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은 자연물일 뿐 인간이 운명의 주체자
⊙ 조상의 공덕(功德)이 왜 자손의 공덕(功德)인가?
음서 제도는 고려·조선시대 부(父)나 조부(祖父)가 관직 생활을 했거나 국가에 공(功)을 세웠을 경우,그 자손을 과거에 의하지 않고 특별히 채용하는 제도이다.
즉 부·조(父祖)의 음덕(蔭德)에 따라 그 자손을 관리로 채용하는 제도였다.
고려 시대와 조선 시대에 걸쳐 관리들을 선발하는 방법으로는 과거 제도가 있었으나,일단 기득권 층을 형성한 자들은 그들의 지위를 자손 대대로 계승하려는 욕구를 가지고 있었으며,이러한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부분적으로나마 관직을 세습하려는 목적에서 만들어진 것이 음서(蔭敍) 제도였다.
따라서 과거는 실력에 의해 관리를 선발하는 제도였고,음서는 가문에 기준을 둔 관리 등용 제도였다.
그러므로 음서는 혈통을 중시하는 신분제 사회의 속성을 띠면서,실력을 중시하는 관료제 사회의 속성을 대표하는 과거와 함께 조선 양반 관료 사회를 형성하는 하나의 중요한 축으로 작용하였다.
원칙적으로 음서 제도를 통해 관직을 부여받는 연령은 만 18세 이상으로 규정되어 있었지만 실제로는 15세를 전후하여 관직에 등용되었으며,부와 조부의 정치적 배경에 따라 승진 속도에 차이를 보이기도 하였다.
이러한 음서 제도는 당시 혈통을 중시하는 문벌주의가 여전히 기승을 부렸음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증거이기도 하다.
따라서 음서 출신자들은 5품 이상 관직에 진급해 다시 자손에게 음직을 전수하여 문벌이 형성되고,그 가족을 기반으로 혼인 등의 방법을 통하여 파벌을 구축하였다.
결국 음서는 기득권을 지닌 지배층이 그들의 관직 세습을 유지하기 위한 하나의 수단으로 이해될 수 있다.
⊙ 능력은 세습(世襲)되는 것이 아니다
과거(科擧)의 문자적 의미는 시험 종류인 과목(科目)에 따라 인재를 거용(擧用)한다는 뜻이다.
관리를 채용할 때 시험을 보게 된 것은 중국의 한(漢)나라 때부터 시작되었으며,우리나라는 신라 원성왕 4년(788)에 실시한 독서삼품과(讀書三品科)가 그 시초이다.
당시는 시험에 합격한 사람이 전원 관리로 채용되지는 못하고 보조적 역할을 하였을 뿐이다.
그러나 점차 관리채용 제도가 정비되어,고려 광종 9년(958)에 후주의 귀화인 쌍기(雙冀)의 건의에 따라 당나라 제도를 참고하여 실시되었다.
과거제는 소수 정예의 인재를 선발하였기 때문에 합격자는 전원 관리로 채용되었고,따라서 모든 사람의 선망의 대상이었다.
이러한 과거 제도는 조선시대에 들어와 문과,무과,잡과로 나누어 실시되었다.
이 중 무과는 고려 말기에 시작되었는데,조선조에 와서야 비로소 정식으로 설치되었다.
이를 통해 조선의 문무 양반 제도가 확립되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특히 주목할 점은 고려시대에 비해 조선은 음서 제도를 대폭 축소시켰다는 것이다.
물론 조선시대에도 고려시대의 음서처럼 과거를 보지 않고 관직에 등용되는 문음 제도를 시행하였다.
그러나 문음 자격을 2품 이상으로 제한하였을 뿐만 아니라 한 사람의 자손에게만 혜택을 주었다.
게다가 고려시대에는 음서 출신이 과거 출신보다 고위 관직에 오르기 쉬웠으나 조선시대에는 문음 출신이 고위 관직에 오르기가 쉽지 않았다.
이러한 세습 제도의 축소를 통해 귀족 사회의 특징을 지녔던 고려와 달리 조선은 관료 사회의 특징을 지니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과거제의 정착은 편파적인 신분 사회였던 귀족 사회를 개혁하여 비교적 능력 중심의 공정한 관료제 사회를 유지하는 기능을 하였다.
그러므로 그동안 혈연적,정치적 편파성이 강했던 인재 등용의 관행을 탈피하여 보다 공정하게 능력 위주로 인재를 등용할 수 있게 되었다는 데 과거제도 실시 의의가 있다.
또한 이로 인해 학문에 근거한 인재 채용을 통해 능력 있는 정치를 펼칠 수 있었다.
따라서 과거 제도는 국가나 사회의 근대화를 위한 발전적인 제도로 평가될 수 있다.
⊙ 순자(荀子),운명을 거부하고 인간의 노력을 강조하다
맹자의 이상주의와는 달리 순자(荀子)는 철저한 현실주의자로 추상적인 하늘의 권위를 부정한다.
고대 중국 전통사회는 경천사상(敬天思想)에 바탕을 두고 하늘(天)을 인간의 길흉화복을 좌우하는 인격신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순자는 자신의 '천론(天論)' 편에서 전통적인 하늘은 자연물에 불과하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므로 인간에게 일어나는 일은 인간에 의한 것이지 하늘에 의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결국 순자에게 있어서 하늘은 물리적 존재로서 인격성이 없는 단순한 자연 현상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순자는 인간의 실천적 노력을 강조한다.
왜냐하면 만물을 만든 것은 자연이지만,이것을 다스리는 것은 인간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하늘에 의해 모든 것이 결정되어지고 하늘을 칭송하는 숙명론에서 탈피하여 인간이 운명의 주체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 순자 사상의 핵심이다.
이를 위하여 인간이 주체적 능동성을 발휘하여 인문 세계를 창조할 것을 순자는 강조한다.
이러한 순자의 '천론'은 그의 정치 사상인 '후왕(後王) 사상'으로 그대로 이어진다.
당시 사람들의 생각 속에서 정치와 가장 깊은 관련을 맺고 있는 것은 하늘이었다.
사람들은 하늘이 덕이 가장 높은 사람을 뽑아서 통치를 맡긴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어진 임금인 성군을 만드는 것도 하늘의 뜻이고,포악한 임금이 망한 것도 하늘의 뜻이라고 생각했다.
이러한 생각은 사실상 지배 권력이 자신들의 통치를 합리화하기 위해 만들어 낸 이데올로기였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상가들과 일반 민중들은 이런 생각을 자연스럽게 운명으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순자는 '후왕 사상'을 내세워 하늘에 의해 결정되는 운명론을 부정했다.
즉 선정(善政) 여부는 하늘에 의한 운명이 아니라 현실에서 통치자 본인의 노력과 의지에 달려 있다고 생각하였다.
따라서 후왕은 하늘에 의해 정해진 요순(堯舜) 시대 운명적 군주의 모습이 아니라 자신의 의지와 능력을 통해 국가를 부강하게 만드는 현실적 군주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이상 정치나 사회 질서가 군주의 의지와 노력을 통하여 만들어진다고 확고히 믿었던 순자의 입장은 정치에 있어서 '후왕 사상'의 강조로 표현되었다.
결국 '천론'과 '후왕 사상'을 통해 보여지는 순자 사상의 특징은 운명의 거부와 인간의 의지를 강조하는 것이다.
이런 주장으로 인해 순자는 유교 역사상 가장 급진적이고 현실적인 정치관을 가진 인물로 평가되고 있다.
그러나 한편 당시로서는 이러한 순자의 생각이 유교의 정통성에서 벗어난 급진적 내용이었기 때문에 순자를 이단으로 몰아가는 결과를 가져오기도 했다.
⊙ 인간은 더 이상 하늘에 종속된 존재가 아니다
순자 이전의 사상가들은 대부분 모든 것의 근원을 하늘에서 찾았다.
만물을 낳아 준 것도 하늘이고,주재하는 것도 하늘이라고 생각했다.
이에 따라 하늘은 만물 생성의 근원인 동시에 인간 도덕의 근원이었다.
그러나 순자는 이러한 기존의 하늘과 인간의 종속적 관계를 부정했다.
따라서 하늘은 인간을 낳아 준 존재도 아니며 더구나 인간의 도덕적인 행위와는 무관하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순자는 당시 대부분의 사람들이 모든 일을 하늘의 뜻에 맡겨 놓고 운명으로 받아들이던 인식에서 벗어나,인간이 운명을 극복해야 한다는 파격적인 주장을 내놓게 된다.
이와 같은 순자의 입장에서 볼 때 부모나 조상의 공으로 과거를 치르지 않고 벼슬길에 진출하는 특권인 음서나 문음 제도는 개인의 의지나 노력을 무시하는 구시대적 발상이다.
결국 세습제를 통한 인재등용 방법은 능력에 따른 인재 등용의 의미보다는 고관이나 유공자에 대한 국가적 보은(報恩)의 의도로 개인의 노력을 인정하지 않는 봉건적 제도로의 복귀라는 부정적 평가를 받을 수밖에 없다.
이와 같은 사실을 종합해 보면 순자 철학은 운명론에 대한 부정이었고 인문주의의 극치를 표현하는 것이었다.
더욱이 '천론'과 '후왕 사상'을 통해 보여지는 순자의 입장은 현대 사회에서 과거의 정실주의나 세습제에 근거한 특채가 사라지고 모든 기관에서 능력에 따른 인재등용 제도인 공채를 정착시키는 데 긍정적 영향을 끼친 것으로 평가받을 수 있다.
서울 한성고 교사 cyjin74@hanmail.net
⊙ 조상의 공덕(功德)이 왜 자손의 공덕(功德)인가?
음서 제도는 고려·조선시대 부(父)나 조부(祖父)가 관직 생활을 했거나 국가에 공(功)을 세웠을 경우,그 자손을 과거에 의하지 않고 특별히 채용하는 제도이다.
즉 부·조(父祖)의 음덕(蔭德)에 따라 그 자손을 관리로 채용하는 제도였다.
고려 시대와 조선 시대에 걸쳐 관리들을 선발하는 방법으로는 과거 제도가 있었으나,일단 기득권 층을 형성한 자들은 그들의 지위를 자손 대대로 계승하려는 욕구를 가지고 있었으며,이러한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부분적으로나마 관직을 세습하려는 목적에서 만들어진 것이 음서(蔭敍) 제도였다.
따라서 과거는 실력에 의해 관리를 선발하는 제도였고,음서는 가문에 기준을 둔 관리 등용 제도였다.
그러므로 음서는 혈통을 중시하는 신분제 사회의 속성을 띠면서,실력을 중시하는 관료제 사회의 속성을 대표하는 과거와 함께 조선 양반 관료 사회를 형성하는 하나의 중요한 축으로 작용하였다.
원칙적으로 음서 제도를 통해 관직을 부여받는 연령은 만 18세 이상으로 규정되어 있었지만 실제로는 15세를 전후하여 관직에 등용되었으며,부와 조부의 정치적 배경에 따라 승진 속도에 차이를 보이기도 하였다.
이러한 음서 제도는 당시 혈통을 중시하는 문벌주의가 여전히 기승을 부렸음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증거이기도 하다.
따라서 음서 출신자들은 5품 이상 관직에 진급해 다시 자손에게 음직을 전수하여 문벌이 형성되고,그 가족을 기반으로 혼인 등의 방법을 통하여 파벌을 구축하였다.
결국 음서는 기득권을 지닌 지배층이 그들의 관직 세습을 유지하기 위한 하나의 수단으로 이해될 수 있다.
⊙ 능력은 세습(世襲)되는 것이 아니다
과거(科擧)의 문자적 의미는 시험 종류인 과목(科目)에 따라 인재를 거용(擧用)한다는 뜻이다.
관리를 채용할 때 시험을 보게 된 것은 중국의 한(漢)나라 때부터 시작되었으며,우리나라는 신라 원성왕 4년(788)에 실시한 독서삼품과(讀書三品科)가 그 시초이다.
당시는 시험에 합격한 사람이 전원 관리로 채용되지는 못하고 보조적 역할을 하였을 뿐이다.
그러나 점차 관리채용 제도가 정비되어,고려 광종 9년(958)에 후주의 귀화인 쌍기(雙冀)의 건의에 따라 당나라 제도를 참고하여 실시되었다.
과거제는 소수 정예의 인재를 선발하였기 때문에 합격자는 전원 관리로 채용되었고,따라서 모든 사람의 선망의 대상이었다.
이러한 과거 제도는 조선시대에 들어와 문과,무과,잡과로 나누어 실시되었다.
이 중 무과는 고려 말기에 시작되었는데,조선조에 와서야 비로소 정식으로 설치되었다.
이를 통해 조선의 문무 양반 제도가 확립되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특히 주목할 점은 고려시대에 비해 조선은 음서 제도를 대폭 축소시켰다는 것이다.
물론 조선시대에도 고려시대의 음서처럼 과거를 보지 않고 관직에 등용되는 문음 제도를 시행하였다.
그러나 문음 자격을 2품 이상으로 제한하였을 뿐만 아니라 한 사람의 자손에게만 혜택을 주었다.
게다가 고려시대에는 음서 출신이 과거 출신보다 고위 관직에 오르기 쉬웠으나 조선시대에는 문음 출신이 고위 관직에 오르기가 쉽지 않았다.
이러한 세습 제도의 축소를 통해 귀족 사회의 특징을 지녔던 고려와 달리 조선은 관료 사회의 특징을 지니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과거제의 정착은 편파적인 신분 사회였던 귀족 사회를 개혁하여 비교적 능력 중심의 공정한 관료제 사회를 유지하는 기능을 하였다.
그러므로 그동안 혈연적,정치적 편파성이 강했던 인재 등용의 관행을 탈피하여 보다 공정하게 능력 위주로 인재를 등용할 수 있게 되었다는 데 과거제도 실시 의의가 있다.
또한 이로 인해 학문에 근거한 인재 채용을 통해 능력 있는 정치를 펼칠 수 있었다.
따라서 과거 제도는 국가나 사회의 근대화를 위한 발전적인 제도로 평가될 수 있다.
⊙ 순자(荀子),운명을 거부하고 인간의 노력을 강조하다
맹자의 이상주의와는 달리 순자(荀子)는 철저한 현실주의자로 추상적인 하늘의 권위를 부정한다.
고대 중국 전통사회는 경천사상(敬天思想)에 바탕을 두고 하늘(天)을 인간의 길흉화복을 좌우하는 인격신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순자는 자신의 '천론(天論)' 편에서 전통적인 하늘은 자연물에 불과하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므로 인간에게 일어나는 일은 인간에 의한 것이지 하늘에 의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결국 순자에게 있어서 하늘은 물리적 존재로서 인격성이 없는 단순한 자연 현상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순자는 인간의 실천적 노력을 강조한다.
왜냐하면 만물을 만든 것은 자연이지만,이것을 다스리는 것은 인간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하늘에 의해 모든 것이 결정되어지고 하늘을 칭송하는 숙명론에서 탈피하여 인간이 운명의 주체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 순자 사상의 핵심이다.
이를 위하여 인간이 주체적 능동성을 발휘하여 인문 세계를 창조할 것을 순자는 강조한다.
이러한 순자의 '천론'은 그의 정치 사상인 '후왕(後王) 사상'으로 그대로 이어진다.
당시 사람들의 생각 속에서 정치와 가장 깊은 관련을 맺고 있는 것은 하늘이었다.
사람들은 하늘이 덕이 가장 높은 사람을 뽑아서 통치를 맡긴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어진 임금인 성군을 만드는 것도 하늘의 뜻이고,포악한 임금이 망한 것도 하늘의 뜻이라고 생각했다.
이러한 생각은 사실상 지배 권력이 자신들의 통치를 합리화하기 위해 만들어 낸 이데올로기였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상가들과 일반 민중들은 이런 생각을 자연스럽게 운명으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순자는 '후왕 사상'을 내세워 하늘에 의해 결정되는 운명론을 부정했다.
즉 선정(善政) 여부는 하늘에 의한 운명이 아니라 현실에서 통치자 본인의 노력과 의지에 달려 있다고 생각하였다.
따라서 후왕은 하늘에 의해 정해진 요순(堯舜) 시대 운명적 군주의 모습이 아니라 자신의 의지와 능력을 통해 국가를 부강하게 만드는 현실적 군주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이상 정치나 사회 질서가 군주의 의지와 노력을 통하여 만들어진다고 확고히 믿었던 순자의 입장은 정치에 있어서 '후왕 사상'의 강조로 표현되었다.
결국 '천론'과 '후왕 사상'을 통해 보여지는 순자 사상의 특징은 운명의 거부와 인간의 의지를 강조하는 것이다.
이런 주장으로 인해 순자는 유교 역사상 가장 급진적이고 현실적인 정치관을 가진 인물로 평가되고 있다.
그러나 한편 당시로서는 이러한 순자의 생각이 유교의 정통성에서 벗어난 급진적 내용이었기 때문에 순자를 이단으로 몰아가는 결과를 가져오기도 했다.
⊙ 인간은 더 이상 하늘에 종속된 존재가 아니다
순자 이전의 사상가들은 대부분 모든 것의 근원을 하늘에서 찾았다.
만물을 낳아 준 것도 하늘이고,주재하는 것도 하늘이라고 생각했다.
이에 따라 하늘은 만물 생성의 근원인 동시에 인간 도덕의 근원이었다.
그러나 순자는 이러한 기존의 하늘과 인간의 종속적 관계를 부정했다.
따라서 하늘은 인간을 낳아 준 존재도 아니며 더구나 인간의 도덕적인 행위와는 무관하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순자는 당시 대부분의 사람들이 모든 일을 하늘의 뜻에 맡겨 놓고 운명으로 받아들이던 인식에서 벗어나,인간이 운명을 극복해야 한다는 파격적인 주장을 내놓게 된다.
이와 같은 순자의 입장에서 볼 때 부모나 조상의 공으로 과거를 치르지 않고 벼슬길에 진출하는 특권인 음서나 문음 제도는 개인의 의지나 노력을 무시하는 구시대적 발상이다.
결국 세습제를 통한 인재등용 방법은 능력에 따른 인재 등용의 의미보다는 고관이나 유공자에 대한 국가적 보은(報恩)의 의도로 개인의 노력을 인정하지 않는 봉건적 제도로의 복귀라는 부정적 평가를 받을 수밖에 없다.
이와 같은 사실을 종합해 보면 순자 철학은 운명론에 대한 부정이었고 인문주의의 극치를 표현하는 것이었다.
더욱이 '천론'과 '후왕 사상'을 통해 보여지는 순자의 입장은 현대 사회에서 과거의 정실주의나 세습제에 근거한 특채가 사라지고 모든 기관에서 능력에 따른 인재등용 제도인 공채를 정착시키는 데 긍정적 영향을 끼친 것으로 평가받을 수 있다.
서울 한성고 교사 cyjin74@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