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 "인간답게 죽고 고통에서 벗어날 권리도 있다"

반 "생명을 가볍게 여기고 상업적으로 악용 우려"

식물인간 상태에 빠져 인공호흡기로 연명하는 75세 할머니의 자녀들이 헌법재판소에 "우리 법에는 품위있게 죽을 자기선택권과 행복추구권이 없다"며 위헌확인을 위한 헌법소원을 내면서 '존엄사(尊嚴死)'허용 여부가 주목된다.

존엄사는 극심한 고통을 겪는 중환자나 난치병 환자에게 약물을 투여해 편안하게 숨을 거두게 하는 안락사(安樂死)와는 다른 개념이다.

살아날 가능성이 없다고 의학적으로 판단된 환자에 대해서만 치료를 거둔다는 점에서 '소극적 안락사'라고도 불린다.

한쪽에서는 인간의 생명은 무엇보다 소중한 것이지만 순리에 따른 죽음을 막는 것 또한 인명의 존엄성을 해치는 것일 수 있다며 존엄사를 허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에 대해 다른 쪽에서는 "자신의 생명이 타인의 판단에 따라 결정되는 사회에서는 인간생명의 존엄성이 훼손될 수밖에 없다"며 존엄사를 허용해선 안된다고 반박한다.

우리나라에서는 2004년에 보호자 요구로 뇌수술 환자를 퇴원시킨 서울 보라매병원 의사가 '살인방조죄'로 유죄판결을 받은 이래 대부분 의사들은 환자가 회생 가망이 없어도 치료를 멈추지 않고 '방어 진료'를 계속하고 있는 실정이다.

문제는 많은 환자들이 생명의 존엄성을 지키지 못하면서 생을 마감하는데도 죽을 권리를 인정하지 않는 게 과연 타당하냐는 점이다.

⊙ 반대 측, "인간생명 경시풍조 유발하고 존엄성도 훼손해"

존엄사를 반대하는 쪽에서는 "어떤 사람의 생명이 타인의 판단에 따라 결정되는 사회에서는 인간의 생명이 안전하게 보장될 수 없으며, 이는 곧 생명경시 풍조를 낳게 된다"고 경고한다.

안락사는 인간생명의 존엄성을 훼손하게 된다는 것이다.

더욱이 안락사가 합법화될 경우 자살 또는 살인과 명백히 구분하기 어렵기 때문에 사회적으로 악용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우려한다.

게다가 사회적·경제적 약자들, 특히 신체적·정신적 장애인이나 노인, 빈곤층에게 안락사는 '죽음을 선택할 권리'가 아니라 '죽어야만 하는 의무'가 될 수 있다고 꼬집는다.

회복 불가능한 환자의 고통을 덜어주는 게 아니라 '귀찮고 쓸모없는 인간'을 제거하는 수단으로 전락할 수 있다는 얘기다.

이뿐만 아니다.

환자의 뜻과 다르게 죽음이 결정될 수 있고, 장기 매매 같은 상업적 목적에 악용될 수도 있으며, 환자의 회복 불가능 여부를 명확히 판단할 수도 없다고 지적한다.

⊙ 찬성 측, "인간답게 죽고 고통에서 해방될 권리를 줘야"

이에 대해 찬성 측에서는 생명보조장치에 의존하여 삶을 인위적으로 연장하는 것보다는 '삶의 질'이 더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죽음보다 더한 고통 속에서 무리하게 삶을 이어가느니 차라리 인간답게 죽을 수 있는 권리,고통에서 해방될 권리를 주는 게 낫다는 논리다.

게다가 회복이 불가능한 환자에게 의료행위를 계속하는 것은 가족뿐만 아니라 의료진과 병원, 나아가 사회 전체에 엄청난 경제적 손실을 가져온다고 지적한다.

일부에서 안락사를 합법화할 경우 치료보다는 안락사를 해결책으로 선택할 가능성이 높다고 지적하지만 허용기준을 강화하고 악용을 감시한다면 그러한 부작용은 충분히 막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실제로 미국 프랑스 독일 같은 나라는 연명치료를 받지 않고 품위있게 죽겠다는 의사를 평소 글이나 유서 등으로 표현해 둘 경우 존엄사를 허용하고 있으며 일본 또한 이미 관행적으로 의사 2명 이상이 '회복 불가능'이라고 판단한 환자에겐 본인 의사에 따라 치료를 중단하고 있다는 것이다.

⊙ 품위있는 죽음 위한 제도적 장치 마련 서둘러야

회생 가능성이 없다고 의학적으로 판단된 환자의 죽음을 막는 것은 품위있는 죽음보다는 무의미한 고통을 강요하는 일이 아닐 수 없다.

뿐만 아니라 연명치료에 매달려야 하는 가족들의 정신적 고통과 경제적 부담,그에 따른 사회적 비용 또한 만만찮은 실정이다.

더욱이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는 헌법 제10조 규정에 따라 국민들은 죽음을 편안하게 맞이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은 물론이다.

이미 미국 등 선진국은 '사전의사결정'을 통해 환자 자신이 원치 않을 경우 죽음의 순간에 의학적으로 불필요하다고 판단되는 기계적 호흡이나 심폐 소생술 등을 시행하지 않도록 하는 법률을 마련해놓고 있다.

이제 우리도 안락사에 대한 임시방편의 처벌보다는 품위있는 죽음을 위한 제도적 장치를 시급히 마련해야 할 때다.

정부와 의료계 학계가 함께 나서 존엄사에 대한 엄격한 판정 기준과 절차부터 공론화할 필요가 있다.

아울러 환자 간병 부담이 한계에 이를 경우 사회적 경제적 도움을 요청할 수 있는 시스템도 강구해야 한다.

김경식 한국경제신문 논설위원 kimks5@hankyung.com

<용어풀이>

◆안락사(euthanasia) = 죽음에 임박해 참기 어려운 육체적 고통에 시달리는 환자의 고통을 없애거나 경감할 목적으로 죽음을 앞당기는 임의적 조치를 말한다.

'좋은'이란 뜻의 그리스어 'eu'와 '죽음'이란 뜻의 'thanatos'가 합쳐진 것으로 '좋은(편안한) 죽음'을 의미한다.

고통을 경감시키기 위해 인위적으로 생명을 단축시키는 행위는 형법상 촉탁 살인죄나 자살방조죄가 성립한다.

◆적극적 안락사 = 환자에게 직접 치사량의 독극물을 주사하는 등의 행위를 함으로써 죽음에 이르도록 하는 것을 말한다.

◆소극적 안락사 = 환자에게 필요한 의학적 조치를 취하지 않거나 인위적인 생명 연장장치를 제거함으로써 죽게하는 것.

회복 가능성이 없는 식물인간 상태의 환자에게 단순한 연명조치에 불과한 의료행위(인공호흡장치 등)를 중단해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유지하면서 자연적으로 죽음을 맞도록 하는 것으로 흔히 '존엄사'로 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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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뉴스 5월12일자>

식물인간 상태인 어머니에 대한 무의미한 치료를 중단해 달라는 가처분신청을 낸 가족들이 이번에는'존엄사'에 대한 법률을 제정하지 않은 것은 헌법에 어긋난다며 헌법재판소에 헌법소원을 냈다.

12일 헌법재판소에 따르면 식물인간 상태에 빠진 김모씨(75·여)의 가족들은 존엄사에 대한 법률이 제정되지 않은 데 대해 '입법 부작위 위헌'확인소송을 헌법재판소에 제기했다.

이들은 "식물인간 상태인 어머니에 대한 존엄사를 요청했으나 병원이 '관련 법률이 없다'며 거부했다"며 "존엄사에 대한 법률이 제정되지 않아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행복추구권,평등권,환자의 자기결정권,재산권,보건권 등을 침해당했다"고 주장했다.

앞서 김씨의 가족들은 "어머니가 병원에서 검사를 받다 식물인간 상태에 빠졌다"며 '무의미한 연명치료를 중단해 달라'는 취지의 가처분신청을 법원에 제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