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등하는 현대인의 삶…희망의 처방전은?
[고전속 제시문 100선] (85) 사회과학의 명저를 찾아서 ⑪ 찰스 테일러 '불안한 현대 사회'
현대를 살아가는 인간은 불안하다.

전근대적인 신분적 속박도 없고,전례 없는 물질적 풍요를 누리며 살아가고 있지만 왠지 모를 상실감과 몰락의 느낌을 지울 길이 없다.

왜 그럴까?

현대 도덕철학 및 정치철학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대표적인 사상가들 가운데 한 사람인 찰스 테일러(캐나다 맥길 대학 교수)는 '불안한 현대 사회(The Malaise of Modernity)'라는 독창적이고 설득력 있는 저서에서 근대성의 병폐에서 기인하는 현대사회의 불안 원인을 세 가지로 진단하고,이런 불안을 극복할 수 있는 희망적인 대안을 제시하고 있다.

처음으로 제시되는 불안 원인은 개인주의의 만연과 그에 의한 삶의 의미 상실이다.

인간은 삶에서 의미를 찾지 못할 때 불안해하고 방황하게 마련이다.

전근대적인 전통적 질서들은 개인의 자유를 제한하는 측면이 있었지만,개개인들의 개별적 삶을 초월한 의미를 세계와 사회적 행위에 부여하는 측면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현대의 개인주의는 모든 관심을 자기에게만 집중하고 타인의 삶이나 사회에 대해 점점 무관심해진다.

그 결과 개인을 초월한 삶의 의미는 실종되고 개인은 상실감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두 번째는 삶의 목표들이 도구적 이성의 지배에 의해 소멸하는 사태다.

도구적 이성이란 목적을 성취하기 위한 가장 효율적인 수단을 찾을 때 의지하게 되는 일종의 합리성이다.

현대는 도구적 이성이 영향력을 행사하는 범위를 확대시켜 나갈 뿐만 아니라 우리의 생활까지도 지배하게 되리라는 불안감이 폭넓게 깔려 있다.

이런 불안감은 인간 역시도 효용,즉 비용-소득 분석의 맥락에 의해 재단되리라는 두려움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 불안 원인은 시민으로서의 정치적 자유,자결권의 상실이다.

정치적 무력감을 느끼는 원인의 하나는 우리가 대규모적이고 중앙집권화된 관료주의적 국가에 의해 통치를 받고 있다는 사실이다.

고립적이고 원자적인 개별적 시민은 거대한 관료주의적 국가 앞에 홀로 남게 될 때 무기력함을 느낄 수밖에 없게 된다.

테일러는 현대 사회의 불안 원인을 이와 같이 제시하고 이에 대한 희망적 대안들을 제시한다.

우선 개인주의의 만연에 따른 불안감을 해소하기 위한 대안으로 테일러는 '자기 진실성(authenticity)의 이상'에 충실할 것을 주문한다.

우리가 보통 얘기하는 '자아실현'은 인생의 의미를 각자의 취향과 선택에 맡기며,타인과의 의미 공유는 관심 밖이라는 자아도취적 측면이 강한 것과 달리,이 '자기 진실성'은 자기 내면의 목소리에 충실한 삶 속에서도 얼마든지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의미 있는 삶의 지평을 형성할 수 있는 당대의 도덕적 이상이라는 것이다.

'자기'에게 진실하려면 '자기' 정체성에 대한 이해가 필요한데,자기 정체성은 존재론적으로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형성되므로,자기에게 진실한 사람은 타인을 자기의 의미 지평 속으로 끌어들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도구적 이성의 지배에 의한 불안을 해소하기 위한 대안으로는 실천적 온정의 윤리(ethic of practical benevolence)를 제시한다.

우리가 도구적 이성을 추구하는 근본 이유는 인간과 자연에 대한 지배를 위해서라기보다는 인간에 대한 보살핌과 배려를 위해서라는 사고의 전환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정치적 자유와 자결권의 상실에서 발생하는 불안을 해소하기 위해서 테일러는 공동의 정치적 행동을 요구한다.

현대의 환경 운동의 예에서처럼 사회 구성원의 다수가 참여하는 공동적인 기획을 실행에 옮김으로써 정치적 자유를 지켜낼 수 있다는 것이다.

⊙ 원문읽기

여기서 우리가 이해해야 할 것은 현대사회에서 자기실현과 같은 개념들 뒤에 숨어 있는 도덕적인 힘이다.

일단 자기실현을 일종의 이기주의나 도덕적 해이로,또는 더 힘들었고 더 많은 노력이 요구되었던 과거 시대와 대비하여 그것을 그저 자기도취에 불과하다고 일축해 버린다면,우리는 이미 현대 문화의 본질을 이해하지 못하고 옆길로 빗나간 셈이다.

우리가 설명해야 할 것은 우리 시대에만 고유한 것이 도대체 무엇이냐 하는 문제이다.

중요한 것은,이 시대의 사람들이 그렇게 하도록 강요받고 있으며 그렇게 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느낀다는 점이다.

또 만약 그들이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그들의 인생을 허비했거나 아무 것도 성취하지 못한 것처럼 느낀다는 것이다.

많은 현대사회 비판에서 간과하고 있는 것은 바로 이런 자기 진실성의 이상이 안고 있는 도덕적인 힘이다.

이런 자기 진실성의 이상은 현대의 다른 특성들 모두와 함께 무의식적으로 불신되었다.

해설

테일러는 이 대목에서 현대인들을 강하게 추동하고 있는 원리인 자기실현의 개념에서 자기 진실성의 이상을 찾아내고 있다.

현대사회 비판론자들은 근대 개인주의의 최대 산물인 '자기실현의 충동'을 이기주의 혹은 자기도취의 발로라고 치부하곤 했지만,테일러는 여기에서 자기 자신에게 진실하려는 현대인의 도덕적 열망을 발견해 낸다.

현대에서 개인주의를 거부하고 과거로 회귀하는 방식을 통해 삶의 의미의 지평을 회복하는 것은 이미 불가능하므로,현대의 개인주의적 추세에 순응해 자기 진실성의 이상이라는 개념을 통해서 삶의 의미의 지평의 회복을 시도하려는 전략을 테일러는 펼치고 있는 것이다.

⊙ 원문읽기

자기중심적 생활 양태는 두 가지 면에서 빗나갔다.

그것은 우선 실현의 목표를 개인적 차원으로 한정시키며,또한 인간관계를 순전히 수단적인 것으로 치부하려는 경향이 있다.

다시 말해,그들은 사회적 원자주의(atomism)를 향해 달려나가는 것이다.

그들은 실현을 오직 자아의 것으로만 보고,그들 자신의 욕구나 열망 너머에 있는 것-그것이 역사,전통,사회,자연,혹은 하느님이라고 할지라도-에서 오는 요구들을 소홀히 대하거나 혹은 부당한 것으로 몰아붙이는 경향이 있다.

다시 말해,이런 생활 양태는 극단적인 인간 독존주의(anthropocentrism)를 조장하는 것이다.

해설

자기중심적 생활 양태는 자기 진실성의 이상과 대립되는 개념으로,흔히 말하는 개인주의적 '자기실현'을 의미한다.

여기에서는 그 생활 양태의 폐해를 언급하며,이것이 원자주의와 인간 독존(중심)주의로 귀결함을 지적하고 있다.

원자주의와 인간 독존주의는 인간 주위의 존재,전통,자연,하느님과 같은 의미의 모든 지평 등을 철폐시킴으로써 결국 우리에게 의미의 상실감을 안겨 준다.

⊙ 원문읽기

우리가 이 책에서 지금 찾고 있는 것은 기술에 대한 대안적인 틀이다.

점점 더 커져 가는 인간의 통제력,혹은 저항하는 자연의 뒤로 점점 더 밀려나는 방어선,아마도 인간의 권력과 자유라는 관념에 의해서 활력을 얻게 되는 그런 지배 폭력의 맥락에서 인간의 기술을 보는 대신에,우리는 기술을 또한 우리 서구 문화 안에 존재하는 도덕 원천의 하나인 실천적 온정의 윤리라는 도덕적인 틀 안에서 이해해야만 한다.

실천적 온정의 윤리는 우리 문화 안에서 도구적 이성이 우리 인간들에게 뚜렷하게 중요한 의미를 획득하는 하나의 근원이 되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이런 온정을,객관화된 기계 속에 구현되어 있는 추상화되고 해방된 이성이라는 육신 없는 망령과 연관하여 파악할 것이 아니라 인간 행위의 적절한 이해라는 구조 안으로 이끌어 들여야만 한다.

우리는 비록 기술을 해방된 이성이라는 그런 관념과 연관지어서 이해해야 하지만,또한 그 기술을 인간 본질에 대한 왜곡된 이미지라기보다는 오히려 이상으로 이해해야만 한다.

기술은 실제로 살과 피를 가진 살아 있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온정의 윤리를 떠받치고 있는 것이다.

해설

기술이 우리를 압도할 것인가,아니면 우리가 그것을 통제하여 우리 인간의 목적에 봉사하게 만들 것인가?

우리의 관심은 주로 이런 식의 문제 제기에 머물러 있다.

하지만 이런 문제 제기는 전적으로 '지배'라는 틀 안에 머물러 있는 것이다.

테일러는 이런 지배의 틀에서 벗어나서 기술에 대한 새로운 대안적 틀을 획득할 때에만이 도구적 이성의 폐해에서 비롯되는 불안감을 벗어날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즉 기술을 지배의 수단이 아니라 인간에게 온정을 베푸는 실천적 수단이라는 시각으로 바라보자는 것이다.

⊙ 원문읽기

위험은 실재하는 독재적인 통제가 아니라,사람들이 공동의 목적을 형성하고 그것을 수행할 수 있는 능력이 점점 더 없어지는 파편화 현상에 있다.

사람들이 자신을 점점 더 원자주의적으로 보게 될 때,달리 말하면 공동의 기획들이나 충절을 지키는 일들에 있어서 동료 시민들에 대한 연대감을 점점 더 상실하게 될 때 파편화 현상이 생겨난다.

국민의 대다수가 공동 기획의 틀을 짜고 그것을 수행해 나갈 수 있다는 생각은 너무나 천진난만하고 실현 불가능한 유토피아처럼 보인다.

그래서 사람들은 포기하고 마는 것이다.

함께 행동한 경험의 결핍은 이미 확신 없는 타인과의 공감적 연대를 더욱 더 약화시킨다.

공감할 수 있는 희망이 전혀 없다는 느낌은 그런 시도를 결국 시간 낭비로 보게끔 만든다.

이것은 모든 것을 희망 없는 것으로 만든다.

이렇게 악순환이 생겨나는 것이다.

해설

토크빌이 말한 온건한 독재(soft despotism)의 위험성을 설명하는 대목이다.

이 구절을 통해 요즘 우리나라 청년층의 정치에 대한 무관심의 이유 혹은 투표 참여율 저조의 위험성 등을 유추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김훈회 S논술 선임연구원 toatopia@nonsu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