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의 권리와 자유는 사회나 다수의 이익보다 앞선다

⊙ 종모종부법(從母從父法)의 시행은 효율성의 극대화인가? 불평등의 심화인가?

[최양진 선생님의 철학으로 만나는 역사] 15. 노비제도를 통해 생각해 보는 진정한 정의는?<끝>
고려시대부터 노비가 속한 천인의 결혼은 천인끼리만 인정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아 일반 백성과 천인과의 결혼은 허락되지 않았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일반 백성과 천인의 결혼이 나타나게 되면서 자녀의 신분은 부모 중 한쪽만 천인이면 그 신분을 따르도록 정하였다.

이렇게 노비신분 해방의 길이 합법적으로 혹은 불법적으로 넓어져감에 따라 그 신분 세습법에도 하나의 변화가 나타났다.

노비종모법과 노비종부법이 그것이다.

노비종모법(奴婢從母法)이나 종부법(從父法)이란 노비 출신의 자녀가 어머니나 아버지 중 하나의 신분을 따르도록 하는 법을 말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종모종부법(從母從父法)이 적용되어 부모 중 어느 한쪽만 노비라도 그 자녀는 모두 노비가 되었다.

지배계급이 그들의 노비 소유량을 증가시키기 위해 강행한 종모종부법은 고려시대를 거쳐 조선왕조 시대에도 그대로 적용되었다.

하지만 종모종부법은 전체 인구 중 노비의 비율을 증가시키는 반면 양인의 수를 감소시켜 군역(軍役) 부담 인구를 줄이는 부작용을 가져왔다.

그 결과 나라에 대한 의무 부담이 없는 천인의 수는 날로 늘어났는데 의무를 부담해야 하는 계층인 일반 백성의 수는 점차 줄어드는 현상이 나타나게 되었다.

양 계층의 결혼의 예로는 일반 백성남자로서 천인의 남편이 되는 경우와 일반 백성여자로서 천인의 아내가 되는 두 가지 경우가 있었다.

뒤의 예는 매우 드문데 비해 앞의 예는 무척 많았다.

조정에서는 이 점에 착안해 그 자녀에게 노비종부법(奴婢從父法),즉 자녀의 신분이 아버지를 따르도록 하는 법을 적용시켜 이들이 일반 백성이 되도록 하였다.

나라의 입장에서는 세금과 각종 부역 등에 동원할 수 있는 계층인 일반 백성이 많으면 그만큼 나라살림을 운영하기가 쉽기 때문에 노비종부법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양반들은 자신들이 거느릴 수 있는 노비의 수가 줄어들자 노비종부법에 반대하였고 노비종모법을 통해 노비의 양을 그대로 유지하고자 하였다.

결국 조정과 양반들 사이의 힘겨루기에서 양반들이 주도권을 잡게 되어,1432년(세종 14년) 노비신분법은 종모법으로 확정되었다.

⊙ 노비제도는 누구의 최대 행복을 위한 것인가?

정의는 옳고 그름의 문제이다.

그렇다면 노비 세습법과 관련하여 무엇이 옳고 그른가?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도덕의 기초로 삼는 공리주의에 따르면 모든 행위는 행복의 증진에 기여하는 만큼 옳고,그 반대에 기여하는 만큼 그르다.

여기에서 행복은 고통이 없는 쾌락의 상태를 의미하고 불행은 쾌락이 없는 고통의 상태를 의미한다.

결국 옳음과 그름,정의로움과 정의롭지 않음을 구별하는 기준은 사람들이 실제로 소망하는 것,즉 행복뿐이다.

그런데 공리주의는 행위자 자신만의 행복이 아니라 관계된 모든 사람의 행복을 요구한다.

공리주의의 기준도 행위자 자신의 최대 행복이 아니라 전체의 최대 행복이다.

공리주의 도덕은 인간이 다른 사람의 선을 위해 기꺼이 자신의 최대 선까지도 희생할 수 있고 그 희생이야 말로 인간이 이룰 수 있는 최고의 덕이라고 생각한다.

다만 희생 그 자체가 선이라고 주장하지는 않는다.

행복의 증대에 기여할 수 없는 희생은 아무런 쓸모가 없기 때문이다.

공리주의가 인정하는 자기 포기는 단 하나뿐이다.

그것은 전체 행복의 총량을 증대시키기 위해 자기 자신의 행복을 포기하는 것이다.

따라서 공리주의는 사람들에게 가능한 한 덕을 사랑하는 마음을 길러서 사회 전체의 행복을 증진하라고 요구한다.

개인의 욕구는 사회 전체의 행복을 침해하지 않는 한에서 용인된다.

그러나 개인의 행복과 다른 사람들의 행복이 충돌할 경우 공리주의는 개인에게 마치 불편부당한 제3자처럼 됨으로써 자신의 행복보다 전체의 행복을 먼저 생각하라고 한다.

이와 같은 요구는 다소 가혹해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는 "누구나 한 사람으로 간주되어야 하고,누구도 한 사람 이상으로 간주되어서는 안 된다"는 공리주의의 금언과 개개인이 아니라 전체 행복의 총량만이 도덕의 기준이라는 전제를 수용한다면 피할 수 없는 결론이다.

이러한 공리주의에 따르면 노비제도는 사회전체의 경제적 총량을 상승시키는 데 기여한다는 사실 때문에 노비세습법이 정의인 것처럼 이해될 수도 있다.

그러나 공리주의에서 말하는 최대 다수는 양반이나 지배층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지배층과 피지배층,즉 모든 인간을 포괄하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노비의 숫자가 양반이나 지배 계층보다 많았던 조선시대에 최대 다수가 원하는 것은 노비제도의 폐지가 아니었을까?

따라서 노비제도가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에 기여한다는 공리주의적 해석은 조선사회에는 해당하지 않는다.

공리주의 입장에서 볼 때 지배층이나 피지배층은 똑같은 1의 가치를 지닌 개인에 해당되기 때문이다.

이런 측면에서 적어도 조선사회에서의 노비제도는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 아니라 지배계층의 최대 행복을 충족 시켜주는 수단에 불과했을 것이다.

즉,사회전체의 이익과 행복을 위하여 효율성을 강조하는 공리주의에서 조차도 모든 인간을 동일하게 1의 가치로 계산한다는 의미는 모든 인간을 정치적으로 평등하고 자유로운 개인들로 평가하고 있는 것이다.

⊙ 인간의 정치적 권리는 경제적 가치와 교환될 수 없다

이러한 사실은 롤즈에게서 더욱 분명히 나타난다.

롤즈는 정의의 실현을 위해 두 원칙을 제시한다.

정의의 두 원칙으로 첫째, 각자는 타인의 동등한 자유와 양립 가능한 최대 광범위한 기본적 자유에 대한 평등한 권리를 갖는다(자유 우선성의 원칙)이고,두 번째는 사회경제적 불평등은 다음 두 조건을 만족시키게끔 배정되어야 한다.

즉, 최소 수혜자를 중심으로 모든 성원의 이익을 극대화하고(차등의 원칙),공정한 기회균등 아래 직책과 직위는 모든 이에게 개방되어야 한다(공정한 기회균등의 원칙)는 것이다.

그런데 롤즈가 생각할 때 합리적인 인간은 가능한 자신의 이익을 증가시키고자 하며,자신이 바라는 것을 이룰 수 있는 기회를 극대화시키고자 한다.

그러나 물질적 부의 증가는 일정한 수준을 넘어서는 사람들의 욕구를 충족시켜 줄 기회를 그다지 증가시키지 않는 반면,자유의 증가는 그러한 기회를 증대시켜 줄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개인들이 자유 우선성의 원칙을 선택하는 것은 합리적인 결정이다.

그러므로 정의의 두 원칙 중 제1원칙이 제2원칙에 우선한다.

제1원칙의 기본적 자유는 정치적 자유(선거권과 피선거권),언론과 집회의 자유,양심과 사상의 자유,(사유)재산과 더불어 신체의 자유,그리고 법의 지배라는 개념에 의해 규정 되는 바 부당한 체포 및 구금을 당하지 않을 자유 등이다.

이러한 모든 자유는 인간의 기본권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으로 정의로운 사회의 모든 사람에게 동등하게 분배되어야 한다.

이와 같이 정의의 제1원칙인 자유 우선성의 원칙은 다른 정의의 모든 원칙에 대해 절대적 우선성을 가지게 된다.

따라서 그는 "모든 사람은 전체 사회의 복지라는 명목으로도 유린될 수 없는 정의에 입각한 자유의 불가침성을 갖는다"고 하며 자유 우선성의 원칙은 공리주의와 같이 타인들이 갖게 될 보다 큰 선을 위하여 소수의 희생을 요구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고 보았다.

결국 사회 전체의 경제적 복지 증진과 다수자의 자유 확대를 위해서도 개인이나 소수자의 기본적 자유가 희생될 수 없다는 것이 롤즈가 강조하는 제1원칙의 핵심이다.

⊙ 진정한 정의는 무엇인가

조선 조정과 양반들은 노비경영의 이익을 최대화하기 위하여 노비세습법을 만들고 그것을 불변의 원칙으로 전제한 뒤,노비 신분의 판정과 소유관계를 결정하는 종모법(從母法)과 종부법(從父法)을 시행하였다.

국가로는 양인을 늘리기 위하여 종부법을,개인 소유주로서는 사유재산의 증대를 위해 종모법을 주장하였다.

따라서 양자의 이해관계와 역학관계에 따라 이 두 가지 법이 빈번히 교체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이해와 역학 관계의 진실은 노비들에게 인간으로서 지니는 기본권 보장이 목적이 아니라 지배층이 자신들의 이익을 증가시키려는 데 그 목적이 있었다.

사실 어느 사회에나 보이지 않는 계급은 여러 가지 요소를 원인으로 하여 존재한다.

다만 계급 이동 가능성이 얼마나 열려 있느냐 하는 것이 그 사회의 발전과 성숙 정도를 결정지을 뿐이다.

우리 전통사회에 있어서 개인의 사회적 지위 또는 계급을 통해 보여지는 사회적 불평등의 문제는 노비들의 신분에 대해 법적 제도로 규정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법적 제도는 신분에 따라서 개인의 정치적 출세는 물론 사회적 지위와 세세한 일상생활 양식까지 억압하였다.

이런 점에서 지배계층의 이해관계와 경제적 효율성을 위한 노비세습법은 각 개인들이 가지고 있는 기본적 자유를 경제적 가치로 교환 가능하게 한 봉건적 제도이다.

따라서 자유 우선성을 강조하는 롤즈의 주장에 정면으로 반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진정한 의미에서 정의와 정의로운 사회란 무엇인가?

정의로운 사회에서는 개인의 권리와 자유는 사회나 다수의 어떠한 이익에 앞서 우선적으로 존중되어야 한다.

이러한 정의관은 소수의 권리에 대한 침해를 담보하여 효율성 증가를 우선적 가치로 생각하는 기존의 자유주의자들의 정의론에 대한 반성이자 새로운 정의관의 모색에 대한 시도로 이해할 수 있다.

우리나라도 한때 정의사회구현을 기치로 내걸고 사회전체의 질서와 이익이란 미명 아래 수없이 많은 개인들의 기본적 권리를 탄압하던 시절이 있었다.

그렇다면 그 시대를 정의로운 사회였다고 평가하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

따라서 진정한 의미에서 정의는 사회나 전체의 이익에 앞서 각 개인들의 기본적 자유권에 대한 보장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서울 한성고 교사 cyjin74@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