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분 버리고 실리 택해 '국익·민생' 두토끼 잡아야
16세기 후반에서 17세기 전반의 시기는 조선왕조의 변혁기이자 동아시아의 국제질서가 재편되는 중요한 시기였다.
대내적으로 훈구파로 불리는 구(舊)정치세력이 퇴조하고,선조(宣祖)가 즉위하면서 그동안 향촌에서 세력 기반을 다져 오던 사림세력이 대거 중앙 정계로 진출하여 정국을 주도하게 되었다.
대외적으로는 명(明)의 국력이 쇠약해졌고,17세기 전반 만주에서 일어난 청(淸)에 중국의 지배권을 넘겨주었다.
조선 후기,이러한 시대적 상황에서 전통적 외교 정책인 '명분'과 새로운 외교정책인 '실리'라는 상반된 입장으로 대립되었다.
따라서 이번 주제에서는 양란(兩亂) 이전의 조선의 외교정책인 광해군(光海君)의 '중립외교정책'과 인조(仁祖)의 '친명배금정책'을 성리학적 이기론을 통해 알아보고 현재의 FTA 협정에 대한 해법을 모색하고자 한다.
⊙ 광해군! 껍데기를 벗어던지다
당시 현실로 볼 때,조선은 7년여간의 조일전쟁(임진왜란~정유재란)을 겪은 후 농토의 3분의 2 이상이 황폐화되었고,국가재정도 피폐해졌다.
그러므로 광해군(光海君)이 생각할 때 동아시아 최강대국으로 부상한 후금(청나라)과 대적하는 것은 자멸을 의미하는 것이고,이는 국가의 존망과 민족의 생존이 걸린 문제였다.
즉 사실상 불가능한 현실이었다.
이러한 어려운 현실을 도외시하고 명분에만 치우쳐 청나라와 적대관계를 유지한다면,그것은 유교적 명분을 위하여 국익을 버리는 행위라고 생각하였다.
따라서 명나라와 청나라 사이에서 군대는 파병하되 전쟁은 하지 않는 중립외교 정책을 추진하여 국익과 민생의 안정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고자 하였다.
즉 '명분'이라는 껍데기를 취하고자 '실리'라는 내용을 버릴 수는 없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 사림의 외교정책은 진정한 의리인가?
그러나 유교적으로 선비가 지향하는 핵심적 가치는 세속적 이익을 억제하고 인간의 성품에 바탕을 둔 '의리'(義)이다.
따라서 선비정신의 핵심은 곧 의리정신으로 나타난다.
공자가 "군자는 의리에 밝고 소인은 이익에 밝다"고 한 주장에서도 의리와 이익의 대립적 분별의식을 확인할 수 있다.
고려 말에서 조선 초로 전환하는 왕조 교체기의 선비들 사이에도 고려 왕조를 위해 '절의'를 지켜야 한다는 정몽주 등과 '혁명'의 당위성에 따라 새 왕조를 세워야 한다는 정도전(鄭道傳) 등의 상반된 입장이 충돌했다.
절의보다 한층 더 큰 의리인 '춘추대의(春秋大義·대의명분을 밝혀 세우는 큰 의리)'는 '존화양이(尊華攘夷·중국을 숭배하고 오랑캐를 물리칠 것)'를 제기한다.
따라서 도학적 의리의 가장 큰 과제는 정통과 이단을 구별하여 이단을 배척하고,중국과 오랑캐를 가려서 중국 문화를 수호하도록 요구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논리에 따라 광해군을 폐위시키고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을 주도한 서인은 광해군의 중립 외교 정책을 비판하고,친명 배금 정책을 추진하여 후금을 자극하였다.
이에 후금은 조선에 대해 '보복'이라는 명분을 내걸고 쳐들어온 것이 1627년에 벌어진 정묘호란이다.
그 후 후금은 1636년(인조14년),조선에 사신을 보내 기존의 형제 칭호를 버리고 군신 관계를 맺을 것을 강요하는 국서에서 나라 이름을 청(淸)이라 하고 스스로 황제임을 천명하였다.
당시 사림사회의 여론이자 국론은 '하늘에는 해가 둘이 없다'는 명분론을 앞세워 청의 존재를 부정하는 일전불사의 주장이 팽배하게 되었다.
성리학의 기준에서 볼때 북방 오랑캐인 여진족과 형제나 군신의 의리를 맺는 일은 굴욕이자 치욕이었다.
이 '주전론'(主戰論·전쟁하기를 주장하는 의견이나 이론)은 상황이 악화됨에 따라 화친을 반대하는 입장을 고수하는 '척화론'(斥和論·화친에 대한 논의를 배척함)으로 선회하였다.
결국 조선의 대세가 주전론으로 기울자 청은 다시 대군을 이끌고 침입을 했다.
이것이 1636년 벌어진 병자호란이다.
⊙ 우리에게 절실한 것은 '실리'
이와 같이 광해군과 인조반정을 주도한 서인(사림)들의 외교정책에 있어서의 큰 입장 차이는 '기(氣)' 우위의 '주기론(主氣論)'을 지지하는가,'이(理)' 우위의 '주리론(主理論)'을 지지하는가에 따라서 인간의 실천적인 문제 등 세계를 해석하는 관점이 상반되게 달라진다.
조선시대 성리학에 있어서 '이(理)'에 치중하는 주리(主理)적 관점은 '기(氣)'에 치중하는 주기(主氣)관보다 가치의식이 더욱 높으며 규범적이었다.
또한 '기(氣)'에 치중하는 주기적 관점은 주리관보다 경험적 사실에 대한 관심이 높으며 사실의 객관적 기술을 중시하였다.
일반적으로 '기(氣)'는 서양 철학의 존재론에 있어서의 물질과 비슷한 개념이다.
즉 이 세계를 구성하고 있는 양적·물질적·물리적 요소를 가리킨다.
이에 비해 '이(理)'는 이 세계가 형성되고 변화하는 근본 법칙,또는 원리와 비슷한 개념으로,질적·정신적 체계에 속하는 개념이다.
따라서 주기론자들은 인간의 본능적 성향을 긍정하며 현실적이고 실질적인 것을 선호한다.
반면에 주리론자들은 인간의 도덕적 성향을 긍정하며 이상적이고 가치적인 것을 선호한다.
우리나라도 조선시대에 들어와 이황의 '주리론(主理論)'과 이이의 '주기론(主氣論)'은 성리학의 커다란 두 흐름으로 발전했다.
결국 광해군의 중립외교 정책은 '주리론(主理論)'의 입장인 의리나 명분에 사로잡히기보다는 실질을 강조하는 '주기론(主氣論)'적 입장에서 현실을 객관적으로 직시하여 주변 강대국과의 실리외교를 전개해 전쟁의 위기를 피할 수 있었다.
반면에 인조의 친명배금정책을 주도한 사림세력들은 이존기비(理尊氣卑·이는 존귀하고 기는 천하다)의 명분을 앞세워 '이(理)'의 우위성을 강조하는 '주리론'의 입장을 취했기 때문에 현실을 도외시하고 자신들의 명분과 의리에만 집착하여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이라는 두 전란을 통하여 민생을 도탄에 빠뜨리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 FTA를 통해 살아난 광해군의 외교적 지혜
이와 같은 역사적 사실들은 한 국가에 있어서의 외교정책이 국민 생활에 미치는 영향이 얼마나 막대한지를 보여주는 좋은 사례다.
요즘 우리 국민들의 가장 뜨거운 관심 분야 중 하나가 미국산 쇠고기 수입문제다.
이번 쇠고기 협상은 앞으로 다가올 한·미 FTA(자유무역협정) 타결에는 긍정적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미국 의회에서는 한·미 FTA 비준에 앞서 쇠고기 문제의 타결을 선결조건으로 주장했기 때문이다.
결국 쇠고기 협상을 통해 한·미 FTA 비준을 위한 미국 측 요구를 들어준 셈이기 때문에 미국 의회의 비준이 우리에게 유리한 국면으로 전개될 것이라고 예상된다.
그렇다면 우리는 쇠고기 협상을 통해 이와 같은 긍정적 측면의 결과만 얻어낸 것인가?
그 이면에는 세계적 곡물값 폭등으로 인한 사료 가격 인상과 미국산 쇠고기 수입에 따른 소 값 폭락 등의 이유로 축산 농가들이 적지 않은 고통을 겪어야 할 것이 명백한 사실로 보인다.
그렇다면 정부가 결정해야 하는 최선의 선택은 무엇인가?
모든 국가는 결국 자국의 이익을 위해 외교관계를 맺는 것이다.
FTA 비준 문제 또한 국익적 관점에서 볼 때 피해가기 어려운 시대적 대세이고 대한민국의 성장 발판을 마련해줄 중대한 전환점이 될 사건임은 자명하다.
그러기 위해서 정부는 FTA 협상에 있어 과거와 같이 명분에 사로잡혀선 안되며 강대국에 대한 사대주의적 입장에서 벗어나야 한다.
국민들의 삶에 미치게 될 현실적 결과에 대한 객관적 인식을 통하여 현재와 같은 딜레마적 상황에 대한 해법을 모색해 나가야 한다.
결국 모든 외교협정의 목적은 민생의 안정과 국민의 이익 보장을 그 중심에 두어야 한다.
따라서 FTA라는 피해갈 수 없는 세계화의 조류를 맞이하고 있는 오늘날,실리주의 외교정책을 통해 전쟁을 피함으로써 국익의 증진과 민생의 안정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았던 광해군의 외교적 지혜가 절실히 필요한 시점이다.
서울 한성고 교사 cyjin@hanmail.net
<용어정리>
▶이기론(理氣論)
이기론은 성리학에서 이(理)와 기(氣)의 원리로서 모든 우주 현상과 사물의 생성 및 관계를 설명하는 이론이다.
이(理)는 모든 사물의 생성과 변화를 가능하게 하는 필연적 이치이며,기(氣)는 이(理)를 원리로서 생성되는 사물의 현상적 요인이다.
성리학을 확립한 주자(朱子)는 이와 기가 서로 떨어져 있을 수 없으면서도(不相離) 서로 섞일 수도 없는 것(不相雜)이라고 하였다.
모든 만물은 이를 토대로 기의 모임과 흩어짐에 따라 생성 소멸하고 각각의 차별성을 가지며,기의 운동 법칙에 따라 변화 발전하는 것이다.
이는 기에 의존하여 구체적 존재로 나타나고,기는 이를 근거로 존재하고 운동한다.
▶주전론(主戰論)과 주화론(主和論)
주전론(김상헌) : 1672년에 정묘호란이 일어났을 때 진주사로 명나라에 갔다가 구원병을 청하였고,돌아와서는 후금과의 화의를 끊을 것과 강홍립의 관작을 복구하지 말 것을 강력히 주장하였다.
1633년부터 2년 동안 다섯 차례나 대사헌에 임명되었으나,강직한 언론 활동을 벌이다가 출사와 사직을 반복하였다.
예조 판서로 있던 1636년에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남한산성으로 인조를 호송하여 선전후화(先戰後和)론을 강력히 주장하였다.
대세가 기울어 항복하는 쪽으로 굳어지자,최명길이 작성한 항복 문서를 찢고 통곡하였다.
항복 이후 식음을 전폐하고 자결을 기도하다가 실패한 뒤,학가산에 들어가 와신상담해서 치욕을 씻고 명나라와의 의리를 유지해야 한다는 내용의 상소를 올린 뒤 두문불출하였다.
주화론(최명길):후금 및 그 뒤의 청나라에 대해서는 유연한 외교 관계를 유지하여 충돌을 피하고,우리의 입장을 지키자는 주장으로 일관하였다.
병자호란 때는 "싸우자니 힘이 부치고 감히 화의하자고 못 하다가 하루아침에 성이 무너지고 위아래가 어육이 되면 종사를 어디에 보전하겠느냐?" 는 입장에서 강화를 주장하였다.
16세기 후반에서 17세기 전반의 시기는 조선왕조의 변혁기이자 동아시아의 국제질서가 재편되는 중요한 시기였다.
대내적으로 훈구파로 불리는 구(舊)정치세력이 퇴조하고,선조(宣祖)가 즉위하면서 그동안 향촌에서 세력 기반을 다져 오던 사림세력이 대거 중앙 정계로 진출하여 정국을 주도하게 되었다.
대외적으로는 명(明)의 국력이 쇠약해졌고,17세기 전반 만주에서 일어난 청(淸)에 중국의 지배권을 넘겨주었다.
조선 후기,이러한 시대적 상황에서 전통적 외교 정책인 '명분'과 새로운 외교정책인 '실리'라는 상반된 입장으로 대립되었다.
따라서 이번 주제에서는 양란(兩亂) 이전의 조선의 외교정책인 광해군(光海君)의 '중립외교정책'과 인조(仁祖)의 '친명배금정책'을 성리학적 이기론을 통해 알아보고 현재의 FTA 협정에 대한 해법을 모색하고자 한다.
⊙ 광해군! 껍데기를 벗어던지다
당시 현실로 볼 때,조선은 7년여간의 조일전쟁(임진왜란~정유재란)을 겪은 후 농토의 3분의 2 이상이 황폐화되었고,국가재정도 피폐해졌다.
그러므로 광해군(光海君)이 생각할 때 동아시아 최강대국으로 부상한 후금(청나라)과 대적하는 것은 자멸을 의미하는 것이고,이는 국가의 존망과 민족의 생존이 걸린 문제였다.
즉 사실상 불가능한 현실이었다.
이러한 어려운 현실을 도외시하고 명분에만 치우쳐 청나라와 적대관계를 유지한다면,그것은 유교적 명분을 위하여 국익을 버리는 행위라고 생각하였다.
따라서 명나라와 청나라 사이에서 군대는 파병하되 전쟁은 하지 않는 중립외교 정책을 추진하여 국익과 민생의 안정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고자 하였다.
즉 '명분'이라는 껍데기를 취하고자 '실리'라는 내용을 버릴 수는 없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 사림의 외교정책은 진정한 의리인가?
그러나 유교적으로 선비가 지향하는 핵심적 가치는 세속적 이익을 억제하고 인간의 성품에 바탕을 둔 '의리'(義)이다.
따라서 선비정신의 핵심은 곧 의리정신으로 나타난다.
공자가 "군자는 의리에 밝고 소인은 이익에 밝다"고 한 주장에서도 의리와 이익의 대립적 분별의식을 확인할 수 있다.
고려 말에서 조선 초로 전환하는 왕조 교체기의 선비들 사이에도 고려 왕조를 위해 '절의'를 지켜야 한다는 정몽주 등과 '혁명'의 당위성에 따라 새 왕조를 세워야 한다는 정도전(鄭道傳) 등의 상반된 입장이 충돌했다.
절의보다 한층 더 큰 의리인 '춘추대의(春秋大義·대의명분을 밝혀 세우는 큰 의리)'는 '존화양이(尊華攘夷·중국을 숭배하고 오랑캐를 물리칠 것)'를 제기한다.
따라서 도학적 의리의 가장 큰 과제는 정통과 이단을 구별하여 이단을 배척하고,중국과 오랑캐를 가려서 중국 문화를 수호하도록 요구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논리에 따라 광해군을 폐위시키고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을 주도한 서인은 광해군의 중립 외교 정책을 비판하고,친명 배금 정책을 추진하여 후금을 자극하였다.
이에 후금은 조선에 대해 '보복'이라는 명분을 내걸고 쳐들어온 것이 1627년에 벌어진 정묘호란이다.
그 후 후금은 1636년(인조14년),조선에 사신을 보내 기존의 형제 칭호를 버리고 군신 관계를 맺을 것을 강요하는 국서에서 나라 이름을 청(淸)이라 하고 스스로 황제임을 천명하였다.
당시 사림사회의 여론이자 국론은 '하늘에는 해가 둘이 없다'는 명분론을 앞세워 청의 존재를 부정하는 일전불사의 주장이 팽배하게 되었다.
성리학의 기준에서 볼때 북방 오랑캐인 여진족과 형제나 군신의 의리를 맺는 일은 굴욕이자 치욕이었다.
이 '주전론'(主戰論·전쟁하기를 주장하는 의견이나 이론)은 상황이 악화됨에 따라 화친을 반대하는 입장을 고수하는 '척화론'(斥和論·화친에 대한 논의를 배척함)으로 선회하였다.
결국 조선의 대세가 주전론으로 기울자 청은 다시 대군을 이끌고 침입을 했다.
이것이 1636년 벌어진 병자호란이다.
⊙ 우리에게 절실한 것은 '실리'
이와 같이 광해군과 인조반정을 주도한 서인(사림)들의 외교정책에 있어서의 큰 입장 차이는 '기(氣)' 우위의 '주기론(主氣論)'을 지지하는가,'이(理)' 우위의 '주리론(主理論)'을 지지하는가에 따라서 인간의 실천적인 문제 등 세계를 해석하는 관점이 상반되게 달라진다.
조선시대 성리학에 있어서 '이(理)'에 치중하는 주리(主理)적 관점은 '기(氣)'에 치중하는 주기(主氣)관보다 가치의식이 더욱 높으며 규범적이었다.
또한 '기(氣)'에 치중하는 주기적 관점은 주리관보다 경험적 사실에 대한 관심이 높으며 사실의 객관적 기술을 중시하였다.
일반적으로 '기(氣)'는 서양 철학의 존재론에 있어서의 물질과 비슷한 개념이다.
즉 이 세계를 구성하고 있는 양적·물질적·물리적 요소를 가리킨다.
이에 비해 '이(理)'는 이 세계가 형성되고 변화하는 근본 법칙,또는 원리와 비슷한 개념으로,질적·정신적 체계에 속하는 개념이다.
따라서 주기론자들은 인간의 본능적 성향을 긍정하며 현실적이고 실질적인 것을 선호한다.
반면에 주리론자들은 인간의 도덕적 성향을 긍정하며 이상적이고 가치적인 것을 선호한다.
우리나라도 조선시대에 들어와 이황의 '주리론(主理論)'과 이이의 '주기론(主氣論)'은 성리학의 커다란 두 흐름으로 발전했다.
결국 광해군의 중립외교 정책은 '주리론(主理論)'의 입장인 의리나 명분에 사로잡히기보다는 실질을 강조하는 '주기론(主氣論)'적 입장에서 현실을 객관적으로 직시하여 주변 강대국과의 실리외교를 전개해 전쟁의 위기를 피할 수 있었다.
반면에 인조의 친명배금정책을 주도한 사림세력들은 이존기비(理尊氣卑·이는 존귀하고 기는 천하다)의 명분을 앞세워 '이(理)'의 우위성을 강조하는 '주리론'의 입장을 취했기 때문에 현실을 도외시하고 자신들의 명분과 의리에만 집착하여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이라는 두 전란을 통하여 민생을 도탄에 빠뜨리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 FTA를 통해 살아난 광해군의 외교적 지혜
이와 같은 역사적 사실들은 한 국가에 있어서의 외교정책이 국민 생활에 미치는 영향이 얼마나 막대한지를 보여주는 좋은 사례다.
요즘 우리 국민들의 가장 뜨거운 관심 분야 중 하나가 미국산 쇠고기 수입문제다.
이번 쇠고기 협상은 앞으로 다가올 한·미 FTA(자유무역협정) 타결에는 긍정적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미국 의회에서는 한·미 FTA 비준에 앞서 쇠고기 문제의 타결을 선결조건으로 주장했기 때문이다.
결국 쇠고기 협상을 통해 한·미 FTA 비준을 위한 미국 측 요구를 들어준 셈이기 때문에 미국 의회의 비준이 우리에게 유리한 국면으로 전개될 것이라고 예상된다.
그렇다면 우리는 쇠고기 협상을 통해 이와 같은 긍정적 측면의 결과만 얻어낸 것인가?
그 이면에는 세계적 곡물값 폭등으로 인한 사료 가격 인상과 미국산 쇠고기 수입에 따른 소 값 폭락 등의 이유로 축산 농가들이 적지 않은 고통을 겪어야 할 것이 명백한 사실로 보인다.
그렇다면 정부가 결정해야 하는 최선의 선택은 무엇인가?
모든 국가는 결국 자국의 이익을 위해 외교관계를 맺는 것이다.
FTA 비준 문제 또한 국익적 관점에서 볼 때 피해가기 어려운 시대적 대세이고 대한민국의 성장 발판을 마련해줄 중대한 전환점이 될 사건임은 자명하다.
그러기 위해서 정부는 FTA 협상에 있어 과거와 같이 명분에 사로잡혀선 안되며 강대국에 대한 사대주의적 입장에서 벗어나야 한다.
국민들의 삶에 미치게 될 현실적 결과에 대한 객관적 인식을 통하여 현재와 같은 딜레마적 상황에 대한 해법을 모색해 나가야 한다.
결국 모든 외교협정의 목적은 민생의 안정과 국민의 이익 보장을 그 중심에 두어야 한다.
따라서 FTA라는 피해갈 수 없는 세계화의 조류를 맞이하고 있는 오늘날,실리주의 외교정책을 통해 전쟁을 피함으로써 국익의 증진과 민생의 안정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았던 광해군의 외교적 지혜가 절실히 필요한 시점이다.
서울 한성고 교사 cyjin@hanmail.net
<용어정리>
▶이기론(理氣論)
이기론은 성리학에서 이(理)와 기(氣)의 원리로서 모든 우주 현상과 사물의 생성 및 관계를 설명하는 이론이다.
이(理)는 모든 사물의 생성과 변화를 가능하게 하는 필연적 이치이며,기(氣)는 이(理)를 원리로서 생성되는 사물의 현상적 요인이다.
성리학을 확립한 주자(朱子)는 이와 기가 서로 떨어져 있을 수 없으면서도(不相離) 서로 섞일 수도 없는 것(不相雜)이라고 하였다.
모든 만물은 이를 토대로 기의 모임과 흩어짐에 따라 생성 소멸하고 각각의 차별성을 가지며,기의 운동 법칙에 따라 변화 발전하는 것이다.
이는 기에 의존하여 구체적 존재로 나타나고,기는 이를 근거로 존재하고 운동한다.
▶주전론(主戰論)과 주화론(主和論)
주전론(김상헌) : 1672년에 정묘호란이 일어났을 때 진주사로 명나라에 갔다가 구원병을 청하였고,돌아와서는 후금과의 화의를 끊을 것과 강홍립의 관작을 복구하지 말 것을 강력히 주장하였다.
1633년부터 2년 동안 다섯 차례나 대사헌에 임명되었으나,강직한 언론 활동을 벌이다가 출사와 사직을 반복하였다.
예조 판서로 있던 1636년에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남한산성으로 인조를 호송하여 선전후화(先戰後和)론을 강력히 주장하였다.
대세가 기울어 항복하는 쪽으로 굳어지자,최명길이 작성한 항복 문서를 찢고 통곡하였다.
항복 이후 식음을 전폐하고 자결을 기도하다가 실패한 뒤,학가산에 들어가 와신상담해서 치욕을 씻고 명나라와의 의리를 유지해야 한다는 내용의 상소를 올린 뒤 두문불출하였다.
주화론(최명길):후금 및 그 뒤의 청나라에 대해서는 유연한 외교 관계를 유지하여 충돌을 피하고,우리의 입장을 지키자는 주장으로 일관하였다.
병자호란 때는 "싸우자니 힘이 부치고 감히 화의하자고 못 하다가 하루아침에 성이 무너지고 위아래가 어육이 되면 종사를 어디에 보전하겠느냐?" 는 입장에서 강화를 주장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