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자본(Social capital)의 핵심요소는 신뢰(Trust)다
[고전속 제시문 100선] (80) 사회과학의 명저를 찾아서 ⑥ 프랜시스 후쿠야마 '트러스트'
다음 두 장면의 공통점을 찾아보자.

선한 사마리아인이 길을 가다 강도의 습격을 받아 쓰러져 있는 사람을 발견한다.

얼굴도 모르고 이름도 모르는 사이인 데다 한 술 더 떠 평소에 사마리아인을 무시해온 괘씸한 족속 중 하나다.

하지만 선한 사마리아인은 자신이 굳이 도와주어야 할 의무도 없는 그 타인을 구조한다.

성경의 유명한 대목이다.

시간을 훌쩍 건너 뛰어 이제는 20세기 할리우드에 당도한다.

대부(godfather)가 의뢰인과 엄숙하게 대화를 나눈다.

"당신 부탁을 들어주겠소.

훗날 내가 당신 도움을 필요로 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소.

만약 내가 도움을 필요로 할 때에는 오늘을 기억하시오."

이 두 장면의 공통점을 사회과학의 시선에서 추출하자면 '사회적 자본' 내지 '신뢰'로 정리할 수 있다.

사회적 자본(social capital)은 한 사회가 가지고 있는 사회 그 자체의 경쟁력이다.

사회적 자본에 관해서는 여러 측면에서 분석할 수 있겠지만, 특히 사회 구성원의 신뢰(trust)가 핵심 요소다.

앞서의 선한 사마리아인과 대부는 자신들의 '믿음직스러운' 행위를 통해 사회의 신뢰성을 제고하고 사회적 자본을 증대시켰다.

상호 호혜적인 사회 형성에 기여한 것이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도움을 받은 사람은 이제 남을 도움으로써 자신이 어려운 경우에 처하거나 긴급한 상황에 처할 때 자신도 도움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을 것이며, 대부의 신뢰관계는 대부가 이 세상을 헤쳐나가는 데 필요한 버팀목을 만들었다.

쉬운 비유를 들자면 서로 비 오는 날에 대비해 우산을 챙긴 셈이다.

이러한 사회의 신뢰관계에 대해 집중적으로 파헤친 흥미로운 책이 있다.

'트러스트;Trust'라는 제목의 책인데 특이하게도 이 책은 서문에서 경제학에 관한 책이라고 주제를 밝히고 있다.

통상 경제학 서적이라고 하면 수요와 공급 곡선부터 시작해서 여러 도표가 떠오르는 것이 통념이나,'트러스트'는 문화의 중요성이 경제적 번영에 미치는 영향력을 여러 사례를 통해 심도 있게 분석하고 있다.

즉 사회가 서로를 신뢰하는 문화의 고신뢰 사회이면 경제적으로 번영하고, 사회가 서로를 불신하는 저신뢰 사회이면 경제적 번영이 힘들다는 것을 철저한 예증을 통해 보여준다.

저자인 프랜시스 후쿠야마(Francis Fukuyama)는 현 시대에서 높은 인기를 자랑하는 사상가로 꼽힌다.

1952년 시카고에서 이민 일본인 3세로 출생한 후쿠야마는 대학에서 고전학과 정치학을 공부하고, 미 국무부 정책실 차장,워싱턴 '랜드 연구소'선임 연구위원 등을 거쳐 대학 강단에 섰다.

1992년 출간된 '역사의 종언과 최후의 인간 ; The End of History and the Last Man'은 세간의 이목을 끌어 그를 인기 학자로 만들었고,이후 1995년 출간된 '트러스트'는 후쿠야마의 이름을 사람들 뇌리에 한 번 더 굳히는 고전이 되었다.

'트러스트'는 제1부 신뢰의 이념 ; 문화가 경제사회에 미치는 힘,제2부 저신뢰 사회와 가족 가치의 역설,제3부 고신뢰 사회와 사회성의 도전,제4부 미국 사회와 신뢰의 위기,제5부 신뢰의 회복을 위하여 ; 21세기를 위한 전통 문화와 현대 산업의 결합 등 총 5부로 구성돼 신뢰가 사회경제에 미치는 영향력을 기술하고, 고신뢰 사회와 저신뢰 사회를 대비한다.

조직은 윤리적 가치를 공유하는 공동체에 기초할 때 가장 효율적으로 된다

⊙ 원문 읽기

사회적 자본은 한 사회,또는 그 특정 부분에 신뢰가 정착되었을 때 생긴다.

신뢰는 가장 작고 기본적인 사회 집단인 가족 내에서 구현될 수도 있고 가장 큰 집단인 국가에 구현될 수도 있으며, 그 사이에 있는 다른 모든 집단에 구현될 수도 있다.

사회적 자본은 그것이 통상 종교나 전통,역사적 관습 등 문화적 기제를 통해 창조되고 전수된다는 점에서 다른 형태의 인적 자본과는 차이가 있다.

경제학자들은 대체로 협동을 하면 결국 자신에게 이롭다는 합리적인 판단을 내린 개인들이 자율적인 계약을 맺은 결과로 사회집단이 형성되는 것으로 설명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설명에 의하면 신뢰는 협동에 꼭 필요한 것이 아니다.

계몽된 이기심에 계약 같은 합법적 기제가 곁들여지면 신뢰의 결여가 보상될 수 있고,이방인들이 힘을 합쳐 공통의 목적에 종사하는 조직을 만들어 낼 수 있다.

언제라도 이기심에 기초해 집단을 구성할 수 있으며,집단의 구성은 문화에 의존하지 않는다.

그러나 한편 계약과 이기심이 결속의 중요한 원천이 될 수는 있지만,조직은 윤리적 가치를 공유하는 공동체에 기초할 때 가장 효율적으로 된다.

이러한 공동체는 사전에 합의된 도덕률이 그 집단의 구성원에게 상호 신뢰의 기초를 마련해 주기 때문에 더 이상의 계약과 구성원의 관계에 대한 법적인 규제가 필요하지 않다.

이와 같은 도덕 공동체를 구성하는 데 필요한 사회적 자본은 다른 형태의 인적 자본의 경우처럼 투자에 대한 합리적인 결정을 통해 획득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다시 말해 개인은 학교에 입학해 대학교육을 받거나 기계공 또는 컴퓨터 프로그래머 훈련 같은 전통적인 인적 자본에 '투자'하기로 결정할 수 있다.

이와 달리 사회적 자본을 획득하려면 공동체의 도덕 규범에 익숙해질 필요가 있고,같은 맥락에서 충성심?정직?책임감 따위의 덕목을 획득하는 것이 필요하다.

더욱이 집단이 먼저 공동규범 전체를 수용해야만 그 구성원 사이에 신뢰가 일반화된다.

달리 말하자면 사회적 자본은 개인 각자가 자기 나름대로 행동해서는 획득될 수 없다.

사회적 자본은 개인적 덕목이 아니라 사회적 덕목에 기초하고 있다.

사회성에 필요한 기질은 다른 형태의 인적 자본에 비해 획득하기가 훨씬 어려울 뿐 아니라 윤리적 관습을 토대로 하기 때문에 수정하거나 파괴하기도 역시 어렵다.

▶ 해석

애덤 스미스는 '이기성'이 경제의 원동력이자 근간이라고 설명한다.

그러나 합리적이고 이기적인 행동만이 시장 경제를 발전시킨다는 고전 경제학은 불변의 진리가 아니다.

부분적으로는 옳은 구석도 있으나 분명 잘못된 부분도 많다.

왜냐하면 후쿠야마가 상술한 것처럼 그 주체가 선한 사마리아인이든 대부이든 남을 돕는 상호 호혜적인 행위를 통해 사회경제의 번영을 구가할 수 있기 때문이다.

도덕, 협동심, 사회관습처럼 고전 경제학에서는 전혀 관심을 기울이지 않던 요소들이 경제 발전을 가능하게 하는 힘이 된다.

사회 구성원 간의 신뢰를 통해 서로를 믿고 존중하며 자발적으로 협력하는 사회는 경제적으로도 발전 가능한 사회이고,그 반대의 사회는 경제 번영 역시 곤란하다.

신뢰를 근간으로 한 자발적 사회성이 자유민주주의 시장경제체제를 살린다는 프랜시스 후쿠야마의 시선은 참신하면서도 많은 것을 시사한다.

이론은 언제나 눈앞에 펼쳐진 광막한 현실을 이해하기 위한 도구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하나의 이론을 잣대로 세상을 모두 재단할 수는 없는 일이지만,고전 경제학에서 간과하고 있는 중요한 핵심을 우리는 '트러스트'에서 선명하게 찾을 수 있다.

그리고 경제 성장을 위해서는 우선 사회의 신뢰 형성이 선결이라는 후쿠야마의 주장은 현재 경제 성장을 최우선 과제로 삼고 있는 한국 사회가 신뢰라는 관점에서 살펴볼 때에는 어떠한 위치에 있는지를 다시 한번 더 돌아보게끔 한다.

홍보람 s·논술 선임연구원 nikehbr@nonsu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