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속 제시문 100선] (96) <손자병법>上 "최고의 병법은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것"

오나라 왕 합려와 손자가 만났다.

합려는 손자가 보낸 병법 13편을 이미 읽어본 상태였다.

군사전략가로서의 손자를 실제 상황에서 시험해보고 싶다는 생각에 합려는 궁녀도 지휘할 수 있겠느냐고 묻는다.

손자는 이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이고 합려가 불러 모은 궁녀 180명에게 군율을 설명한다.

왕의 전권 위임을 상징하는 도끼를 설치하고 궁녀들은 두 부대로 편성돼 합려가 총애하는 후궁 둘이 각 부대의 대장을 맡았다.

그리고 큰 북이 울리면서 손자의 명령이 떨어진다.

하지만 궁녀 무리는 어색한 상황에서 마냥 웃기만 할 뿐이었다.

합려의 표정이 어땠는지는 모른다.

누각 위에서 구경하는 그의 얼굴에 장난기가 어렸을지도 모르겠다.

손자의 표정은 아마 무덤덤했을 것이다.

손자는 담담한 어조로 군율이 분명함에도 불구하고 명령이 철저하게 이행되지 않는 것은 장수의 죄이니 그 죄를 물어 양 부대 대장의 목을 베어야 한다고 말한다.

대경실색한 합려는 그 후궁 둘이 죽으면 자신이 밥을 먹어도 맛을 전혀 모르게 된다며 말린다.

하지만 손자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 합려가 아끼는 후궁 둘의 목을 그 자리에서 베어버린다.

참수된 두 후궁의 머리가 내걸린 가운데 남은 궁녀들은 이제 명령이 울려 퍼질 때마다 북소리에 맞추어 자로 잰 듯이 완벽하게 움직였다.

손자는 궁녀들이 합려를 위해 불구덩이나 물 속에라도 뛰어들 수 있게 훈련되었다고 보고한다.

망연자실하게 사열 광경을 지켜보던 합려는 더 이상 듣고 싶지 않다고 손사래를 쳤다.

손자의 얼굴이 이 때도 무표정했을지는 짐작하기 어렵다.

기록에 남아 있기로는 손자가 합려는 그저 병서의 말장난만 즐길 뿐이지 실제 병법은 모른다고 비난했다고 한다.

이윽고 합려는 마음을 가다듬고 손자를 장수로 임용한다.

어떤 확고한 믿음이 있었기에 손자는 오나라의 궁궐에서 그토록 과감히 행동할 수 있었던 것일까?

2500년 전의 그는 변화하는 시대의 기류를 민감하게 느끼고 그 변화의 풍향에 자신의 촉각을 드리웠다.

손자는 새로운 세상을 예견하면서 군사학과 철학 사상의 싹을 틔웠고，그 생각의 요체는 <손자병법>에 전해진다.

합려를 만나기 전 이미 병법 13편을 완성한 마당이니 스스로에 대한 자신감이 왕보다 더한 위엄을 손자에게 부여했을 것이다.

사실 <손자병법>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다.

두 명의 손자가 있기 때문이다.

후궁을 참수해 합려를 놀라게 한 손자는 그 이름이 손무이다.

손무는 제나라 출신이지만 내란으로 떠돌다가 오자서가 그를 오나라에 천거해 오나라의 장군이 된다.

그래서 손무의 저작을 '오 손자병법'이라고도 부른다.

또 한 명의 손자는 손무의 후손인 손빈이다.

손빈은 제나라 장군 전기의 도움을 받아 제나라에서 막료로 활약했다.

이후 손빈의 저작은 '제 손자병법'이라는 별칭을 얻었다.

영어권에서는 손무의 저작은 로 번역하고，손빈의 저작은 로 번역한다.

손무의 병법을 한 차원 더 높은 통합적 사상으로 평가하는 것이다.

그런데 손무의 생몰연대가 불분명하고 저서의 편제가 따로 입증된 바가 없었기 때문에，1972년 전한시대의 무덤에서 손무와 손빈의 저작을 명료하게 구별해주는 은작산 죽간본이 발굴되기 이전까지는 세간에 널리 알려진 <손자병법>이 손무의 병법인지, 손빈의 병법인지 항상 논란이 있어 왔다.

그러나 순자, 한비자 등 춘추전국시대 사상가들이 <손자병법>의 탁월함을 칭찬하고，'삼국지연의' 덕분에 난세의 간웅이라는 별명이 따라다니는 위 무제 조조가 따로 <손자병법>을 정리해 고전으로서의 가치를 인정할 만큼，<손자병법>은 저자를 둘러싼 논란과는 상관없이 언제나 빛나는 명성을 자랑하는 책이다.

현재까지 전해지는 손무의 <손자병법>은 전략계획(시계 始計)，군사작전(군작 作戰)，전략수립(모공 謀攻)，군의 세력(군형 軍形)，기습전술(병세 兵勢)，기만작전(허실 虛實)，작전목표(군쟁 軍爭)，임기응변(구변 九變)，이동과 정찰(행군 行軍)，자연지리(지형 地形)，지형 활용(구지 九地)，초토화 작전(화공 火攻)，간첩 정보전(용간 用間)의 13편으로 이루어져 있다.

각 편제를 보면 손자가 춘추시대와 전국시대의 뚜렷한 경계선을 예감하고 스스로 그 획을 명확히 그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원문 읽기

전쟁은 나라의 큰 일로서 백성들의 생사와 국가의 존망이 그에 달려 있으니 분명하게 살피지 않을 수 없다.

그러므로 전쟁의 승패를 결정짓는 다섯 가지 핵심 요소를 분석하여 적과 나를 비교하여 과연 전쟁을 할 수 있는지 상황 점검을 해야 한다.

그 첫째는 정치(道)이며，둘째는 기후 조건(天)，셋째는 지형적 조건(地)，넷째는 장수(將)의 능력，다섯째는 군대의 법제(法)이다.

정치라고 하는 것은 백성들을 잘 이끌어 그들로 하여금 군주와 같은 의지를 가지게 하는 것이다.

그러면 백성은 희생을 무릅쓰고 군주와 한마음이 되어 함께 살고 함께 죽으며 국가 위기를 두려워하지 않게 된다.

기후 조건이라는 것은 흐리고 맑고，어둡고 밝고，춥고 더운 등의 날씨를 의미한다.

지형적 조건이란 멀고 가깝고，험난하고 평탄하고，넓고 좁은，생사가 갈리는 지형 조건을 말하는 것이다.

장수의 능력이란 장수의 지모，믿음，인자함，용기，위엄 등을 말한다.

법이란 군대의 편성，관리나 장교가 지켜야 할 군율，군수물자의 조달과 공급 관리 등의 제도를 가리킨다.

이 다섯 가지 점은 장수가 귀 기울이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니，이 다섯을 아는 자는 승리할 것이요，모르는 자는 승리하지 못한다.

따라서 이 다섯 가지 점에서 적과 나 사이의 우열을 비교하여 상황을 판단하는 것이다.

어느 편의 군주가 정치를 잘하고 있는가? 어느 편의 장수가 더 뛰어난가?

어느 편이 천시(天時)와 지리(地理)를 잘 활용하는가?

어느 편이 법제를 잘 운용하는가? 어느 편의 군대가 강한가?

어느 편의 군사가 잘 훈련되었는가? 어느 편이 포상과 처벌을 분명하게 시행하는가?

이러한 것들을 통해 어느 편이 이기고 질지를 판단할 수 있다.

▶ 해석

손자병법의 첫 편인 시계(始計)의 첫 구절이다.

시계(始計)는 손자병법 13편의 총론이자 군사전략의 가장 기초가 된다.

손자는 정확한 '정보'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철저한 정보 파악에 기반한 '계산'을 군사전략의 시초로 보았다.

손자는 '계산'을 병서의 가장 첫 부분에 둠으로써，전쟁이 그저 용맹함과 혈기로만 가능한 것이 아니라 모든 요소를 철저하고 치밀하게 계량하고 예측해야 하는 종합적인 국가 거사임을 밝힌다.

'계산'을 해서 따져본 결과 이길 수 있는 상황이 아니면 전쟁을 하지 말라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손자는 최고의 병법은 전쟁을 하지 않는 것이라고 설파했다.

그것이 어떠한 형식이든 전쟁은 막대한 비용과 희생이 따르기 때문이다.

손자는 전쟁의 기회비용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전쟁 신중론을 펼친다.

<손자병법>에서 전쟁은 불가피한 경우의 유기적 '일부'로서 다루어진다.

모든 문제를 무작정 전쟁을 통해서 해결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고，최선의 방법은 정치외교의 수단으로 목적을 달성하는 것이다.

정말로 부득이한 경우에 한해서만 실제로 군사력을 동원해야 하고，그것도 가능하다면 아군 군사력의 막강함을 적에게 보임으로써 실제의 전쟁 없이 위세만으로 제압하는 것이 권장된다.

"전쟁을 하는 원칙은 적국을 온전한 상태로 굴복시키는 것이 최고요，실전을 통해 적국을 격파하는 것은 그 다음이다"라는 손자의 말은 그가 단순한 효율적 전술가에 머무르지는 않음을 드러낸다.

⊙ 원문 읽기

병법은 속임수다.

공격할 수 있어도 못 하는 것처럼 보이게 하며，공격하려고 해도 공격하지 않을 것처럼 보이게 하며，멀리 있을 때는 가까이 있는 것처럼，가까이 있을 때는 멀리 있는 것처럼 보이게 해야 한다.

이익을 미끼로 상대를 꾀어내며，혼란에 빠지게 한 연후에 공격하고，상대의 역량이 충실하면 그것에 대비해야 하고，상대의 힘이 세면 잠시 피한다.

상대의 분노를 돋워 꺾이게 하고，자신을 낮추어 상대를 교만에 빠지게 한다.

상대가 휴식을 취하려 하면 피로하게 만들고，상대의 내부가 서로 신뢰한다면 이간을 시킨다.

상대가 방비하지 않는 곳을 공격하며，상대가 생각지 못한 곳에서 신속히 움직인다.

이것이 군사전략가가 승리를 얻는 비결이다.

▶ 해석

만약 '계산'의 결과 전쟁을 수행하기로 판단했다면，이제는 무조건 이겨야 한다.

손자는 전쟁을 어떻게든 이겨야 하는 것으로 정의함으로써 춘추시대와 전국시대의 명확한 구분선을 긋는다.

춘추시대에는 송왕지인(宋王之仁)이라는 고사성어가 생길 만큼 예법을 중시하는 전쟁 문화가 존재했다.

기원전 638년 송나라는 초나라의 대군과 맞서 싸우게 된다.

송나라의 군대는 이미 전장에 도착하여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진열을 가다듬었으나，초나라의 군대는 아직 강 한가운데를 건너고 있었다.

선제 공격을 하자는 건의가 있었지만 송나라의 제후 양공은 승전을 위해서 그런 비열한 전법을 쓸 수는 없다며 기습공격을 거절한다.

그래서 초나라 군대가 강을 다 건너고 전열을 갖추기를 기다려서 싸우다 송나라는 패배한다.

이처럼 고지식하게 싸울 수 있었던 것은 당시 군대가 귀족 신분의 전사로 구성되었고，전쟁 또한 전통적인 귀족 예법에 따라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당시 사(士) 이상의 계급만이 전투에 참여할 수 있었기 때문에 춘추시대의 전쟁은 어차피 권력층 사이의 세력 다툼이었다.

그래서 보통 평민에게는 전쟁이 불편한 것이기는 했지만 자신들에게 절실한 일은 아니었다.

전쟁은 단기간의 소규모 전투에 불과했고 때로는 인명의 손상을 피하기 위해 각 편의 대표가 나와서 실력을 겨루어 판세를 결정하기도 했다.

당시 중원의 기마병 전투 양식은 이러한 성향을 더욱 강화했다.

기병 위주의 싸움은 전사 개개인의 기량이 중요하게 부각된다.

그래서 춘추시대 중원의 전장은 탁월한 개인 전사가 명예를 지키며 싸우는 곳이었다.

그러나 남쪽의 오나라는 중원이 아니었고 오나라 사람들은 한족이 아닌 '오랑캐'였다.

원래 근본을 모르고 덤벼드는 무리들이 혁신을 잘 하는 법이다.

오나라는 춘추시대의 '결투' 대신 국가의 모든 역량을 최대한으로 결집시킨 본격적인 전쟁을 세상에 선보인다.

오나라에서는 신분제도가 확립되어 있지 않아서 전투원의 계급이 한정되는 제약이 없었고 일반 백성들이 모두 그대로 병사로 동원되었다.

덕분에 동원 병력 수가 엄청나게 늘어났고 군대는 보병 중심으로 편성되었다.

보병 중심의 군대는 기병 중심의 군대와는 달리 전사 개개인의 기량보다 전체의 규율과 조화가 중요해진다.

그래서 이 때부터 진법이 본격적으로 발달하게 되고 군대 집단 전체의 태세를 중시하는 태도가 등장한다.

춘추시대에서 전국시대로 넘어갈수록 전쟁의 양상은 치열한 국민총력전으로 변모하였다.

손자가 시대의 변화를 예견하여 주도한 오나라의 전쟁 양상은 다른 나라들에도 선도적인 영향을 미쳤다.

홍보람 s.논술 선임연구원 nikehbr@nonsu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