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자의 '이(利)'는 이용후생과 통한다
⊙ 맹자의'이(利)'의 입장에 대한 오해
처음 공맹(孔孟) 시대 유학의 목적은 구체적인 현실에서 '경세제민(經世濟民;세상을 다스리고 백성을 구제함)'을 통해 백성의 삶을 풍요롭고 바람직하게 만드는 것을 정치의 이상으로 삼았다.
그렇기 때문에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문제 못지않게 경제적인 문제에도 깊은 관심을 가진다.
공자(孔子)가 교육에 앞서 백성의 부서(富庶;백성을 부유하게 해 줌)를 말한 것이나 맹자(孟子)가 백성에게 항산(恒産)을 마련해 주는 것을 왕도 정치 실현의 기반으로 지적한 것은 모두 그 좋은 실례이다.
맹자는 이익 추구에 대하여 사람들이라면 누구에게나 있는 공통적 현상으로 인정하였다.
누구나 부유함과 귀함을 좋아하기 때문에 그것을 얻기 위하여 자신만의 이익을 창출하는 행위는 당연한 것이다.
만일 인간이 이익을 추구할 수 없다면 그 존재 가치를 상실하는 것과 같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 추구가 도리(의로움)에 근거하였는가 하는 점이다.
도리로 얻지 않은 이익은 의미를 가질 수 없다.
이것을 대표적으로 표현하는 말이 유교의 '견리사의(見利思義)'이다.
이 말의 편중된 해석이 유교가 '이익(利)'과 관련된 모든 행위를 경시한다는 잘못된 인식을 심어 주었다.
물론 유교의 의리관(義利觀)에서 '의로움'은 '이로움'보다 높을 뿐만 아니라 중요한 근본이라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그렇다면 유교에서 '의로움(義)'은 항상 귀하기만 하고 '이로움(利)'은 항상 천하기만 한가?
유교에서 '이익은 항상 의로움에 근거해야 한다' '이익이 의로움에 근거하면 항상 참된 가치를 갖는다'는 말의 의미는 '백성들을 위하는 이익이 아닌 위정자 자신만을 위하는 사리사욕(私利私慾)이 우선될 때에 이로움은 어떠한 경우에도 정당화될 수 없다'는 말이다.
이것은 정치에서 위정자의 물질적 이익 추구를 억제하여 백성들의 생존권을 보장하기 위한 방법이었다.
결국 유교는 백성들이나 공동체 전체의 '이로움'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위정자 개인의 '사리사욕'의 추구를 부정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유교의 '이익'에 대한 해석은 후대로 오면서 처음의 목적과는 다르게 유학의 경향이 관념론적 측면에 기울면서,이른바 '중의경리(重義輕利;의는 중요하고 이는 가볍다)' 등의 '의론(義論)'이 나와 재물이나 이익을 천시하는 흐름이 생겨났다.
유학의 이러한 경향은 특히 주자학인 성리학에 이르러 극대화되었는데,성리학을 국가의 통치 이념으로 받아들인 조선 시대에 이러한 경향은 더욱 심화되었다.
⊙ 의리를 빙자한 독단이 조선을 망쳤다
우리나라 의리 사상의 전개 과정에서 선비 정신이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난 때는 조선 시대이다.
조선 왕조가 출범하는 역사적 전환기에 유학자들 중 '상황적 의(義)'를 근거로 혁명의 정당성을 제기한 정도전(鄭道傳)의 입장과 '원리적 의(義)'를 근거로 혁명에 반대한 정몽주(鄭夢周)의 입장으로 양분되었을 때,어느 것이 정당한가 하는 것은 의리의 중대한 문제였다.
조선시대 의리 사상을 특징 짓는 중요한 근거는 세종 시대 이래 '원리적 의리'에 정당성을 부여하고,길재에서 조광조(趙光祖)로 이어지는 사림파를 중심으로 하여 형성되었다.
처음에 사림파는 의리를 이념적 중심으로 지키면서 권력 집단에 비판적이었고 순수한 이상주의적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므로 훈구 세력과 갈등을 일으키면서 권력의 무수한 탄압을 받았으며,이 희생을 대가로 의리 정신이 더욱 심화되어 갔다.
그러나 그 뒤에 사림이 권력을 장악하면서 그 내부에서 의리에 비추어 정권을 비판하는 입장과 정권을 통해 유교 이념을 실현하려는 입장이 분열을 일으키며 당쟁을 야기하였다.
그리고 당쟁을 통한 이러한 의리 논쟁은 '호락 논쟁'과 같은 명분론으로 치우쳐 조선을 허울 뿐인 관념론에 빠지게 하였다.
이렇게 의리와 명분을 중시한 성리학은 임진왜란 이전까지는 설득력을 갖고 있었지만,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더 이상 현실적 지배 이념으로서의 역할을 담당하지 못하게 되었다.
왜냐하면 조선에 있어서 의리 논쟁은 현실적 문제와 시대적 흐름을 외면한 채 사림들의 독선적 명분을 합리화시키기 위한 수단으로 변질되었기 때문이다.
그 결과 실학파의 성장과 함께 의리론의 관념론적인 비현실성이 지적되고 선비의 기능과 역할에 대한 심각한 반성이 생겨났다.
⊙ 이용후생(利用厚生)만이 조선이 살 길이다
이러한 이유로 성리학을 대신하여 구체적인 민생의 고통과 현실의 문제를 해결하고 그들의 의사를 대변하기 위한 실학 사상이 대두된다.
이들은 공통적으로 '이용후생(利用厚生)'을 통하여 현실적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시대의 급선무임을 주장하고,구체적으로 '이용후생'의 실천을 위한 방법들을 제시하였다.
'이용(利用)'이란 백성의 쓰임에 편리한 것으로서 공작 기계나 유통 수단 등을 의미하고,'후생(厚生)'은 의식주(衣食住) 등의 재물을 풍부하게 하여 백성의 삶을 풍요롭게 만드는 것이다.
그러기 위하여 봉건 지배 계급인 선비 계층(士)의 타성적인 계급 의식을 타파하고 공상(工商)으로의 전환을 통해 상업(商)을 중심으로 한 국가 경제 체제를 확립하는 부국을 지향하였다.
그리고 국내의 경제 유통을 위한 도로망 정비 등을 제시하고 국부(國富) 증진을 위한 외국과의 교역을 강조하였다.
또한 사회 개혁과 국민 경제를 통해 부국강병과 이용후생을 실천하기 위해 모든 학문 분야에서 실용적 기술의 습득이 필수적임을 주장하였다.
특히 기술은 역사의 변천에 따라 진보한다는 의식에 따라 청나라의 문물 제도를 통해 서양의 기술을 직접 체험하고 "진실로 백성에게 이롭다면 비록 그 법이 이적(夷狄;고대 중국인이 주변의 여러 민족을 비하하여 부른 명칭)에서 나온 것일지라도 성인이 그것을 선택할 것"이라며,주자학적 명분론에서 탈피하여 중국과 서양의 선진적 기술에 대한 적극적인 수용 자세를 보였다.
왜냐하면 이들은 당시의 관념론적 모화론자(慕華論者;명나라를 그리워함)들과는 달리 객관적으로 현실에 대한 문제 의식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문제 의식을 가지고 관념론과 명분론에 빠져 국익 증진과 민생의 고통이라는 현실적 문제를 외면하고 있던 당시 조선 사회에 대한 개혁을 추진하고자 하였다.
⊙ 맹자! 북학파를 지지하다
전국(戰國)의 혼란 상황 속에서 극도로 궁핍한 생활고와 도덕적 타락에 빠져 있던 백성들의 생존권 보장을 가장 급선무로 여겼던 맹자는 백성들의 최저생활 보장을 위해 항산 정책(恒産政策)을 제시한다.
백성이 살아가는 데 있어 일정한 생업이 없으면 도덕 의식도 없다.
따라서 방종하고 편벽한 생활로 인해 사회 질서가 교란된다고 본 맹자는 물질 조건이 인간에게 미치는 영향을 정확히 인식하였다.
그러므로 위정자가 일반 백성들의 일정한 생업 보장을 위해 사회간접자본에 대한 투자나 교육 투자,농지독점 방지책 등에 온 힘을 기울여야만 한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농업만을 항구적인 직업으로 인정하지 않고 상업이나 공업 또는 선비(士)도 하나의 전문직업 계층으로 정착시켜 각자의 일에 안심하고 종사하게 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결국 맹자의 항산 정책의 실현 형태는 모든 백성이 일정한 직업이 있어서 가족 내에서 의식주의 기본 생활문제를 해결하고,생활 수준은 당시의 문화 생활을 누릴 수 있을 정도의 수입을 보장할 수 있는 것이었다.
이러한 맹자의 생각은 주자학적 관념론에서 벗어나 "진실로 백성에게 이롭다면 비록 그 법이 이적에서 나온 것일지라도 성인이 그것을 선택할 것"이라며,사회적 생산성 향상을 통해 백성들의 기본적 생활을 보장하는 것을 국가의 중요한 역할로 보고 있는 북학파의 입장과 그 맥을 같이한다고 볼 수 있다.
결국 맹자나 북학파 모두 백성들에게 실질적 도움이 되는 경제적 '이로움'의 중요성을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 맹자와 북학파에 대한 평가
조선에서 갈등이 야기되었던 원인은 '의(義)'와 '이(利)'에 대한 우선 순위와 이에 따른 가치 판단의 문제 때문이었다.
조선의 성리학은 처음 유학의 목적과는 다르게 유학의 경향이 주자학적 관념론에 기울면서 지나치게 의리론에만 집착하여 관념론으로 빠져들었다.
그 결과 물질적 이로움과 관련된 실용적인 것을 천시하면서 백성들이 당면하고 있는 현실적인 문제를 외면하게 되었다.
그러나 의로움을 중시하는 가치관이 확립되기 위해서는 물질적 가치가 적당하게 충족되어야 한다.
즉 '의(義)'를 이루기 위한 선결 조건이 '이(利)'이다.
이런 면에서 볼 때 맹자의 항산 정책이나 북학파의 이용후생 사상은 주자학적 명분에 집착하는 위정자들의 허울 뿐인 관념론에서 벗어나 백성을 중심에 두고 경세제민을 통해 백성들의 삶을 풍요롭고 바람직하게 만드는 유교적 이상주의 실현에 대한 실천적이고 실질적 노력으로 평가받을 수 있다.
서울 한성고 교사 cyjin@hanmail.net
⊙ 맹자의'이(利)'의 입장에 대한 오해
처음 공맹(孔孟) 시대 유학의 목적은 구체적인 현실에서 '경세제민(經世濟民;세상을 다스리고 백성을 구제함)'을 통해 백성의 삶을 풍요롭고 바람직하게 만드는 것을 정치의 이상으로 삼았다.
그렇기 때문에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문제 못지않게 경제적인 문제에도 깊은 관심을 가진다.
공자(孔子)가 교육에 앞서 백성의 부서(富庶;백성을 부유하게 해 줌)를 말한 것이나 맹자(孟子)가 백성에게 항산(恒産)을 마련해 주는 것을 왕도 정치 실현의 기반으로 지적한 것은 모두 그 좋은 실례이다.
맹자는 이익 추구에 대하여 사람들이라면 누구에게나 있는 공통적 현상으로 인정하였다.
누구나 부유함과 귀함을 좋아하기 때문에 그것을 얻기 위하여 자신만의 이익을 창출하는 행위는 당연한 것이다.
만일 인간이 이익을 추구할 수 없다면 그 존재 가치를 상실하는 것과 같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 추구가 도리(의로움)에 근거하였는가 하는 점이다.
도리로 얻지 않은 이익은 의미를 가질 수 없다.
이것을 대표적으로 표현하는 말이 유교의 '견리사의(見利思義)'이다.
이 말의 편중된 해석이 유교가 '이익(利)'과 관련된 모든 행위를 경시한다는 잘못된 인식을 심어 주었다.
물론 유교의 의리관(義利觀)에서 '의로움'은 '이로움'보다 높을 뿐만 아니라 중요한 근본이라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그렇다면 유교에서 '의로움(義)'은 항상 귀하기만 하고 '이로움(利)'은 항상 천하기만 한가?
유교에서 '이익은 항상 의로움에 근거해야 한다' '이익이 의로움에 근거하면 항상 참된 가치를 갖는다'는 말의 의미는 '백성들을 위하는 이익이 아닌 위정자 자신만을 위하는 사리사욕(私利私慾)이 우선될 때에 이로움은 어떠한 경우에도 정당화될 수 없다'는 말이다.
이것은 정치에서 위정자의 물질적 이익 추구를 억제하여 백성들의 생존권을 보장하기 위한 방법이었다.
결국 유교는 백성들이나 공동체 전체의 '이로움'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위정자 개인의 '사리사욕'의 추구를 부정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유교의 '이익'에 대한 해석은 후대로 오면서 처음의 목적과는 다르게 유학의 경향이 관념론적 측면에 기울면서,이른바 '중의경리(重義輕利;의는 중요하고 이는 가볍다)' 등의 '의론(義論)'이 나와 재물이나 이익을 천시하는 흐름이 생겨났다.
유학의 이러한 경향은 특히 주자학인 성리학에 이르러 극대화되었는데,성리학을 국가의 통치 이념으로 받아들인 조선 시대에 이러한 경향은 더욱 심화되었다.
⊙ 의리를 빙자한 독단이 조선을 망쳤다
우리나라 의리 사상의 전개 과정에서 선비 정신이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난 때는 조선 시대이다.
조선 왕조가 출범하는 역사적 전환기에 유학자들 중 '상황적 의(義)'를 근거로 혁명의 정당성을 제기한 정도전(鄭道傳)의 입장과 '원리적 의(義)'를 근거로 혁명에 반대한 정몽주(鄭夢周)의 입장으로 양분되었을 때,어느 것이 정당한가 하는 것은 의리의 중대한 문제였다.
조선시대 의리 사상을 특징 짓는 중요한 근거는 세종 시대 이래 '원리적 의리'에 정당성을 부여하고,길재에서 조광조(趙光祖)로 이어지는 사림파를 중심으로 하여 형성되었다.
처음에 사림파는 의리를 이념적 중심으로 지키면서 권력 집단에 비판적이었고 순수한 이상주의적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므로 훈구 세력과 갈등을 일으키면서 권력의 무수한 탄압을 받았으며,이 희생을 대가로 의리 정신이 더욱 심화되어 갔다.
그러나 그 뒤에 사림이 권력을 장악하면서 그 내부에서 의리에 비추어 정권을 비판하는 입장과 정권을 통해 유교 이념을 실현하려는 입장이 분열을 일으키며 당쟁을 야기하였다.
그리고 당쟁을 통한 이러한 의리 논쟁은 '호락 논쟁'과 같은 명분론으로 치우쳐 조선을 허울 뿐인 관념론에 빠지게 하였다.
이렇게 의리와 명분을 중시한 성리학은 임진왜란 이전까지는 설득력을 갖고 있었지만,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더 이상 현실적 지배 이념으로서의 역할을 담당하지 못하게 되었다.
왜냐하면 조선에 있어서 의리 논쟁은 현실적 문제와 시대적 흐름을 외면한 채 사림들의 독선적 명분을 합리화시키기 위한 수단으로 변질되었기 때문이다.
그 결과 실학파의 성장과 함께 의리론의 관념론적인 비현실성이 지적되고 선비의 기능과 역할에 대한 심각한 반성이 생겨났다.
⊙ 이용후생(利用厚生)만이 조선이 살 길이다
이러한 이유로 성리학을 대신하여 구체적인 민생의 고통과 현실의 문제를 해결하고 그들의 의사를 대변하기 위한 실학 사상이 대두된다.
이들은 공통적으로 '이용후생(利用厚生)'을 통하여 현실적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시대의 급선무임을 주장하고,구체적으로 '이용후생'의 실천을 위한 방법들을 제시하였다.
'이용(利用)'이란 백성의 쓰임에 편리한 것으로서 공작 기계나 유통 수단 등을 의미하고,'후생(厚生)'은 의식주(衣食住) 등의 재물을 풍부하게 하여 백성의 삶을 풍요롭게 만드는 것이다.
그러기 위하여 봉건 지배 계급인 선비 계층(士)의 타성적인 계급 의식을 타파하고 공상(工商)으로의 전환을 통해 상업(商)을 중심으로 한 국가 경제 체제를 확립하는 부국을 지향하였다.
그리고 국내의 경제 유통을 위한 도로망 정비 등을 제시하고 국부(國富) 증진을 위한 외국과의 교역을 강조하였다.
또한 사회 개혁과 국민 경제를 통해 부국강병과 이용후생을 실천하기 위해 모든 학문 분야에서 실용적 기술의 습득이 필수적임을 주장하였다.
특히 기술은 역사의 변천에 따라 진보한다는 의식에 따라 청나라의 문물 제도를 통해 서양의 기술을 직접 체험하고 "진실로 백성에게 이롭다면 비록 그 법이 이적(夷狄;고대 중국인이 주변의 여러 민족을 비하하여 부른 명칭)에서 나온 것일지라도 성인이 그것을 선택할 것"이라며,주자학적 명분론에서 탈피하여 중국과 서양의 선진적 기술에 대한 적극적인 수용 자세를 보였다.
왜냐하면 이들은 당시의 관념론적 모화론자(慕華論者;명나라를 그리워함)들과는 달리 객관적으로 현실에 대한 문제 의식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문제 의식을 가지고 관념론과 명분론에 빠져 국익 증진과 민생의 고통이라는 현실적 문제를 외면하고 있던 당시 조선 사회에 대한 개혁을 추진하고자 하였다.
⊙ 맹자! 북학파를 지지하다
전국(戰國)의 혼란 상황 속에서 극도로 궁핍한 생활고와 도덕적 타락에 빠져 있던 백성들의 생존권 보장을 가장 급선무로 여겼던 맹자는 백성들의 최저생활 보장을 위해 항산 정책(恒産政策)을 제시한다.
백성이 살아가는 데 있어 일정한 생업이 없으면 도덕 의식도 없다.
따라서 방종하고 편벽한 생활로 인해 사회 질서가 교란된다고 본 맹자는 물질 조건이 인간에게 미치는 영향을 정확히 인식하였다.
그러므로 위정자가 일반 백성들의 일정한 생업 보장을 위해 사회간접자본에 대한 투자나 교육 투자,농지독점 방지책 등에 온 힘을 기울여야만 한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농업만을 항구적인 직업으로 인정하지 않고 상업이나 공업 또는 선비(士)도 하나의 전문직업 계층으로 정착시켜 각자의 일에 안심하고 종사하게 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결국 맹자의 항산 정책의 실현 형태는 모든 백성이 일정한 직업이 있어서 가족 내에서 의식주의 기본 생활문제를 해결하고,생활 수준은 당시의 문화 생활을 누릴 수 있을 정도의 수입을 보장할 수 있는 것이었다.
이러한 맹자의 생각은 주자학적 관념론에서 벗어나 "진실로 백성에게 이롭다면 비록 그 법이 이적에서 나온 것일지라도 성인이 그것을 선택할 것"이라며,사회적 생산성 향상을 통해 백성들의 기본적 생활을 보장하는 것을 국가의 중요한 역할로 보고 있는 북학파의 입장과 그 맥을 같이한다고 볼 수 있다.
결국 맹자나 북학파 모두 백성들에게 실질적 도움이 되는 경제적 '이로움'의 중요성을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 맹자와 북학파에 대한 평가
조선에서 갈등이 야기되었던 원인은 '의(義)'와 '이(利)'에 대한 우선 순위와 이에 따른 가치 판단의 문제 때문이었다.
조선의 성리학은 처음 유학의 목적과는 다르게 유학의 경향이 주자학적 관념론에 기울면서 지나치게 의리론에만 집착하여 관념론으로 빠져들었다.
그 결과 물질적 이로움과 관련된 실용적인 것을 천시하면서 백성들이 당면하고 있는 현실적인 문제를 외면하게 되었다.
그러나 의로움을 중시하는 가치관이 확립되기 위해서는 물질적 가치가 적당하게 충족되어야 한다.
즉 '의(義)'를 이루기 위한 선결 조건이 '이(利)'이다.
이런 면에서 볼 때 맹자의 항산 정책이나 북학파의 이용후생 사상은 주자학적 명분에 집착하는 위정자들의 허울 뿐인 관념론에서 벗어나 백성을 중심에 두고 경세제민을 통해 백성들의 삶을 풍요롭고 바람직하게 만드는 유교적 이상주의 실현에 대한 실천적이고 실질적 노력으로 평가받을 수 있다.
서울 한성고 교사 cyjin@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