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물유전학에 물음을 던진 물리학자의 모험

[고전속 제시문 100선] (86) 에르빈 슈뢰딩거 '생명이란 무엇인가'
애덤 스미스가 말한 노동 분업의 원리는 학문 세계에서도 그대로 통용된다.

한 분야의 전문가는 그의 학문 영역에만 집중하고,다른 전문가의 노작(勞作)은 이견 없이 그대로 존중하는 것이 일반 원칙이다.

심지어 프랜시스 베이컨은 체계적인 분업을 통해 학문을 발전시켜야 한다고 열변을 토하기까지 했다.

베이컨의 주장을 무시하고 싶더라도,근대 이후로 심화된 학문의 복잡성과 전문성은 르네상스 시대의 이상형인 전인적 인간의 출현을 불가능하게 만들고 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수백년 후인 지금에 태어났더라도 다재다능한 천재였을지 살짝 의문이 든다.

현대에는 협소한 한 분야의 전문가로 발돋움하기도 힘겨운 실정이다.

그런데 조지프 테인터가 '문명의 붕괴'에서 정리한 것처럼,지금까지 등장했던 무수한 문명이 사라지게 된 원인이 '복잡성과 한계수익 체감의 원리'라면,현대 사회의 복잡성은 뭔가 답답한 전망을 가지게끔 한다.

그러나 이 와중에 다음과 같은 서문으로 시작하는 책이 있다.

"과학자는 한 분야에 대해 완벽하고 철저한 지식을 가진 사람이고,따라서 자신이 정통하지 않은 분야에 대해서는 글을 쓰지 않는다고 사람들은 흔히 생각한다.

그것은 일종의 '노블레스 오블리주'로 여겨진다.

나는 이 책을 위해 내가 가지고 있을지도 모르는 고귀한 지위(노블레스)를 기꺼이 포기하고 그에 따른 의무(오블리주)에서 벗어날 수 있기를 바란다.

나의 변론은 이러하다.

우리는 통일적이고 포괄적인 앎을 향한 강한 열망을 조상들로부터 물려받았다.

최고 교육기관인 대학의 명칭,유니버시티(university)라는 말 자체가 고대로부터 수많은 세기에 걸쳐 오직 포괄성을 가진 지식만이 완전한 신뢰를 받을 수 있었음을 우리에게 일깨워준다.

그러나 지난 100년 정도의 기간에 다양한 지식 분야들이 양과 질 모든 측면에서 성장하면서 우리는 이상한 딜레마에 빠지게 되었다.

이제야 비로소 모든 지식을 하나의 전체로 짜맞출 준비가 되었다고 우리는 분명히 느낀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한 개인의 정신이 작은 전문 분야 이상의 지식에 정통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 되었다.

이 딜레마를 벗어나는 유일한 길은 누군가 과감하게 오류를 범할 위험을 감수하고 사실들과 이론들을 종합하는 시도를 감행하는 것뿐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바로 이것이 나의 변론이다."

한없이 축소 지향적인 현대에 맞서 폭 넓은 사고를 지향하자는 선전포고를 한 이 용감한 글은 에르빈 슈뢰딩거가 저술한 '생명이란 무엇인가'의 서문이다.

슈뢰딩거는 노벨물리학상을 수상한 이론물리학자로서,파동이론으로 하이젠베르크와 어깨를 나란히 하며 양자역학을 공고히 쌓아 올렸다.

'생명이란 무엇인가'는 슈뢰딩거가 더블린 고등학술연구소의 후원으로 1943년 아일랜드 더블린 트리니티 칼리지에서 일반 대중을 대상으로 행한 강연을 기초로 하여 1944년 발간된 책인데,슈뢰딩거는 '포괄적인 앎'을 향해 그의 전문 학문인 물리학에서 벗어나 다른 영역에 용감히 발을 내딛는 모험을 한다.

물리학자인 그가 감히 생물유전학을 논한 것이다.

슈뢰딩거는 생명 현상 역시도 물리법칙으로 설명할 수 있다는 신념 아래,당시 이질적이기만 했던 '생명'과 '분자'를 함께 묶어 생명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그의 해답을 내놓는다.

총 일곱 장(1장:주제에 대한 고전물리학자의 접근,2장:유전 메커니즘,3장:돌연변이, 4장:양자역학적 증거,5장:델브뤼크 모델에 대한 논의와 검증,6장:질서,무질서 그리고 엔트로피,7장:생명은 물리학 법칙들에 기반을 두는가)으로 구성되어 있는 이 책에서 슈뢰딩거가 감행한 모험은 실제로 이후 DNA의 발견과 그에 따른 분자생물학 탄생에 결정적인 공헌을 한다.

많은 생물학자들이 슈뢰딩거가 이 책에서 보여준 폭넓은 사고에서 많은 영향을 받아 분자생물학의 뛰어난 업적을 이룰 수 있었다.

물론 이 책 안에는 오늘날 되돌아 볼 때 잘못된 내용들도 많다.

인간의 염색체가 48개라고 말한 내용이라든가,유전자는 단백질일 것이라고 추측한 오류가 대표적이다.

하지만 생명에 관한 근원적 질문,생명현상에 대한 탐구에 있어서 '생명이란 무엇인가'가 우리에게 일깨우는 근본적인 성찰은 언제나 유효하다.

⊙ 원문 읽기

크고 중요하며 아주 많이 논의된 다음과 같은 질문이 있다.

살아있는 유기체의 공간적 경계 안에서 일어나는 시간과 공간 속의 사건들을 물리학과 화학으로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이 작은 책이 설명하고 확립하고자 하는 대답을 이렇게 요약할 수 있다.

현재의 물리학과 화학이 그 사건들을 설명하지 못한다는 사실은 그 과학들이 언젠가 그 사건들을 설명하리라는 점을 의심할 이유가 전혀 될 수 없다.

(중략)

지난 30년 또는 40년 동안 생물학자들(주로 유전학자들)이 이룬 천재적인 업적 덕분에 오늘날 우리는 유기체의 물질적인 구조와 기능에 대해 충분히 많은 것을 알게 되었으나,그 앎을 토대로 현재의 물리학과 화학이 살아 있는 유기체 내부의 시간과 공간 속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설명할 수 없다는 사실을,그리고 그 정확한 이유를 말할 수 있다.

유기체의 가장 핵심적인 부분에 있는 원자들의 배열과 그 배열들의 상호작용은 지금까지 물리학자와 화학자가 실험적 이론적 연구 대상으로 삼았던 원자들의 배열과 근본적으로 다르다.

해석

슈뢰딩거는 살아 있는 유기체의 공간적 경계 안에서 일어나는 시간과 공간 속의 사건들을 물리학과 화학으로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를 고민한다.

일단 슈뢰딩거는 통계물리학과 양자물리학을 사용하여 명확하고 간결하게 개념 정리를 한 다음 논의를 전개한다.

열 운동을 하는 개별 입자들의 운동방향은 전적으로 예측 불가능하므로 원자의 행동은 오직 통계적·확률적으로만 해석이 가능하다는 양자 역학적인 관점에서 슈뢰딩거는 생명의 유전법칙에 접근한다.

그는 생명현상의 영속성은 통계적 법칙이 아니라 양자물리학의 법칙에 의한다고 주장한다.

유전자라는 원자 집단이 어떻게 무작위적인 열 운동을 하지 않고 엄밀한 법칙성을 따를 수 있는지를 탐구하면서 '생명이란 무엇인가'는 그 탐색의 노정이 시작된다.

슈뢰딩거는 그가 스스로 제기한 질문에 물리학자들이 여태까지 발견하지 못한 어떠한 새로운 법칙이 생명현상을 지배하고 있다고 자답하면서,'유전자는 왜 변하지 않는가' '유전자는 어떻게 복제될 수 있는가' '생명체는 어떻게 그 자체가 붕괴되려는 경향에 맞서는가' '의식과 자유의지의 본질은 무엇인가' 등 과학적이면서도 철학적인 물음과 사유로써 글을 풀어간다.

⊙ 원문 읽기

유전적 특성들은 얼마나 영속적일까?

그리고 우리는 그렇게 영속적인 특성을 담고 있는 물질에 대해 어떤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

사실 특별한 연구 없이도 이 질문에 답할 수 있다.

우리가 유전적 특성을 이야기한다는 사실 자체가 이미 그것의 영속성이 거의 절대적임을 보여준다.

우리는 부모에게서 자식에게로 전달되는 것이 매부리코,짧은 손가락,류머티즘 소질,혈우병,2색성 색맹 같은 이런저런 특이성들 뿐만이 아님을 잊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유전법칙 연구를 위해 이런 특이성들을 쉽게 선전할 수 있다.

그러나 실제로 (수만년 동안은 아닐지라도) 수백년 동안 여러 세대에 걸쳐 큰 변화 없이 재생산되며,세대가 바뀔 때마다 서로 융합하여 수정란을 형성하는 두 세포 핵의 물질적인 구조에 의해 전달되어 탄생하는 것은 개체의 가시적이고 분명한 성질 전체,즉 '표현형'의 패턴 전체이다.

이것은 기적이다.

이보다 더 큰 기적은 하나뿐이다.

그 기적은 이것과 밀접하게 연관되지만 다른 차원에 있다.

그 기적은 자신의 존재 전체 기반을 바로 이런 종류의 기적적인 상호작용에 둔 우리가 그 상호작용에 대해 상당한 지식을 확보할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나는 그 지식이 그 첫 번째 기적을 거의 완전히 이해하는 수준까지 발전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두 번째 기적은 아마도 인간의 이해 능력 밖에 있을 것이다.

해석

슈뢰딩거가 '생명이란 무엇인가'에서 감행한 모험의 의의는 단순히 물리학자가 생물유전학을 논했다는 데에만 있지는 않다.

'생명이란 무엇인가'는 제목 그대로 생명의 신비를 둘러싼 수많은 의문과 고민에 대해 논하는 책이다.

그래서 물리학과 생물학의 경계를 뛰어넘는 과단성을 지나,인문 철학적인 사변으로 글은 점점 넓어진다.

슈뢰딩거는 두 가지 기적을 말한다.

첫 번째 기적은 물질과 생명의 연관관계를 통해 물질과 생명이 통합된다는 것이고,두 번째 기적은 자신의 존재 전체 기반을 바로 이런 종류의 기적적인 상호작용에 둔 우리가 그 상호작용에 대해 상당한 지식을 확보할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슈뢰딩거는 생명에 양자물리학이라는 메스를 대면서도 생명의 신비에 감탄한다.

그래서 '생명이란 무엇인가'의 후기 부분에서는 생명 문제를 넘어 물질과 정신의 관계에 대해 철학적으로 논하며 글을 마무리한다.

이는 그가 집필한 '정신과 물질'의 기초적인 뼈대가 되는 내용이기도 하다.

고전의 가치를 사실적 정확성에서만 찾는다면 '생명이란 무엇인가'는 고전이라고 평가하기가 조금 곤란할 수도 있다.

그러나 65년 전의 사실적 오류를 떠나,통합적 지혜에 대한 인간의 열망과 그를 위한 용기 있는 접근,근원적 본질에 대한 성찰이 고전의 조건이라면 '생명이란 무엇인가'는 자연과학의 대표적인 고전이다.

'전문 영역'이라는 한계 안에 갇히지 않고 생명의 신비를 통찰하는 슈뢰딩거의 저작은 무류성 시비를 떠나 절대적인 가치를 지닌다.

슈뢰딩거의 강연이 있은 지 50년 후인 1993년 9월 로저 펜로즈,스티븐 제임스 굴드,제러드 다이아몬드 등 세계적인 석학들이 같은 장소에 모여 '슈뢰딩거의 주장은 과연 옳았는가'에 대해 길고 진지한 논쟁을 벌였다.

그 논의의 결과로서 '생명이란 무엇인가,그 후 50년'이란 책이 발간되는데,슈뢰딩거가 남긴 성찰의 족적이 얼마나 큰지를 잘 느낄 수 있는 대목이다.

앞으로도 '생명이란 무엇인가'처럼 틀을 벗어난 과감한 논의가 계속 이어져야 우리는 복잡성의 그물에 걸려 퇴보하지 않고 거듭 발전해나갈 수 있을 것이다.

홍보람 s논술 선임연구원 nikehbr@nonsu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