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자들의 과시적 욕망을 자유로운 언어로 질타

[고전속 제시문 100선] (99) 토르스타인 베블런 '유한계급론(the theory of the leisure class)'
1899년 출간된 베블런의 「유한계급론」은 정치한 경제 분석서라기보다는 부자들에 대한 조롱과 야유에 가까운 이단적 일갈이었다.

이 책에서 그가 거머쥔 유일한 이론적 수단은 고전에 대한 학자적 겸양도 죽어 버린 책들의 고답적 축적도 아닌,천박하고 세속적인 일상적 사례와 언어들이었다.

그것은 베블런의 학문적 소양이 부족해서가 아니라,오히려 그러한 학문적 소양들이 지니는 유한계급적 낭비성을 경멸했던 그가 의도적으로 생활세계 내부의 직접적 사례들을 통해 부(富)의 경제사를 재구성해 보려는 문학적 상상력을 발휘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전통적인 사회 경제학의 이론적 맥락으로부터 자유로운 그의 언어들은 부자들의 사치와 낭비에 대하여 전혀 새로운 무기를 들고 마음껏 직격탄을 날린다.

결코 마르크스적이지 않은 그 무기의 가장 중요한 제원은 바로 '과시'다.

유한계급(有閑階級·leisure class)의 구성원들은 그 이름 그대로 한가하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들은 의무적으로 한가해야 한다.

생산 활동과 육체적 노동 행위를 천박하고 불경스러운 것으로 여겨야만 하는 그들의 가장 중요한 사회적 활동은 여가와 사치와 낭비와 소비다.

물론 그들에게 한가해야만 한다는 사회적 책무가 강요된 것은 아니다.

그들의 의무는 그들이 속한 계급 집단 내부의 과시적 아비투스(habitus)에 따른 다분히 자발적인 의지와 실천의 결과다.

이러한 실천 행위를 통해 그들은 하위 계급과 자신들이 속한 집단을 구별짓고, 그들의 집단 내부에서도 여러 국면들을 통해 좀 더 과시적으로 자신을 드러내고자 욕망한다.

이 같은 과시적 욕망은 오늘날의 부자들에게서 더욱 명확하게 발견되는 바,「유한계급론」에 대한 검토는 현대 자본주의 사회의 부와 소비 행위 등을 비판적으로 이해하는 데 의미 있는 일별이 될 것이다.

⊙ 원문 읽기

정착 산업이 성장하면서 금전의 소유는 명성과 존경을 부르는 관습적 근거로서 상대적인 중요성과 효력을 획득하게 된다. (중략)

이로써 부는 영웅적이거나 상징적인 성공과는 확연히 구별되는 명성을 가져다 줄 만한 성공의 증거로서 가장 쉽게 인정받게 된다는 것은 더욱 주목할 만한 점이다. (중략)

이제 공동체에서 존경받을 수 있는 어떤 위치에 서고자 한다면 필수적으로 일정량의 부를 소유해야 한다. (중략)

이렇게 축적한 부가 일단 축적자의 능력을 인정하는 공인된 지표가 되면,그가 소유한 부는 그 길로 존경받을 만한 독립적이고 결정적인 근거로 간주된다.

그가 소유한 재산은 전력을 다하여 진취적으로 획득했든 다른 사람들로부터 증여나 양도를 받아 수동적으로 획득했든 상관 없이 명성을 얻고 존경받을 수 있는 관습적인 근거가 된다.

해설

사실 정착 산업의 성장 이전에는 약탈을 통한 전리품의 축적이 명성을 과시하는 수단이었다.

그러나 생산 활동을 통한 정착 생활이 전쟁과 약탈 활동을 대신하면서 자본과 재화의 축적이 사회적 부와 명성을 판단하는 유일한 기준으로 대체되기에 이른 것이다.

주지해야 할 사실은 명성 과시욕이라는 교집합을 약탈과 자본 축적이 공유하고 있다는 점이다.

명성을 얻기 위한 오늘날의 금전 소유 혹은 금력 과시 경쟁이 그 역사적 기원을 약탈 행위에 두고 있다는 주장은 베블런의 탁월한 비판적 안목의 결과라는 세속적 평가를 넘어서,우리로 하여금 현대 사회의 맹목적인 자본주의적 의지와 그것이 야기하는 계급 갈등에 대한 진지한 성찰을 요구한다.

약탈을 통한 축적이란 결국 피약탈자의 불행을 담보로 성취된 것이며 그 자체 항구적인 갈등을 유발하는 동인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자각해야 할 심각한 문제는 사회 구성원들이 증여와 명성의 유착을 비도덕적으로 선망한다는 데 있다.

천민 자본주의 또는 한국형 자본주의 사회에는 자본이 노동을 통해서가 아니라 세습을 통해서 소유될 때 오히려 더욱 명예로운 것으로 여기는 병리적 욕망들이 분명히 내재해 있다.

이러한 욕망들이 결국 유한계급적 부자들뿐만 아니라 그 계급 집단에 진입하고자 혼신의 힘을 다해 노력하지만 매번 좌절하고 마는 비참한 하위계급 구성원들의 의지와 행위마저 규정해 버리고 만다는 데 베블런의 냉소적 비판이 있는 것이다.

⊙ 원문 읽기

가장 미개한 단계의 문화를 제외한 모든 문화에서 정상적으로 성장한 남자는 '품위 있는 주위 사람들과 환경' 덕분에, 그리고 '비천한 노동'을 면제받음으로써 자존심을 지키고 드높일 수 있다. (중략)

비천한 종류의 노동에 대한 본능적인 혐오감을 느끼지 않는 상류 계급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의 사고 습관에는 비천한 고용살이를 연상케 하는 직업들에 특별히 결부되는 의례적 불결함에 대한 구체적 감각이 있다. (중략)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들이 활약하던 시대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사려 깊은 남자들은 인간이 가치 있거나 우아하거나 결백한 삶을 영위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우선 일정한 여가 시간을 가지고 일상 생활에 당장 필요한 생산 활동을 면제받을 필요가 있다는 것을 언제나 인정해 왔다.

문명화된 모든 남자들의 눈에는 그처럼 한가로운 삶 자체는 물론 그런 삶의 결과들도 우아하고 고결하게 보였던 것이다.

해설

'직업에는 귀천이 없다'는 말이 지닌 가증스러움을 베블런만큼 적나라하게 고발한 학자는 이전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유한 계급의 구성원들은 '노동에 대한 과시적인 불참'을 통해서 자신의 금력을 과시하는 동시에 하위 계급의 비천한 노동을 '가난과 예속의 징표'로 고정시킨다.

부자들의 한가로움은 그 자체로 자유로운 시간에 대한 고귀한 영위이고 가난한 자들의 생산 노동은 육체와 정신을 모두 구속하는 천박한 직업으로 전락하고 마는 것이다.

부가 세습되면 한가로움도 동시에 세습되므로 세습의 가문들은 전통 있는 부자로 그 사회의 명성과 존경을 아낌없이 확보하게 될 것이다.

여기에 급작스러운 산업 발전의 잔재들을 주워 먹은 졸부들까지 가세하여 유한 계급의 꼴사나운 한가로움이 사회적으로 점점 더 가시화되면 하위 계급의 명성과 금력에 대한 욕망은 이루어질 수 없다는 허망함 때문에라도 더욱 증폭된다.

이 지경에 이르면 문제는 이제 가치와 도덕의 계열로 넘어간다.

노동에 대한 가치는 그에 대해 묻는 행위만으로도 지속적으로 판단 유보되고,계급 갈등은 배타와 선망을 넘나들며 그 골을 더욱 깊이 파고 들어간다.

이 때의 계급 갈등은 모든 계급이 유한성(有閑性)이라는 동일한 욕망을 지향한 데서 비롯된 것이라는 점을 고려할 때 그 이중성의 심각함을 알 수 있다.

부자들에 대한 하위 계급의 분노는 상위 계급으로의 편입 욕망이 좌절될 때마다 표출되는 양가적 감정의 자괴적 단면일 뿐이다.

더욱이 한가로움은 결코 분배되지 않는다는 사실 때문에 자괴감은 더욱 커져만 간다.

결과적으로 유한 계급의 과시적 한가로움이 모든 계급을 막론하고 하나의 도덕적 행위 규범으로 자리 잡게 되어 생산 활동에 대한 경멸과 노동에 대한 기피 현상을 유도하고 종국에는 한 사회의 실질적 발전과 성장조차 불가능하게 만드는 것이다.

⊙ 원문 읽기

외견상 평화적인 유한계급 남성은 최소한의 생계 유지와 육체적인 편의에 필요한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용역과 재화를 소비할 뿐 아니라 그런 소비 생활을 통해서 그는 자신이 소비하는 재화의 질에 관한 전문가적 소양도 구비하게 된다. (중략)

그가 소비하는 물건들의 개선과 혁신을 촉구하는 기본적인 동기와 당면 목표는 개인적인 안락과 행복을 위해 더욱 향상되고 세련된 제품을 생산할 수 있는 더 높은 효율성을 진작하는 데 있음은 의심할 나위 없다.

그러나 그것만이 그가 물건들을 소비하는 유일한 목적으로 남는 것은 아니다.

그는 명성의 규범이 당장 그 물건들을 요구하기 때문에,그리고 그 규범이 요구하는 기준에 따라 명성을 유지하기에 적합해 보이는 그런 쇄신을 이용하기 위해 물건들을 소비한다.

이처럼 좀 더 훌륭한 재화를 소비하는 것은 부의 증거이기 때문에 명예로운 일이 된다.

반면에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기준에 미달하는 소비는 열등함과 결함의 징표가 된다.

해설

소비의 영역에서도 유한 계급은 남다르다.

일차적으로 부자들은 실용성을 준거로 삼아 소비하지 않는다.

그것은 '열등함과 결함의 징표'일 뿐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소비하는 재화가 자신들이 누구인지를 말해 주는 상징적 코드로 작동하기를 바란다.

이 때 재화는 실재성을 상실한 채 항상 무엇인가를 지시하는 허구적 기호 또는 시뮬라크르로 전락하고 만다.

그러나 부자들은 베블런의 단언처럼 아무런 자각 없이 소비하기 때문에 기호와 허상이 자신들의 정체성과 아비투스를 더욱 견고하게 다져 주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기호의 소비는 나아가 포틀래치(potlatch)와 같은 선물과 향응이 판치는 과시적 연회의 장으로까지 그 영역을 확장한다.

유한 계급의 파티에서 그들이 소비하는 재화는 상호 비교되고 우열이 견주어지며 서열이 구분된다.

모든 것이 결정 나는 순간 재화는 기능과 기호의 의미를 모두 잃어버리고 다른 재화로 대체될 것이다.

과시의 현장에는 허망함만 남는다.

한가로움과 무한정한 소비 행위가 덧없는 기호 놀음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우리는 성찰적으로 알 수 있다.

그러나 자본의 역사가 깊어질수록 인간의 비판적 안목이 물질적 욕망에 더럽혀져 왔던 것도 사실이다.

이에 대한 자각 위에서 베블런의 비판적 풍자가 설 수 있었을 것이다.

따라서 베블런과 어깨를 겨루고 나란히 서고자 하는 것은 현대 사회가 당면한 제반 문제들을 성찰적으로 직시하겠다는 의지 회복의 표명에 다름 아니다.

그것은 허망함을 넘어가는 구체적이며 진정한 인간의 길이기도 하다.

진리영 S·논술 선임연구원 furyfury13@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