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이징올림픽 중화민족 부흥 기치…세번째 訪韓

[Focus] 中 지도자 후진타오의 리더십 빛 볼까
베이징올림픽은 13억 중국인들에게 '100년의 꿈'을 실현했다는 자부심을 안겼다.

중국 최고 권력자인 후진타오(胡錦濤) 공산당 총서기 겸 국가주석에게도 올림픽은 큰 의미를 갖는다.

내부적으로는 국가 리더십을 더욱 확고히 갖추게 됐고 대외적으로는 국가 지도자로서의 국제적인 위상을 한층 높였기 때문이다.

후 주석이 중국 정치체제의 최대 위협인 소수 민족의 독립과 이에 따른 분열을 막기 위해 내세운 '위대한 중화민족 부흥'의 깃발은 이번 올림픽에서 중국이 종합 금메달 1위를 기록하면서 성공적으로 펼쳐졌다.

1894년 아편전쟁 이후 거세진 외세 침략에 대해 피해의식이 강했던 중국인들은 올림픽을 계기로 굴욕의 역사를 딛고 일어섰다는 자긍심을 갖게 됐다.

후 주석의 한층 강화된 국제 위상은 올림픽이 개막한 지난 8월8일 70여개국 정상급 지도자를 한자리에 불러 모은 자리에서 확인됐다.

오찬 연회장인 베이징 인민대회당에서 세계의 정상들이 그를 '알현'하는 듯한 광경이 연출됐고 미국의 조지 W 부시 대통령조차 30분간 줄을 서 기다려야 했다.

그런 후 주석이 올림픽 폐막 직후인 지난 25일 1박2일의 일정으로 한국을 찾았다.

2005년에 이어 중국 국가주석으로는 처음으로 재임 중 두 차례 방한한 것.

중국 권력 서열 5위인 국가부주석 시절이던 1998년 한국을 방문한 것을 포함하면 모두 세 차례 방한했다.

전문가들은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와 행보에서 거대 중국호의 변화를 읽을 수 있다고 말한다.

중국이 올 하반기 경제운용 기조를 물가 상승과 경기 과열을 동시에 억제하는 '량팡(兩防·두 가지를 방어한다)'에서 물가를 억제하되 성장은 유지하는 '이바오이쿵(一保一控·하나는 유지하고 또 다른 하나는 통제한다)'으로 전환하기로 결정한 것은 지난 7월 말 공산당 정치국 회의에서였다.

하지만 후 주석의 입을 면밀히 지켜본 전문가라면 이미 2월 초 긴축완화 움직임을 감지할 수 있었다는 지적이다.

후 주석은 당시 공산당 고위 간부들을 대상으로 가진 단체 학습에서 "세계 경제 변화가 중국에 미치는 영향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거시조정 정책의 템포와 강도를 과학적으로 조절해야 한다"고 말했다.

당시에도 미국 경기침체 우려에 따른 수출 둔화와 폭설 피해가 겹치면서 중국의 긴축완화 가능성을 점치는 분석은 제기돼 왔지만 중국 고위 당국자가 이를 시사하는 발언을 한 것은 처음으로 이후 후 주석의 발언은 중국 당국자들과 관영 매체들이 가장 많이 인용하는 경구가 되다시피했다.

앞서 후 주석은 2005년 가을 공산당 전국대표대회(전대) 개막 일주일을 앞두고 톈진 빈하이신구를 전격 시찰해 이 지역을 상하이 푸둥에 맞먹을 중국 경제의 성장 동력으로 키울 것임을 예고하기도 했다.

후 주석의 입과 행보를 보면 중국이 어디로 갈지 알 수 있다는 얘기도 그래서 나온다.

후 주석은 그동안 성장 지상주의에 매달려 온 장쩌민 전 주석과는 달리 분배와 균형 발전을 강조하며 정책 노선을 바꿔 왔다.

그가 만들어 낸 '조화사회 건설'이나 '과학적 발전관'이라는 용어는 이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로 공산당은 물론 중국 내 모든 정책의 키워드가 됐다.

후 주석은 빈부 격차에 따른 반목과 분열의 움직임을 차단하기 위해 '위대한 중화민족의 부흥'을 기치로 내걸고 하나의 중국을 강조해 왔다.

한나라와 당나라 시대에 빛을 발한 중국의 전성기를 재현하겠다는 이른바 강한성당(强漢盛唐)에 공을 들인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

지난해 가을 열린 공산당 전대에서 5년 임기의 2기를 시작할 만큼 권력을 공고히한 후 주석의 화려한 모습 뒤에는 야망을 쉽게 드러내기보다는 은근히 때를 기다리며 묵묵하게 일해 온 특유의 성공 스타일이 자리하고 있다는 평가다.

수력발전 분야의 엔지니어를 꿈꾸던 후진타오가 명문 칭화(淸華)대에서 수리 분야를 전공한 뒤 간쑤(甘肅)성의 기술 요원으로 일할 때만 해도 그는 아무런 주목을 받지 못했다.

안후이성에서 차잎을 파는 가게를 운영하던 평범한 집안이란 출신 배경도 그랬다.

하지만 1974년 간쑤성 건설위원회 당비서가 되면서 그는 기술자에서 당 관료로 변신을 꾀한다.

국가 지도자의 길로 후진타오를 이끈 사람은 덩샤오핑의 오른팔로 불린 후야오방(胡耀邦) 전 공산당 총서기다.

지방 시찰을 나왔던 후야오방의 눈에 든 후진타오는 1989년 시짱(西藏·티베트)자치구 당위원회 서기로 발탁된다.

후진타오는 티베트 서기로 발탁된 그 해 3월 1만여 승려와 티베트인들이 수도 라싸의 거리를 점거해 독립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이자 직접 철모를 쓰고 진압 작전을 진두 지휘했다.

이런 후진타오의 단호한 행동을 놓고 일각에서는 무자비한 탄압이었다는 비판도 제기됐다.

하지만 그 때 보여준 강인한 인상은 그가 중앙 무대로 진입하는 발판이 됐다.

후진타오는 베이징 올림픽 직전 불거진 티베트 독립 유혈 시위와 쓰촨성 대지진,테러 사태 같은 대형 악재를 비교적 순조롭게 극복함으로써 위기관리 능력을 보여줬다는 평가도 받는다.

오광진 한국경제신문 기자 kjoh@hankyung.com


● 후진타오가 걸어온 길

1942년 안후이성 출생

1968년 칭화대 수리공정학과 졸업

1974년 간쑤성 건설위원회 당비서

1981년 공산주의청년단(공청단) 활동 개시

1989년 시짱자치구 당위원회 서기

1992년 공산당 정치국 상무위원

1998년 국가부주석

2002년 공산당 총서기

2003년 국가주석

2004년 당 중앙군사위원회 주석

※가족은 부인 류융청과 1남1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