영채와 병욱도 선생과 제자의 관계에 대응한다.
영채는 원래 정혼이라는 유교적이고 전통적인 질서를 따르면서,정절이라는 낡은 인습 속에 얽매여 살아가는 인물이었다.
그러다가 동경 유학생 병욱에게 깨우침을 얻어 비로소 새로운 시대에 대해 눈을 뜨게 된다.
결국 이 둘의 관계는 계몽을 통해 근대인으로 삶을 얻는 과정을 표현하기 위해 설정되었다.
이렇게 보면 영채는 병욱의 제자이며,병욱은 영채의 선생이 되는 것이다.
이처럼 작중 인물을 이어주는 중요한 끈은 다름 아닌 '교육'이며,교육으로 실천되는 '계몽'이다.
계몽이란 본질적으로 무엇인가?
원래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아주 오래 전 1784년 칸트가 '베를린 월보'에 게재한 짧은 논문에서 찾아볼 수 있다.
계몽의 기원을 외부에서 찾는다고 의아해할지 모르나 '근대'라든지 '계몽'이 '우리'에게서 시작된 개념이 아닌 이상 그 기원을 유럽에서 찾는 것은 당연하다.
칸트는 위 글에서 계몽은 '미성숙한 자아가 성숙한 자아로 나아가는 것'을 의미하며,성숙한 자아란 타인의 생각에 의해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라 자기 스스로 생각하며 행동하는 존재라고 밝힌다.
근대 이전에 인간의 사고와 행위를 지배하는 것은 자기 자신이 아니라 자신보다 높은 지위에 있는 영주,그리고 영주를 지배하는 왕과 교권이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대중은 스스로 생각할 용기마저 지니지 못했고 그런 까닭에 교회와 권력은 대중들을 비합리적인 미신과 주술의 상상력으로 지배를 할 수가 있었다.
칸트는 바로 이와 같은 상황에서 '계몽'의 개념을 통해 스스로 생각할 용기를 지녀야 한다고,이성을 적극 사용해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하기에 이른다.
결국 중세를 지배해왔던 봉건적 질서라든지,교회의 권력은 이성으로 인해 붕괴된다.
계몽은 정치권력의 중심을 교회와 봉건영주로부터 시민으로 이동하도록 강력히 작용했던 것이다.
이처럼 '계몽'은 시민사회와 과학의 발달로 대표되는 유럽의 근대를 열어젖힌 가장 핵심적인 메커니즘이었다.
⊙ 계몽의 프로젝트 - '과학'
그네는 결국 아무 힘이 없다.
자연(自然)의 폭력(暴力)에 대하여서야 누구라서 능히 저항(抵抗)하리요마는 그네는 너무도 힘이 없다.
일생에 뼈가 휘도록 애써서 쌓아 놓은 생활의 근거를 하룻밤 비에 다 씻겨 내려 보내고 말리만큼 그네는 힘이 없다.
그네의 생활의 근거는 마치 모래로 쌓아 놓은 것과 같다. (중략)
그네의 얼굴을 보건대 무슨 지혜가 있을 것 같지 아니하다.
모두 다 미련해 보이고 무감각(無感覺)해 보인다.
그네는 몇 푼어치 아니 되는 농사한 지식을 가지고 그저 땅을 팔 뿐이다.
이리하여서 몇 해 동안 하느님이 가만히 두면 썩은 볏섬이나 모아 두었다가는 한번 물이 나면 다 씻겨 보내고 만다.
그래서 그네는 영원히 더 부(富)하여짐이 없이 점점 더 가난하여진다. (중략)
저들에게 힘을 주어야 하겠다.
지식을 주어야 하겠다. 그리해서 생활의 근거를 안전하게 하여 주어야 하겠다.
"과학(科學)! 과학!"
- 이광수,'무정'중에서
인용된 부분은 작품의 결말 중 일부이다.
유학을 가는 기차 안에서 우연히 만난 형식과 선형,영채와 병욱은 때마침 수해를 입은 삼랑진에서 자선음악회를 열며 도움을 주고자 하는데 이 장면은 바로 그 과정 속에 삽입되어 있다.
작품 속에서 인물들은 수해라는 자연재해에 힘없이 당하는 조선의 현실을 목도하면서 무엇보다도 지식과 과학이 필요함을 역설한다.
작가가 보기에 당시 조선은 인용된 것처럼 '너무 약하고 어리석어 보였고,조선인들의 얼굴은 무슨 지혜가 있을 것 같지가 않고 모두 다 미련해 보였으며 무감각(無感覺)해 보였던 것'이다.
다시 말해 '과학',곧 '이성'이 작용하지 않는 한,조선인들은 북해도의 '아이누'와 같은 존재가 될 것이라는 것이다.
이는 미신과 주술,그리고 교권의 논리에 스스로 이성을 사용하지 않았던 중세인들의 모습과 그 맥락이 같다.
결국 이러한 조선의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식민지 조선인 스스로가 유럽에서와 같이 이성을 자발적으로 사용하는 존재로 거듭나야만 했는데 작가는 이를 위해서 동경 유학생 같은 선구적 존재가 대중을 위해 '교육'을 실천해야 한다고 본 것이다.
⊙ '무정'이 지닌 계몽의 태생적 한계
작가가 꿈꾸던 근대는 교육을 통해서 빠른 속도로 번져나갔다.
작품 속에서 전통의 상징이었던 영채를 신여성으로 거듭나게 했듯이 계몽과 교육은 식민지 조선을 빠르게 근대화시켜나갔던 것이다.
그러나 남는 문제는 있다.
진정한 의미의 계몽은 스스로 생각하는 힘을 갖추는 것,스스로 이성을 사용하는 용기를 갖는 데에 있다.
그러므로 가장 중요한 것은 주체의 자발적 의지이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작가 이광수가 선택한 계몽의 방식은 기존의 지식과 과학을 가르치고 전달하는 것으로만 한정되어 있었다.
다시 말해 스스로 이성을 사용하는 방법을 깨우치게 한 것이 아니라 근대적인 신문물을 수용하는 데에만 급급했던 것이다.
식민지 조선의 현실을 탐구하고 성찰하지 않은 채 이미 잘 만들어진 근대를 편의적으로 이식해 오고자 했던 것.
결국 작가는 처음부터 '친일'로 기우는 태생적 한계를 지녔던 것이다.
이미 잘 만들어진 일본의 근대와 병합하면 조선의 근대도 손쉽게 찾아올 것이라는 오판으로부터 춘원은 자유롭지 못했던 것이다.
전주 상산고 교사 etika1@naver.com
연재를 시작하며…
필자는 '소설 이야기'를 통해 어려운 논술 주제를 현대 소설로 풀어 갈것입니다.
삶의 다양한 모습을 담고 있는 우리 소설이야말로 폭넓은 논술 주제를 알기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소재가 될 것입니다.
소설을 감상하며 논술의 배경지식도 쌓아봅시다.
⊙ 연애와 계몽 사이에서
한국의 본격적인 근대장편소설로 평가받았던 춘원 이광수의 '무정'은 계몽성과 오락성이 공존한다.
작품의 줄거리는 일본 동경에서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이형식이 경성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치면서 시작된다.
그는 미국 유학을 준비하는 김장로의 딸 선형에게 영어를 개인지도 하면서 차츰 연정을 품는다.
그러다가 옛 은사의 딸인 영채가 하숙집으로 찾아오면서 갈등이 생기는데 그동안 영채는 아버지를 위해 기생이 되면서도 형식과 정혼했다는 사실을 상기하며 절개를 지켜왔다.
형식은 신여성 선형과 구여성 영채 사이에서 방황하게 되고 그 사이 영채는 겁탈을 당하게 된다.
그녀는 자살을 결심하지만 때마침 동경 유학생 김병욱을 만나 마음을 다잡고 유학을 준비한다.
시간이 흘러 이들 모두는 유학길에 서로 만나게 되는데 때마침 터진 삼랑진 수해 극복을 위한 자선 음악회를 함께 열며 민중계몽에 대한 의지를 불태운다.
작품의 줄거리를 통해서 알 수 있듯이 작품을 관통하는 오락적 요소는 분명 연애담이다.
형식을 사이에 두고 선형과 영채,두 여성이 배치되고 있는 전형적인 삼각관계인 것이다.
그러나 이 작품은 단순히 통속적인 이야기만은 아니다.
그 이유는 작품 속에 내재된 계몽성에 있다.
계몽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어둠을 밝히는 일이다.
당시 근대적인 문명의 세례를 받지 못한 식민지 조선은 어느 작가의 표현대로 '묘지'나 다름없는 곳이었다.
작가는 이러한 전근대적인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해 '계몽'을 작품 이면에 배치하여 자신이 지향하는 세계를 구체화해냈던 것이다.
⊙ 계몽이란 무엇인가 - '스스로 생각할 용기를 가져라!'
계몽은 문자 그대로 깨우침이다.
그렇다면 계몽을 실천하는 가장 효율적인 방법은 무엇인가.
그것은 다름 아닌 교육이다.
'무정'의 등장 인물 간 관계에서 연애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다름 아닌 선생과 제자의 관계이다.
첫째 형식과 선형은 연인인 동시에 선생과 제자 사이로 엮여 있다.
뿐만 아니다.
형식은 직업이 교사여서 주변 사람들은 모두 형식이 깨우침을 전달하는 상대가 된다.
영채와 병욱도 선생과 제자의 관계에 대응한다.
영채는 원래 정혼이라는 유교적이고 전통적인 질서를 따르면서,정절이라는 낡은 인습 속에 얽매여 살아가는 인물이었다.
그러다가 동경 유학생 병욱에게 깨우침을 얻어 비로소 새로운 시대에 대해 눈을 뜨게 된다.
결국 이 둘의 관계는 계몽을 통해 근대인으로 삶을 얻는 과정을 표현하기 위해 설정되었다.
이렇게 보면 영채는 병욱의 제자이며,병욱은 영채의 선생이 되는 것이다.
이처럼 작중 인물을 이어주는 중요한 끈은 다름 아닌 '교육'이며,교육으로 실천되는 '계몽'이다.
계몽이란 본질적으로 무엇인가?
원래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아주 오래 전 1784년 칸트가 '베를린 월보'에 게재한 짧은 논문에서 찾아볼 수 있다.
계몽의 기원을 외부에서 찾는다고 의아해할지 모르나 '근대'라든지 '계몽'이 '우리'에게서 시작된 개념이 아닌 이상 그 기원을 유럽에서 찾는 것은 당연하다.
칸트는 위 글에서 계몽은 '미성숙한 자아가 성숙한 자아로 나아가는 것'을 의미하며,성숙한 자아란 타인의 생각에 의해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라 자기 스스로 생각하며 행동하는 존재라고 밝힌다.
근대 이전에 인간의 사고와 행위를 지배하는 것은 자기 자신이 아니라 자신보다 높은 지위에 있는 영주,그리고 영주를 지배하는 왕과 교권이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대중은 스스로 생각할 용기마저 지니지 못했고 그런 까닭에 교회와 권력은 대중들을 비합리적인 미신과 주술의 상상력으로 지배를 할 수가 있었다.
칸트는 바로 이와 같은 상황에서 '계몽'의 개념을 통해 스스로 생각할 용기를 지녀야 한다고,이성을 적극 사용해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하기에 이른다.
결국 중세를 지배해왔던 봉건적 질서라든지,교회의 권력은 이성으로 인해 붕괴된다.
계몽은 정치권력의 중심을 교회와 봉건영주로부터 시민으로 이동하도록 강력히 작용했던 것이다.
이처럼 '계몽'은 시민사회와 과학의 발달로 대표되는 유럽의 근대를 열어젖힌 가장 핵심적인 메커니즘이었다.
⊙ 계몽의 프로젝트 - '과학'
그네는 결국 아무 힘이 없다.
자연(自然)의 폭력(暴力)에 대하여서야 누구라서 능히 저항(抵抗)하리요마는 그네는 너무도 힘이 없다.
일생에 뼈가 휘도록 애써서 쌓아 놓은 생활의 근거를 하룻밤 비에 다 씻겨 내려 보내고 말리만큼 그네는 힘이 없다.
그네의 생활의 근거는 마치 모래로 쌓아 놓은 것과 같다. (중략)
그네의 얼굴을 보건대 무슨 지혜가 있을 것 같지 아니하다.
모두 다 미련해 보이고 무감각(無感覺)해 보인다.
그네는 몇 푼어치 아니 되는 농사한 지식을 가지고 그저 땅을 팔 뿐이다.
이리하여서 몇 해 동안 하느님이 가만히 두면 썩은 볏섬이나 모아 두었다가는 한번 물이 나면 다 씻겨 보내고 만다.
그래서 그네는 영원히 더 부(富)하여짐이 없이 점점 더 가난하여진다. (중략)
저들에게 힘을 주어야 하겠다.
지식을 주어야 하겠다. 그리해서 생활의 근거를 안전하게 하여 주어야 하겠다.
"과학(科學)! 과학!"
- 이광수,'무정'중에서
인용된 부분은 작품의 결말 중 일부이다.
유학을 가는 기차 안에서 우연히 만난 형식과 선형,영채와 병욱은 때마침 수해를 입은 삼랑진에서 자선음악회를 열며 도움을 주고자 하는데 이 장면은 바로 그 과정 속에 삽입되어 있다.
작품 속에서 인물들은 수해라는 자연재해에 힘없이 당하는 조선의 현실을 목도하면서 무엇보다도 지식과 과학이 필요함을 역설한다.
작가가 보기에 당시 조선은 인용된 것처럼 '너무 약하고 어리석어 보였고,조선인들의 얼굴은 무슨 지혜가 있을 것 같지가 않고 모두 다 미련해 보였으며 무감각(無感覺)해 보였던 것'이다.
다시 말해 '과학',곧 '이성'이 작용하지 않는 한,조선인들은 북해도의 '아이누'와 같은 존재가 될 것이라는 것이다.
이는 미신과 주술,그리고 교권의 논리에 스스로 이성을 사용하지 않았던 중세인들의 모습과 그 맥락이 같다.
결국 이러한 조선의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식민지 조선인 스스로가 유럽에서와 같이 이성을 자발적으로 사용하는 존재로 거듭나야만 했는데 작가는 이를 위해서 동경 유학생 같은 선구적 존재가 대중을 위해 '교육'을 실천해야 한다고 본 것이다.
⊙ '무정'이 지닌 계몽의 태생적 한계
작가가 꿈꾸던 근대는 교육을 통해서 빠른 속도로 번져나갔다.
작품 속에서 전통의 상징이었던 영채를 신여성으로 거듭나게 했듯이 계몽과 교육은 식민지 조선을 빠르게 근대화시켜나갔던 것이다.
그러나 남는 문제는 있다.
진정한 의미의 계몽은 스스로 생각하는 힘을 갖추는 것,스스로 이성을 사용하는 용기를 갖는 데에 있다.
그러므로 가장 중요한 것은 주체의 자발적 의지이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작가 이광수가 선택한 계몽의 방식은 기존의 지식과 과학을 가르치고 전달하는 것으로만 한정되어 있었다.
다시 말해 스스로 이성을 사용하는 방법을 깨우치게 한 것이 아니라 근대적인 신문물을 수용하는 데에만 급급했던 것이다.
식민지 조선의 현실을 탐구하고 성찰하지 않은 채 이미 잘 만들어진 근대를 편의적으로 이식해 오고자 했던 것.
결국 작가는 처음부터 '친일'로 기우는 태생적 한계를 지녔던 것이다.
이미 잘 만들어진 일본의 근대와 병합하면 조선의 근대도 손쉽게 찾아올 것이라는 오판으로부터 춘원은 자유롭지 못했던 것이다.
전주 상산고 교사 etika1@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