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항 1] 지문 <가>는 아인슈타인의 발언이다.

그의 생각이 지문 <나>에서 제시된 신에 대한 세 입장 중 어느 것에 해당되는지 규정하시오.

그리고 그렇게 규정할 수 있는 이유를 <가>와 <나>를 비교 분석하여 설명하시오.(400~500자,25점)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것의 배후에는,우리가 그것의 아름다움과 숭고함을 일순간에 파악할 수는 없지만,성찰을 통해 간접적이고 희미하게 인식하는 어떤 것이 있다.

그것은 종교적인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나는 종교적이다. (…중략…)

나는 자연에 목적이나 목표,혹은 의인화(擬人化)라고 생각될 수 있는 것을 갖다 붙인 적이 결코 없다.

내가 자연에서 보는 것은 우리가 매우 불완전하게만 이해할 수 있는 장엄한 구조이다.

이 구조는 그것에 대해 생각하는 인간을 겸손한 느낌으로 충만하게 한다.

그 느낌은 신비주의와 아무런 관련이 없지만 진정으로 종교적인 것이다. "

유신론자는 초자연적이며 초월적인 존재로서 인격신을 믿는다.

그 존재는 모든 것의 시초에 우주 창조라는 큰 일을 했다.

그런 후에도 유신론자가 믿는 신은 여전히 자신이 창조한 것 주위에서 그들의 운명을 굽어보면서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

유신론적 신앙 체계 내에서 신은 인간사와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다.

유신론의 신은 기도하는 사람에게 응답하고 죄 지은 자를 용서하거나 처벌하며,기적을 행함으로써 세계에 개입하고,선행과 악행에 세심하게 관심을 가져서 우리가 언제 선행과 악행을 행하는지,그리고 더 나아가 언제 그런 행위를 할 생각을 하는지조차 안다.

이신론자는 신이 초자연적 지성이라고 믿는다는 점에서 유신론자와 같다.

하지만 이신론의 신은 모든 것의 시초에 우주를 지배하는 법칙을 세우고 난 후에는 더 이상 우주에,특히 인간사에 개입하지 않는다.

즉,이신론자는 신이 기도하는 사람에게 응답하지 않고 죄나 고백에 관심이 없으며,변덕스러운 기적으로 우리 삶에 개입하지 않는다고 본다.

이런 의미에서 이신론의 신은 흔히 시계 제작자에 비유된다.

일반적으로 시계와 같이 정교하고 특별한 기능을 갖는 물건은 누군가의 설계에 의해 만들어졌다고 생각하는 것이 적절할 것이다.

하지만 일단 시계가 다 만들어져서 움직이기 시작하면 시계의 작동은 더 이상 시계 제작자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범신론자는 초자연적이거나 초월적인 존재 자체를 아예 믿지 않는다.

다만 범신론은 우주의 움직임이 질서정연한 법칙에 따른다는 사실을 강조하며,우리 인간이 자신의 제한된 지적 능력을 통해 이 법칙에 조금이나마 다가갈 수 있다는 점을 경이롭게 여긴다.

범신론자도 종종 신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만,이는 자연 현상이 법칙에 지배된다는 사실을 비유적이거나 시적으로 표현한 것에 불과하다.

이런 맥락에서 신이라는 단어는 '세계의 근본원리'나 '삼라만상을 관통하는 본질' 등으로 바꾸어도 뜻에 큰 차이가 없다.

[문항 2] 다음의 두 조건을 충족시켜 지문의 문맥에 맞게 이어지도록 두 단락의 글을 작성하시오.(400~500자,25점)

1. 이어지는 첫 단락은 "또 한편 아슬아슬한 질주와 추월의 추격 장면을 보여주는 영화는 관객의 감수성을 수동적으로 만든다"라는 주제문으로 시작하여 구체적으로 쓸 것.

2. 마지막 단락은 "속도는 사람들의 정서적 불균형을 일으키고 배타적인 사회문화를 형성할 수 있다"라는 주제문으로 시작하여 쓰되,전체 글의 주장을 요약하고 강조하는 결론으로 완성할 것.

속도는 매혹적이면서도 기만적이며,기분을 고양시키는 아드레날린을 샘솟게 하면서도 잔인하며,환상적이면서도 파괴적이다.

이와 같은 양면성을 극단적으로 몰고 갈 수 있는 가속도는 매혹적이어서 그 환상에 사람들이 도취되면 결국 다른 사람들을 잔인하게 파괴할 뿐만 아니라 자신까지도 파괴된다는 것을 기만하려 든다.

떨어지는 물체의 가속도는 또 다른 속도를 인정할 수 없다.

양단의 면도날 같은 속도에 빠져든 사람은 자신의 기분만을 위해 공격적이고 배타적인 감정을 순식간에 분출시키고도 책임감을 느끼지 않는다.

친밀한 인간관계에서부터 공적인 관계에 이르기까지 기계적인 가속도가 붙을수록,우리는 수단과 목적 및 과정과 결과에 대한 분별력을 잃어버린다.

오토바이 위에 바싹 엎드려 있는 사람은 오직 달리고 있는 순간에 매달려 시간의 연속에서 빠져나와 환각의 상태에 빠진다.

우리의 일상은 시계들의 맹공격에 포위되어 있다.

사람들은 알람소리에 허겁지겁 잠에서 깨어나 "지금 늦지 않았나" 하며 다급하게 하루를 서두른다.

갈수록 더 쪼개진 스케줄은 사람들을 과거와 미래로부터 단절된 시간의 조각에 매달리게 한다.

디지털 초를 계속 깜박거리는 시계는 채찍질 같은 마감시간으로 사람들을 지치게 하여 그들의 자유와 자율성을 박탈한다.

고속열차를 타고 여행하는 사람은 스스로는 전혀 움직일 필요가 없다.

기계적 수단에 따라서 시간을 단축하면 할수록,주체는 수동적이 되고,일종의 감각적인 시차를 극복할 수 없게 된다.

이와 같이 주위가 빨리 돌아가는 상황이 가속도를 더해서 우리의 일상생활에 지대한 영향을 준다.

패스트푸드는 비만한 육체를 병들게 하고,수박 겉핥기식 속성 지식요약은 지성을 말라비틀어지게 한다.

속도가 빨라질수록 사람들의 도덕적 의식은 멈추게 된다.

사람들은 움직이는 기계의 속도보다 빠르게 공격성을 폭발시킬 수 있다.

이를테면 스피드광이 도로에서 분노를 표출할 가능성이 높다.

최악의 사례가 유럽에서 일어났다.

카레이서였던 존 훔블은 그의 말에 따르면 차를 몰다가 앞차가 너무나 천천히 가서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브레이크 페달 대신에 가속기를 밟아 그 차와 충돌했다.

'속도를 줄이시오'라는 표지판 아래에서 일어난 이 사고로 존 훔블은 불구가 되었고,충돌한 차에 탔던 사람들은 죽었다. 속도에 도취되어 아슬아슬하게 고조된 정신적,육체적 긴장은 사람들의 감각을 극도로 방어적이게 할 뿐만 아니라 동시에 공격성을 누적시키는 것이다.

속도의 논리는 결국 경주와 투기의 논리이고 경쟁 혹은 전쟁의 배타적인 극단의 방어기제와 폭력적인 파국의 공격성을 낳는다.

[문항 3] 지문 <가>와 <나>는 의사결정과정에서 나타날 수 있는 문제상황을 보여주고 있다.

이 상황의 공통점과 차이점에 대해 설명하고,지문 <다>를 바탕으로 지문 <나>의 상황에서 의사,시민,시장이 바람직한 합의를 위하여 마땅히 취했어야 할 태도와 행동에 대해 구체적으로 논술하시오.(900~1000자,50점)

대중 음악경연대회를 보면 심사위원과 청중 사이에 견해 차이가 두드러지는 경우가 종종 있다.

심사위원은 그 분야에 전문적인 식견과 안목,평가 능력을 갖춘 사람이다.

대다수의 심사위원은 이런 기준을 모든 참가자에게 두루 공평하게 적용하는 공정성과 어떤 회유나 압력에도 흔들리지 않고 자신의 소신을 지킬 수 있는 신념을 지니고 있다.

이런 심사위원이 수행하는 심사는 정당성을 가지며 청중 또한 심사의 결과에 대체로 수긍한다.

하지만,심사위원이 공정하게 심사를 했다 하더라도 청중의 견해와 상충될 수 있다.

이때 심사위원이 소통을 통하여 청중을 설득하여 갈등을 해소하는 경우는 드물다.

심사위원만이 아는 전문적 용어로 간단하게 평을 하는 경우도 있지만,이마저 생략하고 심사결과를 공표하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다반사다.

이때 청중은 심사위원이 공정성이나 객관성을 결여하였거나 청중의 반응이나 식견,안목,취향 등을 무시한 것으로 간주한다.

심사위원은 자신이 청중에 비하여 음악에 대한 식견과 안목,평가능력에서 월등하기에 굳이 청중에게 설명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되면 청중은 자신의 예술적 감수성을 향상시킬 수 있는 기회를 놓치게 되고,심사위원 역시 청중으로부터 전문가로서의 권위를 인정받지 못하게 된다.

(시의회 의사당,시민들이 방청석에 넘쳐나고,청문회가 진행 중이다. )

시민 A ; 선생님께선,온천 개발을 믿고 꿈을 키우며 살아온 우리 시민들을 그런 식으로 비난하시깁니까?

의사 ; 시민이라는 마법의 단어로 날 취하게 하지 마시오. 인간의 겉모습을 지녔다고 해서 저절로 시민이 되지는 않더란 말입니다.

시민의 명예는 반드시 성취해서 얻어야 하는 것입니다! 사람의 모습을 갖추고,서로의 체면을 세워준다고 해서,또 주변 사람에게 동조한다고 해서 저절로 인간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난 이제 우리의 꿈이었던 온천에 대한 결론을 내리겠습니다.

시장 ; 당신은 그럴 권리가 없소! 온천의 영업 여부는 시민들의 이익을 위해서 내가 결론을 내릴 것이오.

의사 ; 먼저 온천을 폐쇄해야만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단 말입니다. 난 한때 다수의 시민이 내 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내가 다수와 함께 한다는 느낌은 참으로 달콤한 것이었습니다. 이 마을을 사랑했기에 시기와 질투를 받았을지라도 보수 없이 수개월 동안 온천 개발을 이끌었던 것입니다.

시장님이 원하는 것처럼 우리 마을이 번성하고,아픈 사람을 고쳐줄 수 있고,다른 나라에서 온 사람들을 만나고,뭔가 새로운 것을 배워 폭넓고 새로운 문명을 맛보고 싶어서였습니다.

다시 말해,더욱 인간다워지기 위해서였습니다.

시민들 ; 혁명가는 물러가라!

의사 ; 난 혁명가가 아닙니다! 아니,정정하겠습니다.

그래요. 난 혁명가입니다! 다수가 옳다고 믿는 허위의식에 반대하는 혁명가입니다!

시민 B ; 이젠 귀족 행세를 하는구먼. 오염이라는 말만 나와도 온천은 끝장이야!

의사 ; 잘 들어두시오. 다수는 옳지 않았습니다. 단언합니다.

시장 ; 이젠 궤변까지……,당신 정신 나갔구먼!

의사 ;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돈다는 말을 듣지 않고,갈릴레오를 짐승처럼 무릎 꿇게 만들었던 다수가 과연 옳았습니까?

다수가 옳다고 인정받으려면 최소한 오십 년은 걸려야 합니다. 옳다는 증명을 받기 전까지,다수는 결코 옳지 않습니다.

시장 ; 다수가 원하면 소수는 다수의 의견을 따라야 합니다.

의사 ; 한 마디 더 하겠습니다. 자,일개 소대의 병력이 적진에서 행군을 하고 있다고 합시다.

소대 병력은 안전한 길을 가고 있다고 믿으며 걷고 있습니다. 저앞에,전방에,척후병이 한 명 나가 있습니다.

뒤를 돌아보니 소대 병력 전체가 적이 파 놓은 함정의 길목으로 들어서는 게 보입니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 척후병은 필사적으로 소대로 뛰어가서 알려야하지 않겠습니까? 그가 발견한 위험을 아직은 모르고 있는 소대원들에게 경고하고,만약 그들이 자기의 말을 믿지 못한다면 소대원들과 싸움도 불사해야죠.

그렇지 않습니까? 그것이 척후병의 의무이자 권리가 아닙니까? 진리는 항상 같습니다.

시장 ; 사회자! 저 의사의 입을 막으시오!

의사 ; 모두 알아 두셔야 합니다. 온천물은 오염되었습니다.

시민 A와 B ; 오염이란 말 한 마디만 더하면 가만 안둔다!

(시민들이 고함을 지른다. 일부는 단상으로 돌진한다. 나팔 소리가 들린다.)

우리는 이제 어떤 견해든 가질 수 있는 자유와 자신의 견해를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는 자유가 인류의 정신 복지를 위해 다음 세 가지 근거에서 필수적임을 알게 되었다.

다시 한 번 간단히 이 세 근거를 정리해 보자.

첫째,어떤 견해에도 침묵을 강요해서는 안 된다.

원칙적으로 어떤 견해도 참일 가능성이 있고,그 견해의 참 여부에 대한 우리의 판단은 항상 오류가능하다.

그렇기에 특정 견해를 억압하는 것은 참일 수 있는 견해를 억압하는 것일 수 있으므로 바람직하지 않다.

둘째,설사 어떤 견해가 완벽하게 참된 것이 아닐지라도,그것이 진실의 일부를 담고 있는 경우가 매우 많다.

게다가 특정 쟁점에 대해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는 견해가 전체적인 참(whole truth)을 보여주는 경우는 거의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서로 충돌하는 견해들을 함께 비판적으로 검토함으로써만 전체적인 진리에서 미처 파악되지 않은 부분을 알아낼 수 있다.

셋째,설사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는 견해가 전체적인 참을 남김없이 담고 있는 경우에도 그것의 대안적 견해 역시 고려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특정 견해가 진정으로 진리의 전체인지를 충분히 진지하게 따져보지 않은 상태로 받아들이는 사람은,그것의 합리적 근거를 이해하지 못한 채 형식적인 의사표명을 하는 셈이 되고 말기 때문이다.

참된 견해를 이처럼 수동적으로 받아들이게 되면,그 견해가 인간의 성품과 행동을 보다 바람직한 방향으로 개선하는 데 더 이상 효과적일 수 없게 된다.

그리고 오히려 우리 내부에서 이성이나 개인적 경험에서 우러나오는,진리에 대한 진정하고 절실한 확신이 자라나는 것을 방해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