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용에 따라 탕평책 펼쳐 대통합의 정치 이끌어

⊙ 사도세자는 정쟁(政爭)의 희생양 이었다

28세로 숨을 거둔 정조(正祖) 임금의 아버지인 사도세자는 정치적 희생양이었다.

불과 열살 나이에 노론이 중심이 되어 일으킨 임인사화(壬寅士禍)를 비판할 정도로 총명했던 사도세자는 진보주의자였기 때문에 당시 집권세력인 노론과의 관계가 좋지 못하였다.

영조(英祖) 25년,사도세자는 대리청정을 시작하면서 남인,소론,소북 세력 등을 가까이 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불안해진 노론은 정치적으로 압박을 가하며 영조에게 사도세자에 대한 정치적 모략을 본격화하였다.

그 결과 영조 38년(1762),노론 세력의 사주를 받은 나경언이 세자의 비행 10조목을 상소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나경언의 고변이 발단이 되어 사도세자를 죽음에 이르게 한 임오화변(壬午禍變)이 발발하였다.

이러한 임오화변의 비극은 사도세자의 아들인 정조에게 평생 한이 되었다.

11세의 어린 나이에 아버지가 할아버지에 의해 뒤주에 갇혀 굶어죽는 엄청난 비극을 몸소 겪은 정조는 자신을 표현하여 '하늘을 꿰뚫고 땅에 사무치는 원한을 안고서 죽지 못해 살아 있는 사람'이라고 했다.

그는 아버지의 입장을 옹호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할아버지의 입장을 옹호할 수도 없는 위치에서 자신에게 부과된 비극을 견뎌내야 했다.

결국 52년간 왕위에 있던 영조가 1776년 3월5일 죽자 소렴과 대렴이 끝난 5일 후인 3월10일 조선 22대 왕 정조가 25세 나이로 왕위에 등극하였다.

왕위에 오르자마자 정조가 내린 첫 교지는 바로 자신이 사도세자의 아들이라는 것이었다.

이러한 사실을 통해 아버지인 사도세자의 죽음에 대한 정조의 원통함이 어느 정도였는지 추측할 수 있다.

⊙ 사사로운 원한을 버리고 탕평책 통해 실력있는 인재 등용

[최양진 선생님의 철학으로 만나는 역사] 11. 사사로운 원한 버리고 상생의 정치 실현한 '정조'
그러나 정조는 왕위에 등극하고도 자신의 아버지를 억울하게 죽음으로 몰아간 노론세력에 대한 정치적 탄압을 실행하지 않았다.

오히려 정조는 '오직 그 사람을 보아 어진 이를 등용하고 불초한 사람을 버릴 것'이라는 탕평책에 근거한 자신의 인사 원칙을 분명히 하였다.

따라서 정조에게 있어 '탕평(蕩平)'이란 '편당'을 제거하는 것이며,남과 나를 구분짓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즉 갈등이나 분쟁이 발생했을 때 어느 쪽도 편들지 않고 모든 신하를 한 가족과 같은 동포로 보아서 그 잘잘못을 가리고 중재하는 역할을 국왕이 적극 담당하겠다는 의미다.

이는 중용의 원칙에 입각한 정치관의 표현으로도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영조는 붕당을 없앨 것을 내세우며 왕이 내세우는 논리에 동의하는 탕평파를 중심으로 정국을 운영하였다.

그리고 '분당(分黨:당파를 나눔)'의 뿌리를 제거하기 위해 공론(公論)의 주재자로서 인식되던 '산림(山林:학식과 덕이 높으나 벼슬을 하지 아니하고 숨어 지내는 선비)'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았고 그들의 본거지인 서원을 대폭 정리하였다.

영조가 탕평정치를 실시하면서 왕은 정국의 운영이나 이념적 지도력을 비롯하여 거의 모든 부분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었고 분당의 정치적 의미는 차츰 엷어져 갔다.

그러므로 정치권력은 자연스럽게 왕과 탕평파 대신 쪽으로 집중되었다.

특히 노론 중에 온건파 인물 중심으로 탕평파가 형성되어 영조 대(代)의 탕평책을 '완론탕평(緩論蕩平)'으로 호칭하였다.

한때 탕평의 원리에 의하여 노론과 소론이 공존하였으나 소론 강경파가 '이인좌의 난' 등을 비롯한 잦은 변란을 일으키면서 소론의 정치적 입장이 약화되고 노론이 정국을 주도하였다.

결국 노론은 탕평파로 이름만 바꾸어 정국 운영의 주도권을 계속 유지하게 되었다.

그 결과 탕평을 내세워 척신과 권력을 장악한 간신이 정치를 어지럽히고 권력 유지에만 집착하게 되어 처음의 본질과 다른 방향으로 탕평정신이 변질되어 갔다.

영조 대(代)에 탕평당을 비판했던 강경파를 대체로 각 붕당의 '준론(峻論)'이라고 불렀다.

이들 중에서도 탕평정국에 참여하면서 '탕평당'을 견제했던 정파 전체를 '청류당'으로 호칭할 수 있는데,남인 청론,소론 준론,노론 청명당,이 세 정파를 말한다.

이들은 대체로 '의리'와 '명절(名節:명분과 절의)'을 숭상하고 붕당의 타파를 병행하는 탕평을 주장한 강경 탕평파다.

따라서 정조는 이러한 준론(峻論)을 중심으로 하는 '준론 탕평'을 전개하였다.

그러므로 정권 초기부터 노론 중에서도 홍국영 등의 청론(淸論)을 표방한 인물들을 중심으로 정치개혁이 실시되었다.

결국 정조의 '준론' 탕평은 영조 대의 '완론' 탕평에 대한 반성으로 명분과 의리를 중요시 하는 탕평이기 때문에 정조는 자신의 정치를 '의리의 탕평'이라고 규정하였다.

이렇게 정조가 '의리의 탕평'을 주장하게 된 중요한 이유는 각 붕당의 명분을 존중해줄 때 비로소 공존의 정치가 가능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정조는 붕당 간의 의리와 인재를 중립하여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는 방식을 통하여 정치에서 붕당의 의미를 중시하는 '의리의 탕평책'을 전개해 나갔다.

이것은 원칙을 가지고 흔들림 없이 문제를 해결해 나갈 수 있는 사람이라면 당을 막론하고 관리로 등용하겠다는 정조 자신의 공정한 인사 원칙에 대한 확고한 의지의 실천으로 받아들여진다.

⊙ 탕평(蕩平)정치의 시작은 중용이다

'중용(中庸)'은 중국의 전통적인 개념으로서,그 핵심은 '중(中)'의 의미에 있다.

'중'이란 간단히 말해 '양쪽 끝의 중간'인데,중용사상에서는 모든 사물에 양쪽 끝이 있으며,그 양쪽 끝은 '대립'과 '통일'이고,이것이 절묘하게 조화를 이루는 '과유불급(過猶不及)'의 상태,즉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는 상태'를 '중'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그러므로 한쪽에서 다른 한쪽을 향해 이동하는 것은 '중'이 아니며,어느 한쪽에 머물러 있는 것도 역시 '중'이 아니다.

따라서 '중'이란 움직이되 바로 적당한 위치를 벗어나서는 안 되며,정지해 있어도 적당한 위치에 있어야 한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중용을 유지할 수 있을까?

중용을 유지하는 기본 원칙은 한쪽의 힘으로 다른 한쪽의 힘을 상쇄시켜,저울이 평형을 이루듯 양쪽 끝의 힘을 같게 만드는 것을 의미한다.

결국 중용에 있어서 '중(中)'은 편벽되지 않고 치우치지 않으며 지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는 것이고,'용(庸)'은 평상함을 의미한다.

이에 대해 공자도 '대립되는 두 끝을 잘 헤아려 그 적절함으로 백성을 위한다' '중립하여 치우치지 않는다' 등의 문구를 통하여 중용의 의미를 강조하고 있다.

그러므로 영조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정조도 탕평책을 계승하여 "침전에다 특별히 탕탕평평실(蕩蕩平平室)이라는 액자를 달아놓고 아침저녁으로 눈여겨보며 나의 영원한 교훈으로 삼고 있다"고 말한 적이 있다.

이러한 사실은 정조의 인사정책이 붕당이나 출신 성분을 가리지 않고 노론·소론뿐만 아니라 서얼(庶孼) 신분이라도 실력있는 사람 중심으로 편향되지 않게 인재를 등용하는 것에서 잘 나타난다.

결국 정조가 실시한 탕평정치는 '어느 한쪽으로 편벽되지 않고 치우치지 않으며 지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는다'는 중용의 원칙에 한 치의 어긋남도 없고자 하였던 것이다.

⊙ 이열치열의 통치방식 통해 대통합의 정치 시작

정조의 탕평책은 각 당파의 옳고 그름을 가리는 시비(是非)논쟁을 종식시켜 붕당 간의 살육전을 그치게 하는 데에 그 목적이 있었다.

이를 위하여 정조는 '이열치열(以熱治熱)'의 통치방식을 채택한다.

'이열치열'의 통치방식이란 한 당파에서 반역자가 나오면 그를 반대당파의 반역자와 대비시켜 다스리고,한 당파에서 충신이 나오면 반드시 반대당파의 충신과 대비시켜 표창하는 방법이다.

이러한 방법을 통해 한 당이 집권했을 때 반대당을 모조리 숙청하지 않고 붕당 간에 서로 공존할 수 있는 이론적 토대가 마련될 수 있었다.

더욱이 정조는 '이열치열'의 탕평책을 통해 과거 당쟁이나 역모에 연루되어 있는 인재들까지 다시 등용하는 '소통(疏通)의 정치'를 펼쳤다.

이는 기본적으로 정치보복의 악순환이라는 고리를 끊고 침체되어 있는 인재를 등용하려는 정조의 상생(相生)의 정치 실현을 위한 적극적 의지의 표현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이와 같은 정조의 대화합의 정치가 가능하기 위한 선결 조건은 '한쪽의 힘으로 다른 한쪽의 힘을 상쇄시켜,저울이 평형을 이루듯 양쪽 끝의 힘을 같게 만든다'는 중용의 기본 원칙에 충실하여 어긋나지 않는 군주의 마음이다.

결국 정조는 당시의 인재를 통해서 당대의 문제를 해결할 수밖에 없는 것이 역사적 조건이라면,국왕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은 중용의 원칙에 입각하여 공정하고 우수한 인재를 선발하여 그들의 의견을 채택하는 것밖에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항상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는 중용의 입장을 바탕으로 화해와 협력의 탕평책을 실천하여 공존과 상생의 정치를 이끌어 나간 정조의 정치적 리더십은 우리 역사에서 영원한 성군으로 평가받기에 충분할 것이다.

서울 한성고 교사 cyjin74@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