벨기에·佛 등 지역간 언어달라 분열 위기
[Global Issue] 언어소통 갈등겪는 EU…흔들리는 지역통합
유럽연합(EU)은 1993년 공식 출범 후 세계 지역통합기구의 선두주자이자 대표 상징으로 성장했다.

하지만 최근 정치와 경제, 문화 등 다양한 분야를 아울러 거대 지역통합을 꿈꾸는 EU에 커다란 장애물이 등장하고 있다.

바로 '언어'다.

유럽 대륙 내에서 사용되는 언어가 수십개에 이르다 보니 각각의 언어권에 속한 사람들 간에 갈등이 생기기 때문이다.

유럽 언어권 갈등의 가장 대표적인 예는 바로 EU본부가 위치해 있는 벨기에다.

최근 벨기에는 네덜란드어를 쓰는 북부지역과 프랑스어를 사용하는 남부지역 간 해묵은 대립이 또다시 폭발하며 국가 분열 위기로까지 치닫고 있다.

이에 따라 벨기에 정부는 스위스식 연방제 개헌을 추진할 것으로 예상된다고 월스트리트저널이 지난 20일 보도했다.

두 언어권의 갈등이 다시 불거진 계기는 지난 14일 이브 레테름 총리의 갑작스러운 사임 의사 표명이었다.

지난 3월 취임한 레테름 총리는 전체 인구 1050만명 중 60%를 차지하는 네덜란드어권의 북부 플랑드르 지역과 소수파인 프랑스어권의 남부 왈로니아 지역 간 갈등 해소를 최우선 목표로 내세우며 개헌을 추진했지만 결국 실패했다.

벨기에 국왕 알베르 2세는 총리의 사표를 반려하고 네덜란드어권과 프랑스어권,독일어권 출신 3명으로 구성된 태스크포스팀을 구성해 지역 반목을 해결하기 위한 방안을 마련토록 지시했다.

월스트리트저널은 벨기에가 현재의 언어권별 연방제보다 지역 자치정부의 권리를 더욱 확대,각각의 주 정부가 하나의 도시국가 역할을 수행하는 수준인 스위스 연방제를 모델로 한 개헌 논의를 진행할 것이라고 전했다.

벨기에는 언어와 문화 차이를 수용하기 위해 1970년 이후 네 차례에 걸친 개헌을 통해 지방자치를 확대하는 개혁을 단행했다.

벨기에는 1830년 건국 이래 △북부 네덜란드어권 △남부 프랑스어권 △네덜란드어와 프랑스어가 함께 쓰이는 수도 브뤼셀 △동부 독일어권 등 4개 언어권으로 구성돼 있다.

벨기에의 언어권 분리 역사는 3세기께로 거슬러 올라간다.

원래 벨기에 지역에는 프랑스어 계통의 왈론어를 쓰는 켈트족이 살고 있었다.

그런데 네덜란드어 계통의 플라망어를 쓰는 프랑크족이 침범해오면서 켈트족은 남쪽으로 밀려났고 이때부터 북쪽은 네덜란드어권,남쪽은 프랑스어권으로 굳어졌다.

남북 간 경제 격차도 심각해 지역 반목을 부채질하고 있다.

14세기 후반 르네상스 시기부터 북부 플랑드르 지방엔 유럽 각국의 귀족 등 부르주아 계층이 자리잡으며 상공업이 발전했다.

반면 남부 왈로니아는 농업과 광산업에 의지하며 남북 간 경제 규모 차이가 점차 커지게 됐다.

프랑스의 경우에도 지역언어 인정 여부 문제로 골머리를 앓고 있다.

프랑스 내에는 브르타뉴어 알사스어 오크어 코르시카어 등 총 75개의 지역 언어가 사용되고 있다.

프랑스는 5공화국 헌법이 '프랑스어만이 국가의 유일한 공식 언어'라고 명시한 이후 줄곧 경직된 표준어 정책을 펼쳐왔다.

하지만 대표적인 지역 언어인 오크어와 알사스어의 경우 최근까지도 각각 60만명,50만명이 넘는 프랑스인이 사용하는 것으로 파악될 정도로 지역 언어는 여전히 프랑스 언어의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소수 언어 사용자들은 이익집단을 형성해 지역 언어로 교육하는 학교를 세워줄 것을 요구하는 등 지위 향상을 위해 노력해 왔다.

이처럼 유럽 내 언어권 대립은 단순한 의사소통의 어려움 차원을 벗어나 정치, 경제적 갈등으로까지 비화되고 있다.

이 때문에 EU에선 언어 문제가 매우 민감한 사안으로 받아들여진다.

몇몇 언어권만 중시될 경우 자칫 회원국 간에 큰 다툼이 벌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지난 4월 유럽연합(EU) 집행위 통계에 따르면 2006년 통·번역 비용으로 11억유로(약 1조7000억원)의 예산이 들어갔다.

통·번역 비용이 천문학적인 것은 각국 모국어를 모두 공식어로 인정하는 EU 정책 때문이다.

현재 회원국이 27개인 EU의 공식 언어는 23개.

지난해 1월 새로 가입한 불가리아와 루마니아의 고유어와 기존 가입국인 아일랜드의 게일어가 추가되면서 공식 언어가 3개 더 늘어났기 때문이다.

이들 언어가 사용하는 알파벳도 라틴·그리스·키릴 등 3개나 된다.

칼 뢴토르 EU 번역담당 사무국장은 "EU 시민 가운데 2억∼3억명은 모국어를 하나밖에 모른다.

모든 사람이 모국어로 정보를 얻을 권리가 있다"고 주장했다.

이에 따라 EU에서 새로 제정되는 법규는 23개 공식 언어로 번역을 마친 뒤에만 발효된다.

대사급 회의에서는 영어 프랑스어 독일어 등 3~4개 언어에 한해서만 동시통역 서비스가 제공되지만 EU 정상회의와 각료급 회의 등 주요 회의에서는 23개 언어 모두로 동시통역이 이뤄진다.

이런 회의장에는 23개 언어마다 3명씩 무려 69명의 동시통역사들이 등장한다.

집행위 통·번역 총국은 하루 평균 50~60회에 달하는 회의에 700~800명의 통·번역가를 투입하고 있다.

통·번역 인력은 프리랜서를 포함해 3000명이 넘는다.

그러나 EU 공식 언어가 계속 늘어나자 "이러다간 새로운 바벨탑을 쌓게 되는 게 아니냐"는 비판도 나온다.

이에 대해 레오나르드 오르반 EU 언어담당 집행위원은 "다언어 사용은 EU의 민주주의를 유지하기 위한 필수불가결한 비용"이라고 반박했다.

EU의 이 같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언어 문제에 대한 회원국들의 불만은 여전하다.

최근 실비오 베를루스코니(Berlusconi) 이탈리아 총리는 "'단테의 언어'를 사수하라"며 "'앞으로 이탈리아어를 쓰지 못하는 EU 회의는 보이콧하라"고 내각에 지시했다.

단테(Dante·1265~1321)는 '신곡(神曲)'과 '신생(新生)' 등 세계적으로 유명한 문학작품을 남겨 현대 이탈리아어 형성에 매우 큰 공헌을 한 시인으로 이탈리아 문학계의 국민 영웅으로 칭송된다.

베를루스코니 총리는 장관들에게 보낸 서한에서 "실무언어라는 모호한 개념으로 언어들 간의 서열화를 조장하는 EU의 음모에 대항해야 하며 필요하면 유럽사법재판소에 소송도 제기하라"고 주문했다.

베를루스코니 총리가 이 같은 지시를 내린 것은 EU 회의가 점점 사용 빈도가 높은 영어 프랑스어 독일어 등 3개 언어(실무언어라고 불림)로만 진행되는 일이 잦아졌기 때문이다.

EU 회원국인 이탈리아의 장관들은 수시로 EU의 핵심 의사결정기구인 EU본부가 있는 벨기에 또는 의장국(현재 프랑스)에 가 다른 회원국 장관들과 회의를 연다.

베를루스코니 총리의 지시는 이런 회의 때 이탈리아어로 번역된 문서와 통역이 제공되지 않으면 회의장을 박차고 나오든지 표결에 불참하라는 것이다.

우파 민족주의자로 유명한 그는 총리 취임 전부터 자국어가 소외받는 것에 불만을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이미아 한국경제신문 기자 mia@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