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지》의 작가 박경리씨가 그의 영원한 '안식처' 토지로 돌아갔다.

지난해 폐암선고를 받고 투병해오다 갑작스레 병세가 악화돼 입원치료를 받다 지난 5일 끝내 숨을 거뒀다.

박씨는 한국사회 격랑기 한가운데서 갖은 시련과 역경을 딛고 한국 문학사에 길이 남을 대하 장편소설 《토지》를 탄생시켰다.

굴곡 많았던 고인의 82년간의 인생 행로와 작품 세계를 되짚어 보자.

[Focus] 박경리, 토지의 품에 잠들다
25년만에 탈고한 대하소설 '토지'


원고지 3만1200장…등장인물만 578명

한국 대하소설의 거봉으로 평가받는 《토지》(전21권, 나남출판)가 완성되기까지는 무려 25년의 세월이 걸렸다.

고(故) 박경리씨가 1969년 9월 <현대문학>에 첫 회를 연재한 이 소설은 1897년 하동 평사리에서 시작해 서울,만주,일본을 거쳐 다시 평사리 섬진강가로 돌아온다.

최참판댁 손녀 서희가 역사의 소용돌이를 따라 하동에서 하얼빈까지 떠돌다 고향으로 돌아와 해방을 맞는 것이 큰 줄거리.

작품 속에는 동학농민전쟁,을사보호조약,청일전쟁,1902년 7월 전국에 번졌던 콜레라,1909년 간도협약,일제의 토지조사사업,백정들의 신분해방운동인 1923년 형평사 운동,1937년 만주사변 등 역사적 사건이 등장한다.

등장인물들이 모두 허구라는 점에서 실존인물을 소재로 삼아온 기존 역사소설과 다르다.

오로지 작가의 상상력으로 우리 민족의 고난을 형상화했다는 점에서 새로운 역사소설 시대를 열었다.

또 인물이나 사건을 하나의 주제에 종속시키는 서구의 소설 이론을 따르지 않는 새로운 창작실험작으로 평가받는다.

문학평론가 정현기 전 연세대 국문학과 교수는 판소리처럼 이야기의 중간에 이런저런 작은 이야기들을 마디처럼 삽입한 것을 놓고 《토지》의 창작방식을 '마디 이론'으로 설명하기도 했다.

이상진 방송통신대 국문학과 교수는 "이름을 가진 인물만 해도 578명이나 등장하는《토지》에 주인공이 따로 없다는 것에 많은 연구자들이 공감한다"면서 "작품의 주인공은 서희만이 아니라 수많은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등장인물 모두이며,이 때문에 이야기가 하나의 중심으로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실핏줄처럼 퍼져나가는 독특한 소설"이라고 말했다.

인간의 욕망과 사랑,일본 제국주의 등 물신주의에 대한 저항,생명사상 등 이 작품의 풍부한 내용 때문에 KBS와 SBS가 세 차례에 걸쳐 TV드라마로 제작했고,1974년 김수용 감독이 영화로도 만들었다.

1995년 광복 50주년 기념 서사음악극으로 세종문화회관 무대에 올려졌으며,청소년판과 만화로도 출간됐다.

하동 평사리 드라마 촬영 세트장은 관광명소로 각광받고 있으며,평사리에서는 해마다 문학제가 열리고 있다.

박신영 한국경제신문 기자 nyuso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