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명분론에 가로막힌 아들의 개혁 노선
⊙ 소현세자는 변절자가 아니다
소현세자(昭顯世子·1612~1645)는 조선 16대 왕인 인조(仁祖)의 장남이며 17대 임금인 효종의 형이다.
인조는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을 통해 광해군(光海君)을 축출하고 왕위에 올랐다.
광해군은 국익 차원에서 중립외교정책을 폈으나 인조는 '친명배금정책(親明排金政策)'을 내걸었고 병자호란의 결과를 초래했다.
후금족이 국호를 청으로 개칭하고 1636년 10만 대군을 이끌고 조선을 침략하였다.
이들은 압록강을 넘은 지 14일 만에 도성에 다다랐고 조선은 명나라의 원군을 기다렸으나 명나라는 국세가 쇠약해져 조선에 관심을 가질 수 없었다.
인조는 더 이상 저항할 수 없게 되자 1637년 1월 최명길 등 주화파의 의견을 따라 삼전도에서 청 태종에게 치욕적인 항복을 하게 된다.
그 결과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이 청나라에 인질로 끌려가게 되었고, 강경 척화파였던 윤집 오달제 홍익환 등은 처형되었다.
그 외에도 50여만명이 포로로 잡혀갔다.
소현세자는 청에 머물면서 청과 조선이 처한 객관적 현실, 국제관계의 역학 구조, 조선의 생존전략 등에 대한 객관적 인식을 하게 되었다.
또한 청이 주도하는 동아시아 질서 속에 편입된 조선이 청나라를 이길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청과 대결한다는 것은 조선에 이롭지 못하다는 현실을 인식하게 된다.
이처럼 소현세자는 청나라에 머물면서 새로운 문물을 익히며 양국 간의 갈등 요소를 해결하려는 노력을 하게 되지만 정작 조선으로부터는 오해를 받기 시작하였다.
왜냐하면 청과 조선을 중재하려는 세자의 노력이 삼전도의 치욕을 잊고 친청(親淸)주의자로 변절된 것으로 비쳐졌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번 주제는 이러한 외교적 인식의 차이에서 시작된 인조와 소현세자 간의 갈등을 노론들 사이에서 벌어졌던 '호락논쟁(湖洛論爭)'과 관련하여 살펴보도록 하자.
⊙ 청과의 외교는 오랑캐에 대한 굴복인가?
정묘·병자 양 호란은 조선 후기 사회에 커다란 충격을 안겨주었고,이는 그동안 조선을 구성해오고 운영해오던 성리학적 세계관에 대한 충격으로 볼 수 있다.
그간 조선은 소중화(小中華)를 자처해오며 오랑캐를 멀리하는 '화이론(華夷論·중국을 존중하고 오랑캐를 물리침)'적 세계관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는 양 호란에서 무참히 패배하며, 삼전도에서 인조가 굴욕을 당하는 순간 최고조에 이른다.
이런 상황 속에서 북벌론의 등장은 당연한 것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청이 명을 멸하고 중원의 패권을 잡게 되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중화의 저항세력과 힘을 합쳐 청을 치려던 북벌론은 현실적으로 설득력을 잃어갈 수밖에 없었다.
북벌론이 이렇게 실현 불가능해지자,북벌론은 애초의 명분론적인 모습보다는 왕실의 실추된 명예 회복과 내부 단속을 통한 왕권 강화라는 실리적인 모습으로 바뀌어갔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에서 소현세자와 같이 청에 대한 시각의 변화,즉 종래 화이관(華夷觀)의 변화 및 새로운 세상을 위한 대안의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이에 따라 여러 사건들의 대립 속에서 조정과 각 학파는 정치적, 사상적 입장 차이로 의견이 갈리기 시작하였다.
그 대표적인 것이 '호락논쟁'이다.
⊙ 조선의 관념론적 '호락논쟁'
조선 후기 노론(老論) 계통의 학자들 사이에서 최대의 관심사는 사람과 사물의 본성이 같은가,다른가를 놓고 벌어졌던 인물성동이론(人物性同異論)에 관한 논쟁이다.
'사람과 사물의 본성이 다르다'는 입장을 취했던 '인물성이론(人物性異論)'을 주장한 견해에 동조하는 학자들은 주로 호서(湖西:지금의 충청도 일대)지방에 거주하였고,'사람과 사물의 본성이 같다'는 입장을 취한 '인물성동론(人物性同論)'을 주장한 학자들은 주로 낙하(洛下:지금의 서울 일대)지방에서 거주하였다.
그러므로 그들 간에 전개된 '인물성동이론'을 거주지를 중심으로 하여 지칭한 것이 호론과 낙론 사이에서 벌어진 '호락논쟁'이었다.
이러한 호락논쟁(인물성동이론)에서 '인물성동론'은 인간과 사물은 똑같이 본연지성으로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이라는 오상(五常)을 타고 태어났으나 사물은 그 기질 때문에 타고난 본성을 온전히 발휘하지 못할 뿐이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인간과 사물에 있어서 기질의 차이는 있어도 그 본성의 차이는 있을 수 없다는 입장을 취한다.
반면에 '인물성이론'은 사물은 타고난 '기(氣)'가 불완전하므로 부여받은 '이(理)'도 치우쳐 불완전할 수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즉 인간과 사물은 그 기질적 차이로 인해 본성 자체도 동일한 '이'가 아닌 서로 다른 '이'를 부여받았기 때문에 사람과 사물의 본성은 같을 수가 없다는 논리를 주장한다.
결국 '인물성동론'은 인간과 사물에 있어서 기질의 차이는 인정하되 본성의 차이는 인정하지 않는다.
반면에 '인물성이론'은 인간과 사물의 기질의 차이로 인해 본성의 차이가 생겨난다고 주장한다.
⊙ 중화와 오랑캐의 기준은 무엇인가?
이러한 호락논쟁은 '성범심동이(聖凡心同異:성인과 일반인의 본성은 같은가 다른가)' 논쟁으로 이어져 청나라를 건국한 만주족을 중화로 인정해야 하는가의 문제로 확대된다.
'인물성동론' 입장에서는 마음의 본체를 '명덕(明德)'이라고 보고,명덕은 인간이면 성인과 일반인을 막론하고 누구나 갖는다고 주장하였다.
그런 까닭에 명덕을 지니는 인간의 마음은 한결같이 동일하고 선(善)한 것이다.
다만 일반인은 그 기질이 좋지 못하기 때문에 성인과 차이가 발생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인물성동론'은 '성범심동론'으로 이어져 성인과 범부(일반인)의 본성을 동일하게 해석한다.
이에 반하여 '인물성이론' 입장에서는 마음이 비록 명덕과 같은 본질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그 본바탕이 '기'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그 기질이 가진 청탁(淸濁:맑고 흐림)의 차이를 고려하여 선악의 가능성을 인정한다.
즉,성인은 '청(淸)'한 기질을 가져 항상 선의 본질을 유지하나,일반인의 마음은 기질이 '탁(濁)'하여 선행으로 발휘되지 못한다고 주장하였다.
따라서 성인과 범부의 본성 또한 같은 '이'가 아닌 서로 다른 '이'를 부여받았다는 것이다.
결국 '인물성이론'은 인성과 물성은 기질의 차이에 있어서 다르기 때문에 성인과 범부(일반인) 또한 그 본성부터 같을 수가 없다는 '성범심이론'의 입장으로 이어진다.
따라서 당시 인조와 같이 청의 존재를 여전히 오랑캐로 한정하고 윤리와 도덕적 의식을 강조하는 성리학적 세계관을 고수하는 명분론적 입장을 가지게 되었다.
반면에 '성범심동론'으로 이어진 '인물성동론'은 인성과 물성,성인과 범인(일반인)의 본성은 다르지 않으며,다만 기질적 차이에 의해 성인과 범인을 구별하기 때문에 범인도 기질의 개선을 통해 성인이 될 수 있음을 밝혔다.
이러한 논리는 양 호란 이후 청을 중화(中華)로서 인정하자는 입장으로 이어진다.
따라서 소현세자는 당시의 청에 의한 새로운 질서의 개편 속에서 조선이 현실적이고 탄력적인 가치관으로의 전환을 통해 새로운 활로를 모색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된다.
또한 인성(人性)과 물성(物性)이 다르지 않기 때문에 윤리(倫理)와 물리(物理)가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 소현세자의 입장은 객관적이고 상대적인 세계관을 형성하는 데 기여하여, 이른바 북학파를 비롯한 실학사상에도 영향을 주었다.
⊙ 개혁 꿈꾸었던 비운의 왕자, 소현세자!
명(明)나라를 멸망시킨 청은 소현세자를 더 이상 인질로 잡고 있어야 할 이유가 없었으므로 귀국을 결정하였다.
1644년 11월26일 소현세자는 귀국길에 올랐고 이듬해 2월18일에는 조선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인조에게 있어서 세자는 타국에서 고생하고 돌아온 귀한 아들이 아니라, 자신의 반청(反淸)노선에 반기를 든 정적(政敵)이었고 오랑캐의 나라와 내통한 반역자였다.
인조와 소현세자 사이의 부자 간 갈등은 소현세자의 귀국을 통하여 현실화되었고, 드디어 세자가 가지고 온 천주교 서적과 서양 과학서적을 문제 삼기에 이르렀다.
결국 분노를 삭이지 못한 인조가 벼루를 들어 세자의 얼굴을 내리치는 사건까지 발생했다.
이 일이 있은 후 소현세자는 가슴앓이를 하다가 몸져눕게 되었는데 발병일은 1645년 4월23일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3일 후인 4월26일 의문의 죽음을 맞았다.
향년 34세, 그가 귀국한 지 겨우 70여일이 지났을 때였다.
이러한 인조와 소현세자의 비극적 갈등의 원인은 '인물성동이론'에 따른 '성범심동이론'의 관점 차이로 이해할 수 있다.
인조의 친명배금정책은 '호론'의 '인물성이론'이나 '성범심이론'과 그 맥을 같이하여 인성과 물성은 다르기 때문에 범인(일반인)이 쉽게 성인이 될 수 없다.
즉,성인과 범인의 차를 엄격히 구별함으로써 청에 대한 관점을 기존의 화이관(華夷觀)에 따라 분명히 하였다.
따라서 청과 조선의 관계를 오랑캐와 소중화로 분명히 규정하여 북벌론의 정당성과 이에 따른 추진을 역설하였다.
반면에 소현세자는 '낙론'의 입장인 '인물성동론'과 '성범심동론'에 따라 인성과 물성, 성인과 범인은 다르지 않으며 다만 기질의 차이가 성인과 범인을 구별하기 때문에 범인(일반인)도 기질의 개선을 통해 성인이 될 수 있음을 주장하였다.
그러므로 양 호란 이후 청을 중화로서 인정하고, 청에 의한 새로운 질서의 개편 속에서 보다 능동적이고 탄력적인 외교정책을 추진하려고 노력하였다.
이렇게 청에 대한 서로 다른 인식의 차이가 결국 부자 간의 갈등을 야기시키는 결정적 원인이 되었다.
결과적으로 볼 때 인조의 '성범심이론'의 입장은 조선과 본인에게 굴욕을 안겨주었던 청을 끝까지 오랑캐로 규정하는 명분에 집착하여 시대에 맞지 않은 구질서에 따른 명분 위주의 외교정책으로 국력의 손실과 민생의 고통을 가져왔다.
반면에 소현세자의 '성범심동론'적 입장은 기존의 명나라 중심의 중화주의에 집착하던 조선의 주관적이고 편협한 세계관을 객관화, 상대화하여 근대적 사회질서로 전환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서울 한성고 교사 cyjin@hanmail.net
⊙ 소현세자는 변절자가 아니다
소현세자(昭顯世子·1612~1645)는 조선 16대 왕인 인조(仁祖)의 장남이며 17대 임금인 효종의 형이다.
인조는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을 통해 광해군(光海君)을 축출하고 왕위에 올랐다.
광해군은 국익 차원에서 중립외교정책을 폈으나 인조는 '친명배금정책(親明排金政策)'을 내걸었고 병자호란의 결과를 초래했다.
후금족이 국호를 청으로 개칭하고 1636년 10만 대군을 이끌고 조선을 침략하였다.
이들은 압록강을 넘은 지 14일 만에 도성에 다다랐고 조선은 명나라의 원군을 기다렸으나 명나라는 국세가 쇠약해져 조선에 관심을 가질 수 없었다.
인조는 더 이상 저항할 수 없게 되자 1637년 1월 최명길 등 주화파의 의견을 따라 삼전도에서 청 태종에게 치욕적인 항복을 하게 된다.
그 결과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이 청나라에 인질로 끌려가게 되었고, 강경 척화파였던 윤집 오달제 홍익환 등은 처형되었다.
그 외에도 50여만명이 포로로 잡혀갔다.
소현세자는 청에 머물면서 청과 조선이 처한 객관적 현실, 국제관계의 역학 구조, 조선의 생존전략 등에 대한 객관적 인식을 하게 되었다.
또한 청이 주도하는 동아시아 질서 속에 편입된 조선이 청나라를 이길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청과 대결한다는 것은 조선에 이롭지 못하다는 현실을 인식하게 된다.
이처럼 소현세자는 청나라에 머물면서 새로운 문물을 익히며 양국 간의 갈등 요소를 해결하려는 노력을 하게 되지만 정작 조선으로부터는 오해를 받기 시작하였다.
왜냐하면 청과 조선을 중재하려는 세자의 노력이 삼전도의 치욕을 잊고 친청(親淸)주의자로 변절된 것으로 비쳐졌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번 주제는 이러한 외교적 인식의 차이에서 시작된 인조와 소현세자 간의 갈등을 노론들 사이에서 벌어졌던 '호락논쟁(湖洛論爭)'과 관련하여 살펴보도록 하자.
⊙ 청과의 외교는 오랑캐에 대한 굴복인가?
정묘·병자 양 호란은 조선 후기 사회에 커다란 충격을 안겨주었고,이는 그동안 조선을 구성해오고 운영해오던 성리학적 세계관에 대한 충격으로 볼 수 있다.
그간 조선은 소중화(小中華)를 자처해오며 오랑캐를 멀리하는 '화이론(華夷論·중국을 존중하고 오랑캐를 물리침)'적 세계관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는 양 호란에서 무참히 패배하며, 삼전도에서 인조가 굴욕을 당하는 순간 최고조에 이른다.
이런 상황 속에서 북벌론의 등장은 당연한 것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청이 명을 멸하고 중원의 패권을 잡게 되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중화의 저항세력과 힘을 합쳐 청을 치려던 북벌론은 현실적으로 설득력을 잃어갈 수밖에 없었다.
북벌론이 이렇게 실현 불가능해지자,북벌론은 애초의 명분론적인 모습보다는 왕실의 실추된 명예 회복과 내부 단속을 통한 왕권 강화라는 실리적인 모습으로 바뀌어갔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에서 소현세자와 같이 청에 대한 시각의 변화,즉 종래 화이관(華夷觀)의 변화 및 새로운 세상을 위한 대안의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이에 따라 여러 사건들의 대립 속에서 조정과 각 학파는 정치적, 사상적 입장 차이로 의견이 갈리기 시작하였다.
그 대표적인 것이 '호락논쟁'이다.
⊙ 조선의 관념론적 '호락논쟁'
조선 후기 노론(老論) 계통의 학자들 사이에서 최대의 관심사는 사람과 사물의 본성이 같은가,다른가를 놓고 벌어졌던 인물성동이론(人物性同異論)에 관한 논쟁이다.
'사람과 사물의 본성이 다르다'는 입장을 취했던 '인물성이론(人物性異論)'을 주장한 견해에 동조하는 학자들은 주로 호서(湖西:지금의 충청도 일대)지방에 거주하였고,'사람과 사물의 본성이 같다'는 입장을 취한 '인물성동론(人物性同論)'을 주장한 학자들은 주로 낙하(洛下:지금의 서울 일대)지방에서 거주하였다.
그러므로 그들 간에 전개된 '인물성동이론'을 거주지를 중심으로 하여 지칭한 것이 호론과 낙론 사이에서 벌어진 '호락논쟁'이었다.
이러한 호락논쟁(인물성동이론)에서 '인물성동론'은 인간과 사물은 똑같이 본연지성으로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이라는 오상(五常)을 타고 태어났으나 사물은 그 기질 때문에 타고난 본성을 온전히 발휘하지 못할 뿐이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인간과 사물에 있어서 기질의 차이는 있어도 그 본성의 차이는 있을 수 없다는 입장을 취한다.
반면에 '인물성이론'은 사물은 타고난 '기(氣)'가 불완전하므로 부여받은 '이(理)'도 치우쳐 불완전할 수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즉 인간과 사물은 그 기질적 차이로 인해 본성 자체도 동일한 '이'가 아닌 서로 다른 '이'를 부여받았기 때문에 사람과 사물의 본성은 같을 수가 없다는 논리를 주장한다.
결국 '인물성동론'은 인간과 사물에 있어서 기질의 차이는 인정하되 본성의 차이는 인정하지 않는다.
반면에 '인물성이론'은 인간과 사물의 기질의 차이로 인해 본성의 차이가 생겨난다고 주장한다.
⊙ 중화와 오랑캐의 기준은 무엇인가?
이러한 호락논쟁은 '성범심동이(聖凡心同異:성인과 일반인의 본성은 같은가 다른가)' 논쟁으로 이어져 청나라를 건국한 만주족을 중화로 인정해야 하는가의 문제로 확대된다.
'인물성동론' 입장에서는 마음의 본체를 '명덕(明德)'이라고 보고,명덕은 인간이면 성인과 일반인을 막론하고 누구나 갖는다고 주장하였다.
그런 까닭에 명덕을 지니는 인간의 마음은 한결같이 동일하고 선(善)한 것이다.
다만 일반인은 그 기질이 좋지 못하기 때문에 성인과 차이가 발생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인물성동론'은 '성범심동론'으로 이어져 성인과 범부(일반인)의 본성을 동일하게 해석한다.
이에 반하여 '인물성이론' 입장에서는 마음이 비록 명덕과 같은 본질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그 본바탕이 '기'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그 기질이 가진 청탁(淸濁:맑고 흐림)의 차이를 고려하여 선악의 가능성을 인정한다.
즉,성인은 '청(淸)'한 기질을 가져 항상 선의 본질을 유지하나,일반인의 마음은 기질이 '탁(濁)'하여 선행으로 발휘되지 못한다고 주장하였다.
따라서 성인과 범부의 본성 또한 같은 '이'가 아닌 서로 다른 '이'를 부여받았다는 것이다.
결국 '인물성이론'은 인성과 물성은 기질의 차이에 있어서 다르기 때문에 성인과 범부(일반인) 또한 그 본성부터 같을 수가 없다는 '성범심이론'의 입장으로 이어진다.
따라서 당시 인조와 같이 청의 존재를 여전히 오랑캐로 한정하고 윤리와 도덕적 의식을 강조하는 성리학적 세계관을 고수하는 명분론적 입장을 가지게 되었다.
반면에 '성범심동론'으로 이어진 '인물성동론'은 인성과 물성,성인과 범인(일반인)의 본성은 다르지 않으며,다만 기질적 차이에 의해 성인과 범인을 구별하기 때문에 범인도 기질의 개선을 통해 성인이 될 수 있음을 밝혔다.
이러한 논리는 양 호란 이후 청을 중화(中華)로서 인정하자는 입장으로 이어진다.
따라서 소현세자는 당시의 청에 의한 새로운 질서의 개편 속에서 조선이 현실적이고 탄력적인 가치관으로의 전환을 통해 새로운 활로를 모색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된다.
또한 인성(人性)과 물성(物性)이 다르지 않기 때문에 윤리(倫理)와 물리(物理)가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 소현세자의 입장은 객관적이고 상대적인 세계관을 형성하는 데 기여하여, 이른바 북학파를 비롯한 실학사상에도 영향을 주었다.
⊙ 개혁 꿈꾸었던 비운의 왕자, 소현세자!
명(明)나라를 멸망시킨 청은 소현세자를 더 이상 인질로 잡고 있어야 할 이유가 없었으므로 귀국을 결정하였다.
1644년 11월26일 소현세자는 귀국길에 올랐고 이듬해 2월18일에는 조선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인조에게 있어서 세자는 타국에서 고생하고 돌아온 귀한 아들이 아니라, 자신의 반청(反淸)노선에 반기를 든 정적(政敵)이었고 오랑캐의 나라와 내통한 반역자였다.
인조와 소현세자 사이의 부자 간 갈등은 소현세자의 귀국을 통하여 현실화되었고, 드디어 세자가 가지고 온 천주교 서적과 서양 과학서적을 문제 삼기에 이르렀다.
결국 분노를 삭이지 못한 인조가 벼루를 들어 세자의 얼굴을 내리치는 사건까지 발생했다.
이 일이 있은 후 소현세자는 가슴앓이를 하다가 몸져눕게 되었는데 발병일은 1645년 4월23일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3일 후인 4월26일 의문의 죽음을 맞았다.
향년 34세, 그가 귀국한 지 겨우 70여일이 지났을 때였다.
이러한 인조와 소현세자의 비극적 갈등의 원인은 '인물성동이론'에 따른 '성범심동이론'의 관점 차이로 이해할 수 있다.
인조의 친명배금정책은 '호론'의 '인물성이론'이나 '성범심이론'과 그 맥을 같이하여 인성과 물성은 다르기 때문에 범인(일반인)이 쉽게 성인이 될 수 없다.
즉,성인과 범인의 차를 엄격히 구별함으로써 청에 대한 관점을 기존의 화이관(華夷觀)에 따라 분명히 하였다.
따라서 청과 조선의 관계를 오랑캐와 소중화로 분명히 규정하여 북벌론의 정당성과 이에 따른 추진을 역설하였다.
반면에 소현세자는 '낙론'의 입장인 '인물성동론'과 '성범심동론'에 따라 인성과 물성, 성인과 범인은 다르지 않으며 다만 기질의 차이가 성인과 범인을 구별하기 때문에 범인(일반인)도 기질의 개선을 통해 성인이 될 수 있음을 주장하였다.
그러므로 양 호란 이후 청을 중화로서 인정하고, 청에 의한 새로운 질서의 개편 속에서 보다 능동적이고 탄력적인 외교정책을 추진하려고 노력하였다.
이렇게 청에 대한 서로 다른 인식의 차이가 결국 부자 간의 갈등을 야기시키는 결정적 원인이 되었다.
결과적으로 볼 때 인조의 '성범심이론'의 입장은 조선과 본인에게 굴욕을 안겨주었던 청을 끝까지 오랑캐로 규정하는 명분에 집착하여 시대에 맞지 않은 구질서에 따른 명분 위주의 외교정책으로 국력의 손실과 민생의 고통을 가져왔다.
반면에 소현세자의 '성범심동론'적 입장은 기존의 명나라 중심의 중화주의에 집착하던 조선의 주관적이고 편협한 세계관을 객관화, 상대화하여 근대적 사회질서로 전환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서울 한성고 교사 cyjin@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