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제1]

제시문 [다]에서 두 인물,'빛나'와 '오빠'는 삶과 그 목표에 대해 이야기한다.

제시문 [가]와 [나]를 활용하여,'빛나'의 관점에서 '오빠'를 비판하시오.

세상에서 힘들게 노력을 하고 부산을 떠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탐욕과 야망을 품고,부를 추구하고,권력과 명성을 얻으려는 목적은 무엇인가?

(…중략…) 다른 사람들이 주목을 하고,관심을 쏟고,공감 어린 표정으로 사근사근하게 맞장구를 치면서 알은 체를 해주는 것이 우리가 거기에서 얻을 수 있는 모든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부자가 자신의 부를 즐거워하는 것은 부를 통해 자연스럽게 세상의 관심을 끌어 모은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반면 가난한 사람은 가난을 부끄러워 한다.

가난 때문에 사람들의 시야에서 사라졌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아무도 우리에게 주목하지 않는다는 것은 곧 인간 본성에서 나오는 가장 열렬한 욕구의 충족을 기대할 수 없다는 뜻이다.

가난한 사람은 들락거려도 아무도 주의하지 않는다.

군중 속에 있어도 자신의 오두막 안에 처박혀 있을 때나 다름없이 미미한 존재일 뿐이다.

반면 지위와 이름이 있는 사람은 온 세상이 주목한다.

사람들은 그의 행동에 관심을 가진다.

그의 말 한 마디,행동 하나도 사람들은 그냥 지나치지 않는다.

― 애덤 스미스,「도덕감정론」

"다른 사람들의 생각이 피상적이고 하찮다는 것,그들의 시야가 편협하다는 것,그들의 감정이 지질하다는 것,그들의 의견이 빙퉁그러졌다는 것,그들의 잘못이 수도 없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되면 점차 그들의 머릿속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관심을 갖지 않게 된다.

(…중략…) 그러다 보면 다른 사람들의 의견에 많은 가치를 부여하는 것은 그들을 필요 이상으로 존중하는 것임을 알게 된다."

철학적 염세주의의 중요한 모범을 보여준 아르투르 쇼펜하우어의 말이다.

(…중략…) 사람들은 악하지 않으면 완전히 바보이기 십상이다.

쇼펜하우어는 볼테르가 한 말을 인용한다.

"세상에는 이야기를 나눌 가치도 없는 사람들이 들끓는다."

그런 사람들의 의견을 정말로 진지하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

정말로 그 사람들의 평가에 따라 우리 자신에 대한 생각을 바꾸어야 할까?

이런 사람들이 어떤 사람을 존중한다 해도 그 존중이 얼마나 가치가 있는 일일까?

(…중략…) 만일 청중이 한두 사람만 빼고는 모두 귀머거리라면 그들의 우렁찬 박수갈채를 받는다 해서 연주가가 기분이 좋을까?

― 알랭 드 보통,「불안」

"너무 기분 나쁘게 듣지 마.

다 오빠를 위해서 하는 말이니까.

오빠는 정신 좀 차려야 돼.

요즘 오빠 또래의 다른 남자들,정말 열심히 산단 말이야.

새벽에 도서관 가서,응,밤까지 책 보고 그래도 시간이 남으면 과외도 하고,뭐 알바도 하고 그러고도 시간을 짜내서 스터디까지 해.

요즘 먹고살기가 얼마나 힘들어?"

(…중략…)

그녀가 시키는 대로 했다면 나는 꽤 쓸만한 젊은이가 되어 있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중략…)

"오빠,이제 정신 차리고 열심히 사는 거야.

우리,이제 옛날처럼 모여서 같이 공부도 하고 그러자,응?"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들었다.

뭐? 정신을 차리라고?

"빛나야."

"응?"

"나는 말이야,아무래도 너랑 가는 길이 다른 것 같아."

"달라? 뭐가 달라?"

"나는 말이야,아직 철이 덜 들었나봐.

나는 좀,그러니까 뭐라고 말해야 되나.

그냥 좀 무의미한 일을 하고 싶어."

"무의미한 일?"

"사람들은 대부분 의미있는 일들을 하잖아.

돈도 벌고 사회를 위해 봉사하고 가족을 위해 헌신하고."

"근데? 그게 당연한 거 아니야?"

"뭐랄까,인생에는 그런 것보다 더 높은 차원의 뭔가가 있는 것 같아.

잘 표현할 수는 없지만 그런 세계가 전부는 아니라는 거지.

신문의 경제면에 나는 세계,그러니까 주식형 펀드니,환율이니,청약부금이니,분양제도 개편이니 하는 세계 너머에 또다른 뭔가가 있을 거라는 거지.

인간이 그런 일간지 경제면 같은 세계에만 매몰돼서 산다는 건,그렇게 살다가 죽는다는 건,너무 허망한 거 같아."

― 김영하,「퀴즈쇼」

[문제2]

제시문 [가] [나] [다] [라]는 인식의 방식에 대해 논하고 있다.

이 가운데 서로 공통된 주장을 하는 인용문 두 쌍을 명시하고,각 쌍의 인용문들이 어떤 의미에서 공통된 주장을 담고 있는지 서술하시오.

그리고 이 두 개의 주장이 서로 어떻게 양립 가능한지를 설명하시오.

"그리고 예수는 무슨 말을 했지?"

타오르가 데마스에게 나지막이 물었다.

"'옳은 일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은 배부를 것이다'고 말했어요."

데마스가 답했다.

그 말 한 마디 한 마디는 옳은 일을 한 이후로 그토록 목말라 괴로워했던 타오르에게는 더 이상 절실하게 와 닿을 수가 없는 말이었다.

그는 데마스에게 자기의 모든 삶이 들어 있는 그 몇 마디 말들을 되풀이해서 또 해달라고 애원했다.

(…중략…) 그런데 바로 그때 기적이 일어났다.

오로지 타오르만이 증인이 될 수 있는 아주 비밀스럽고 조그만 그런 기적이!

그의 덧난 두 눈에서,곪은 눈꺼풀에서 한 방울의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려 그의 입으로 들어갔던 것이다.

그는 그 눈물을 맛보았다.

그것은 단물,그가 30년이 넘도록 마셔 왔던 소금물이 아닌 최초의 물이었다.

* 이 소설의 주인공 타오르는 예수를 만나려고 했던 네 번째 동방박사다.

예수를 만나러 가던 중 곤경에 빠진 타인을 대신해서 소금 광산에서 30년 이상 죄수로서 노동하게 된다.

늘 소금기 섞인 물만 마시며 연명하던 가운데,새로 들어온 죄수 데마스로부터 예수의 설교 내용을 듣게 된다.

주관적으로 뿐만 아니라 객관적으로도 충분한 견해를 지식이라 일컫는다.

(…중략…)

지식이란 사람들에게 공통적인 지성(common understanding)을 뛰어넘어야 하며,철학자만이 그 지식을 밝혀낼 수 있다고 여러분들은 생각하는 것인가?

(…중략…) 자연은 모든 이들에게 차별없이 부여한 것에 관하여,이를 편파적으로 분배했다는 죄명을 쓰지 않는다.

또 최고의 철학은 자연이 사람들의 가장 공통적인 지성에 수여했던 바 그 이상으로 가르침을 줄 수는 없다.

양식(良識)은 세상에서 가장 공평하게 분배되어 있는 것이다.

누구나 그것을 충분히 지니고 있다고 생각하므로,다른 모든 일에 대해서 만족할 줄 모르는 사람들도 자기가 가지고 있는 이상으로 양식을 가지고 싶어하지 않으니 말이다.

이 점에 관해서는 모든 사람이 잘못 생각하고 있다고 볼 수는 없다.

오히려 이것은 잘 판단하고,참된 것을 거짓된 것으로부터 가려내는 능력,바로 양식 또는 이성이라 일컬어지는 것이 모든 사람에게 나면서부터 평등함을 보여 주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다른 길들을 통해서 다른 진리들에 이를 수 없었다면,우리는 지성의 진리로부터 추상적인 가능성 이외에 별로 많은 것을 이끌어 내지 못했을 것이다.

(…중략…) 어떤 사람이 어떻게 배우는지 우리는 전혀 알지 못한다.

하지만 그가 어떻게 배우든지 간에,그것은 객관적인 내용의 흡수에 의해서가 아니라,항상 자기의 시간을 잃어가는 가운데 이루어진다.

어떻게 한 초등학생이 단번에 라틴어에 숙달되는지 어떤 기호들(징표들)이 (사랑이나 고백하기조차 창피한 욕구를 통해) 그의 배움에 도움을 주는지 누가 알겠는가?

우리는 선생이나 부모가 준 사전을 통해서는 전혀 배울 수가 없다.

(…중략…)

"이 미지의 기호들로 된 내적인 책을 읽는 데는 그 누구도 어떤 모범을 제시해서 나를 도와줄 수 없었다.

이 독해는 그 누구도 대신해 줄 수 없고 협력조차 제공할 수 없는 창조 행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