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의 빚은 기관장 일찌감치 물러났어야"

"직무 독립성·공정성 위해 임기제 지켜져야"

노무현 정부가 임명한 임기직 공직 및 공기업 인사들의 거취를 놓고 논란이 일고 있다.

여당 측은 "지난 10년간 국정을 파탄한 세력이 각계 요직에 남아 새 정부의 발목을 잡고 있다"며 이들의 자진사퇴를 촉구하고 나섰다.

새 정부 장관도 "이전 정권의 정치색을 가진 문화예술계 단체장들은 스스로 물러나는 게 자연스럽다"며 논란의 불씨를 지폈다.

이에 대해 야당 측은 "마녀사냥" "민주개혁 세력에 대한 숙청"이라며 임명직에 대한 사퇴 압력에 강력 반발하고 있다.

이런 와중에 한국관광공사 사장,한국방송광고공사 사장, 예술의전당 사장이 문화체육관광부에 사직서를 제출하고 조폐공사 사장도 사의를 표명했다.

하지만 지난 정부 때 임명돼 임기가 남은 몇몇 기관장들은 "사퇴할 뜻이 없다"며 저항하고 있다.

정치색이 짙은 이른바 '코드 기관장'의 진퇴를 둘러싼 논란이 끊이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물론 정부 산하 공공기관장들은 2007년 1월1일 시행에 들어간 '공공기관 운영에 관한 법률'에 따라 의무와 책임,직무를 이행하지 않거나 게을리한 경우가 아니면 해임되지 않도록 임기가 보장돼 있다.

문제는 정치적으로 임명됐거나 경영 실적이 부진한 기관장들마저 과연 임기를 보장해줘야 하느냐는 점이다.

⊙ 반대 측,"직무 독립성 공정성 확보 위해 임기제 지켜져야"

야당 쪽에서는 "정부 산하 주요 기관장 등의 임기 보장은 직무의 독립성과 공정성을 보장하기 위한 것"이라며 "단지 구 정권이 임명했다는 이유만으로 옥석 구분 없이 이들을 모조리 내쫓는다면 이는 법적·제도적 취지를 무시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더욱이 정부기관도 아닌 문화계·학계 인사들까지 퇴진 대상으로 거론한 것은 '신 공안정국 조성'이라는 비판을 받아 마땅하다고 지적한다.

특히 새 정부가 김대중·노무현 좌파 정권에서 이뤄진 제도와 법안을 정비하겠다고 나선 것은 민주적 선거로 탄생한 정부를 일방적으로 좌파로 폄하하는 색깔론에 불과하다고 꼬집는다.

한나라당이 원내 1당이나 제1야당으로서 참여해 만든 법과 제도를 "좌파적이어서 정비하겠다"고 주장하는 것은 스스로를 부정하는 일이라는 것이다.

게다가 코드인사,낙하산인사를 비난해온 한나라당 정권이 임기제를 허물어 가면서까지 그 자리를 또다시 총선 낙천·낙선자들로 채우려는 것은 '선진화'와는 거리가 먼 구시대적 행태라고 지적한다.

⊙ 찬성 측, "정치적 이념·가치관·철학 다른 인사들 물러나야"

이에 대해 여당 쪽에서는 "현 정권과 전 정권은 정치적 이념이나 가치관,철학 등에서 큰 차이가 있는 만큼 전 정권 인사가 그대로 머물러 있다는 것은 정치도의상 용납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더구나 그들 중 상당수는 능력이 검증되지도 않았고 코드·정실 인사로 발탁됐으며 재직 중 물의를 빚거나 해당 기관의 명예를 실추시키는 등 일찌감치 물러났어야 할 인사도 있다는 것이다.

그런 인물들이 임기제를 내세우며 자리를 보전하겠다는 것은 임기제의 취지를 훼손하는 것이라고 지적한다.

임기제란 대통령의 무분별한 개입이나 간섭을 방지하기 위해 도입한 제도이지, 전 정권 사람이 새 정권의 국정을 가로막으라는 취지는 아니라는 얘기다.

정치선진국에서 대통령 교체와 함께 임기직 공직자의 교체를 명문화한 것도 그러한 맥락이라고 강조한다.

때문에 안과 밖에서 임무 수행과 조직 경영에 하자가 많다는 평가를 받는 인사는 임기라는 방패 뒤에 숨을 게 아니라 떠나는 것이 순리라는 입장이다.

⊙ 철저한 업무평가 통한 옥석가리기로 기관장 물갈이해야

정부 산하 기관장의 임기제는 보호돼야 마땅하다.

그러나 이들 자리 중 상당수가 큰 논란을 일으키면서 업무 경험이나 능력과는 무관하게 낙하산 코드인사로 채워졌음을 감안할 때 법에 보장된 임기만을 내세울 상황은 아니다.

다만 전 정권에서 임명된 공공기관장들을 모두 코드 인사로 모는 것은 문제가 있다.

경력이나 업무수행 능력에서 전문성을 인정할 수 있는 인물들까지 무차별적으로 솎아내는 것은 기관운영의 효율성을 높이는 데 오히려 역행하는 결과를 빚을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임기제 문제는 개개인의 케이스에 따라 판단도 달라져야 한다.

기관장들을 나름대로 평가해 옥석을 가리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얘기다.

임무 수행과 조직 경영에 하자가 많은 인물은 스스로 물러나는 게 올바른 처신이다.

낙하산 인사를 빼내고 또 다른 낙하산으로 채우는 일도 지양해야 한다.

전문적인 업무역량을 우선해 인사가 이뤄질 수 있도록 인재 풀을 확대하고 관련 절차 또한 개선해야 할 것이다.

이는 정권교체 때마다 되풀이되는 진통과 혼란의 고리를 끊기 위해서도 꼭 필요하다.

김경식 한국경제신문 논설위원 kimks5@hankyung.com


<용어풀이>

◆공공기관 운영에 관한 법률=공공기관 운영에 관한 시스템을 근본적으로 개선하기 위한 목적으로 2007년 1월1일 시행에 들어간 것으로, 공공기관의 자율 책임경영체제 확립과 경영합리화, 운영의 투명성 강화 내용 등을 담고 있다.

공공기관운영위원회가 경영감독과 평가를 하고, 주무부처는 사업감독만 함으로써 책임소재를 규명하도록 했다.

임기는 기관장 3년,기타 임원 2년으로 보장해주되 경영성과에 따라 1년 단위로 연임토록 했다.

◆코드 인사=능력 자질 도덕성,그리고 국민의 뜻에 관계없이 인사권자가 정치적 이념이나 성향 등이 비슷하거나 학연 지연 등으로 맺어진 인물을 공직에 임명하는 것을 말한다.

낙하산 인사라고도 한다.

◆엽관주의(Spoils system)=정당에 대한 공헌이나 인사권자와의 개인적 관계를 기준으로 공무원을 임용하는 인사 행정제도.

19세기 중반 미국 상원의원인 마시가 "전리품은 승리자의 것(To the victor belongs the spoils)"이란 발언에서 따온 것으로, 엽관제라고도 한다.

군주제에 맞서 의회주의를 확립하는 과정에서 정당이 국왕의 관리를 의회 봉사자로 바꾸기 위해 실시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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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경제 3월18일자 A2면>

오지철 한국관광공사 사장,정순균 한국방송광고공사 사장,신현택 예술의전당 사장 등 참여정부의‘코드 인사’를 이유로 퇴진 압력을 받아 온 문화체육관광부 산하 기관장들이 사직서를 제출했다.

문화부는 17일“오지철 사장을 비롯한 3명의 산하 기관장들이 일신상의 이유로 사직서를 냈다”며“사표 처리 여부는 아직 결정되지 않았다”고 밝혔다.

이들의 사직서 제출은 유인촌 문화부 장관이 ‘코드 인사’논란을 일으킨 문화예술계 기관장들의 사퇴를 촉구한 이후 처음으로,다른 기관장들의 추가 사퇴로 이어질지 주목된다.

문화부 관료 출신인 오지철 사장과 신현택 사장은 정치색이 옅은 인물들이어서‘코드 인사’와는 거리가 있다는 시각도 있다.

그런데도 사직서를 낸 것은 오랜 관료 생활의 경험에 비춰 ‘버티는 것’은 득이 될 게 없다는 판단을 내렸을 것으로 보인다.

문화부 관계자는 “관광공사 사장은 대통령이 임명권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사표 처리 여부를 알 수 없다”고 말했다.

반면 문화부 장관이 임명권을 가진 한국방송광고공사와 예술의전당 사장은 유 장관이 판단할 사항이다.

이들의 잇단 사직서 제출은 “임기가 끝날 때까지 사퇴하지 않겠다”고 공언해 온 김정헌 한국문화예술위원장이나 김윤수 국립현대미술관장 등에게 적지 않은 부담을 줄 전망이다.

민중미술 분야에서 오랫동안 활동해 온 김 위원장과 김관장은 문화예술계 내 진보-보수 세력 간 주도권 경쟁의 한 축을 형성하며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해 왔다.

이에 따라 김 위원장이나 김 관장의 향후 거취가‘코드 인사’를 둘러싼 갈등을 푸는 분수령이 될 가능성이 있다.

영화배우 문성근씨의 형수인 정은숙 국립오페라단장,신기남 열린우리당 전 의장의 누나인 신선희 국립중앙극장장 등은 거취에 대해 특별한 견해를 밝히지 않은 채 업무에 전념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서욱진 기자 ventur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