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권은 신권주의 이상사회를 용납하지 않았다

⊙ 중종,조광조로 승부수를 띄우다

[최양진 선생님의 철학으로 만나는 역사] 7. 중종에게 토사구팽(兎死拘烹) 당한 조광조
반정(反正)에 의해 왕위에 옹립된 중종(中宗·1506~1544)은 한동안 공신들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다.

반정공신들의 득세 속에서 제자리를 찾지 못하던 중종은 재위 8년 무렵 반정을 주도한 3인방이 모두 사망하면서,성리학을 위주로 하는 신진세력들을 등용하여 연산군 이후 황폐화된 조정과 사회적 분위기를 바로잡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에 따라 기존의 훈구세력을 대체할 수 있는 새로운 정치 파트너를 모색하게 되었다.

그때 중종의 눈에 들어온 인물이 사림파의 선두주자 조광조(趙光祖·1482~1519)였다.

조광조는 연산군 시절의 폭정에서 뼈저린 교훈을 얻어 왕도정치를 바탕으로 하는 지치주의를 통해 도덕정치가 구현되는 이상사회의 건설을 주장하였던 인물이다.

16세기 초반 정계에 등장하여 거침없는 개혁정책을 추진하다가 5년 만에 기묘사화로 그 뜻이 좌절되었다.

그의 좌절은 당시에 보수와 현실정치의 벽이 얼마나 두터웠던가를 여실히 보여주는 단면이다.

⊙ 조광조가 꿈꾸었던 이상적 리더십

조광조는 중앙 정계에서 활동하면서 군왕(君王)의 존재를 어느 누구보다도 높게 평가하고 있었다.

아마도 그것은 그가 중종반정(中宗反正)이라는 커다란 정치 변동을 몸소 체험했기 때문일 것이다.

특히 연산군의 폭정으로 인한 정계의 혼란과 민생의 불안을 몸소 겪어 왕의 품성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반드시 현자(賢者)가 군주가 되어야 함을 강조하고 유교를 정치와 교화의 근본으로 삼아 왕도정치의 실현을 주장하였다.

이것을 가리켜 지치주의(至治主義) 도학정치라고 한다.

따라서 그는 지치(이상정치)의 실현을 위한 전제조건으로 다스림의 근본인 군주의 마음을 바로잡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왜냐하면 군주의 마음이 바르지 않으면 정치가 바로 설 수 없고 교화가 행해질 수 없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결국 조광조가 꿈꾸었던 이상적 리더십은 성리학적 명분을 충실히 이행하여 왕도(王道)정치를 현실에서 실현할 수 있는 군주였다.

⊙ 조선은 사대부의 나라

조선이 임금의 나라인가, 사대부의 나라인가에 대한 논란은 조선 건국 초부터 이방원과 정도전을 시작으로 왕권(王權)과 신권(臣權) 간의 끊임없는 대립구도가 이어져 왔다.

이러한 대립적 논란에서 조광조는 신권주의를 주장한다.

즉 현재의 왕이 수양을 하면 성인이 될 수 있을 것으로 판단될 경우 왕을 수양하게 하여 성인이 되게 만드는 주체도 신하이고,왕이 수양을 하더라도 성인이 될 수 없다고 판단될 경우 왕을 바꾸어 가능성이 있는 다른 사람으로 대치하는 주체도 신하라는 것이다.

이와 같은 사실로 미루어 볼 때 결국 조선에 있어서 택군(擇君;군주를 선택함) 등의 문제에 대한 판단과 결정의 권한은 왕에게 있는 것이 아니고 신하에게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조광조의 신권주의의 핵심이다.

왜냐하면 조선왕조는 성리학적 이념을 표방한 역성혁명을 통해 건설된 전형적인 유교 국가였다.

그러므로 왕조의 교체와 사회변혁을 합리화하고 정당화하기 위해서는 유학의 주체인 선비(士)가 정치의 주체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 대동사회가 곧 이상사회

그렇다면 조광조가 강조하는 왕도정치의 목적은 어디에 있는가?

그것은 다름아닌 이상세계의 건설이다.

조광조는 지치주의를 통해 인간이 다스리는 세상이 바로 하늘의 뜻이 반영된 대동사회(大同社會),즉 유교적 이상세계의 구현에 정치의 목적을 두고 있다.

여기서 대동의 어원은 「예기(禮記)」 「예운편(禮運篇)」에서 비롯되며,'권력을 독점하는 자 없이 평등하며,재화는 공유되고 생활이 보장되며,각 개인이 충분히 재능을 발휘할 수가 있고,범죄도 없는 세상'이라고 정의되어 있다.

따라서 조광조는 왕도정치에 따른 지치주의의 목적을 당대 백성들이 요순시대(堯舜時代)처럼 태평성대를 누릴 수 있는 대동세계를 구현하는 데 두었다.

그리고 이를 위한 전제조건으로 성리학적 명분에 어긋나지 않는 군주의 역할을 강조했다.

⊙ 이상세계를 위한 불안한 첫걸음

향약은 그 모체를 중국 송대(宋代)의 남전 여씨 문중에서 향리를 교도하기 위하여 약속한 여씨향약에 두고 있다.

그러나 조광조에 의해 본격적으로 보급되기 시작한 조선의 향약은 성리학적 이상사회,즉 중국의 하·은·주 삼대에 걸친 이상 사회를 현실 속에 건설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그러므로 향약은 지방의 자치를 설정한 민간 규약으로 유학적 도덕관의 실천과 도학적 생활을 몸에 익히도록 하는 데 그 목적이 있다.

따라서 조광조는 향약의 보급을 통하여 사림파가 주도하는 유교적 질서를 확립하려는 정치적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

즉 조광조에게 있어서 향약은 이상세계 실현을 위한 하나의 실천론이었다.

그러나 성리학적 왕도정치 실현과 사림 세력의 정치적 기반이 될 것으로 예상했던 향약은 실시 초기부터 난관에 부딪히게 되었다.

당시 실시되었던 향약은 전통과 조화된 자치적인 것이 아니라 이상에 치우친 위정자들에 의해 주도되는 관(官) 주도적 성향을 띠고 있었다는 것이 문제였다.

조광조 자신도 지적하였듯이 향약의 실시를 관에서 철저히 규제하고 강제하였던 것은 향약의 근본 취지에 어긋나는 것이었고,이런 강제성은 오히려 민간의 반발을 사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 중종과 조광조의 동상이몽(同床異夢)

일반적으로 중종과 조광조의 관계는 매우 긴밀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한편으로는 서로가 견제하고 갈등하는 위치에 있었다.

반정으로 즉위한 중종은 불안정한 왕위를 위협하는 사건이 계속 이어지던 시기,성리학적 이념으로 무장한 조광조를 발탁하여 상당한 정치적 이익을 얻었다.

특히 폐비 신씨의 복위 문제나 정몽주와 김굉필의 문묘종사 문제에서 중종을 위협하던 반정세력들은 성리학의 원칙에 충실한 조광조의 등장과 함께 정치적으로나 이념적으로 상당히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중종과 조광조 두 사람은 서로 추구하는 정치적 길이 달랐기에 동반자이면서도,어떠한 계기가 생기면 철저히 대립할 수도 있는 '위험한 동반자'였다.

아무리 절대적인 신임을 받는 신하라 하더라도 국왕의 입장과 신하의 입장은 다를 수밖에 없었다.

조광조는 신하는 왕에게 충성해야 마땅하지만,그 왕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시대 조선사회가 추구해야 하는 성리학적 이념이라고 판단했다.

조광조는 세조나 연산군의 정치는 결국 왕이 성리학적 이념 위에 군림했기 때문에 문제가 생긴 것으로 인식했고 중종과 같은 왕도 얼마든지 그러한 전철을 밟을 수 있으리라 생각하였다.

따라서 중종이 자신만의 정치적 역량을 가진 군주로 성장하여 독재권을 행사하기 전에 성리학적 이념을 견제수단으로 하여 중종을 압박하려 하였다.

반면에 반정공신들과 훈구대신들의 견제에서 벗어나기 위한 방법으로 조광조를 파격적으로 기용했던 중종 또한 자신의 기반을 강화하자,이제 더 이상 조광조의 성리학적 명분론에 휘둘리는 나약한 왕이 되기를 원하지 않았다.

결국 중종이 기묘사화를 통해 조광조의 숙청을 결정한 이유도 왕권에 대한 견제인 조광조의 성리학적 명분론과 개혁정책에 계속 힘을 실어줘서는 위험하다는 나름대로의 정치적 계산이 작용하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중종의 판단에 결정적 힘을 실어준 것이 훈구파이다.

따라서 기묘사화의 비극은 왕권(王權)에 대한 견제로서 성리학적 이념을 강조하며 등장한 신권이 왕권에 패배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렇지만 조선조 500여년을 돌이켜 볼 때,조광조의 개혁 정치는 정치에 있어 유교적 이상사회를 구현하기 위해 군주의 도덕성을 강조하고,정치제도의 개편을 추진하였다는 면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서울 한성고 교사 cyjin@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