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중은 우매한 집단인가?

2002년을 기억할 때 가장 선명하게 떠오르는 잔상은 월드컵 경기에 환호하는 붉은색 군중들이다.

월드컵 분위기는 사회 전반을 휩쓸어 남녀노소 할 것 없이 한국인들을 모두 열광하게 하였다.

이때에는 평소라면 잘 일어날 법하지 않았던 사건들이 일어났고, 사람들은 모두 들떠있었다.

자긍심을 느낄 일도 많았고, 지탄받을 일 또한 많았다.

당시 일련의 사건들은 일상의 논리로는 잘 이해되지 않는다.

그런데 군중이 모였을 때 일어나는 현상에 대한 흥미로운 설명을 사회심리학의 고전인 '군중심리'에서 찾아볼 수 있다.

[고전속 제시문 100선] (78) 사회과학의 명저를 찾아서 ④ 구스타브 르 봉 '군중심리'
프랑스의 사상가 구스타브 르 봉(Gustave Le Bon,1841~1931)이 저술한 '군중심리'는 군중 심리학에 대한 괄목할 만한 연구저서로서 현대 사회심리학에 큰 영향을 미쳤다.

'민족발전의 심리학적 법칙'과 '프랑스 혁명과 혁명의 심리' 등 다양한 저서를 남긴 구스타브는 '군중심리'에서 개인의 합리성과 대비되는 맹목적이고 충동적인 군중의 특성을 부각시켰다.

군중은 개개인의 지성과 판단력을 상실하고 조종자의 암시대로 휩쓸려 움직이기에 믿을 수 없다고 구스타브는 설파한다.

'군중심리'는 제1부-군중의 마음,제2부-군중의 여론과 신념, 제3부-군중의 분류와 유형 총 3부로 이루어져 있는데 합리적이지 못한 군중의 심리와 사례, 그리고 이러한 군중을 이끄는 유인과 원동력은 무엇인지를 역사적 실증을 통해 다채롭게 보여주고 있다.

⊙ 원문읽기

일반적으로 군중이라 함은 개인의 집단을 말하며 국적이나 직업, 남녀의 구분, 모이게 된 동기에 구애받지 않는다.

그러나 심리적 관점에서 군중이라는 말은 다른 의미를 갖는다.

어떤 특수한 상황에서는 그리고 그런 상황에서만은 인간의 집단은 그 집단을 구성하는 개인의 성격과 전혀 다른 성격을 나타내게 된다.

집단화된 모든 개인의 감정과 사상은 하나의 동일한 방향을 향하게 되고 각자의 개성있는 의식은 종적을 감추며 새로운 집단심리가 발생한다.

이 집단심리는 일시적인 것이지만 명확한 특징을 보인다.

이같이 형성된 집단을 나는 '조직화된 군중'이라고 부를 것이며, 또는 '심리적 군중'이란 용어로 부르는 것도 무방하다고 생각한다.

군중은 단일한 개체를 구성하며 '군중의 정신일치 법칙'에 지배된다.

단지 다수의 개인이 동일한 장소에 우연히 모였다는 사실만으로 그들이 '조직화된 군중'이 되지 않는다는 것은 명백하다.

어떤 확고한 목적 없이 광장에 우연히 모인 개인들은 그 수가 1000명이라도 심리학적 측면에서 군중이 될 수 없다.

그들이 심리적으로 군중의 특성을 가지려면 어떤 근본적 원인의 영향력이 작용해야 하는데 우리는 그 원인의 본질이 무엇인지 규명해야 할 것이다. (중략)

집단 심리에 있어서 개인의 지능과 그 결과로 생겨나는 개성은 약해진다.

동질성이 이질성을 압도하고 무의식적 특성이 지배권을 행사한다.

군중이 공통적으로 평범한 자질을 갖는다는 사실 그 자체가 왜 군중이 고도의 지성을 요구하는 행동을 하지 못하는지를 설명해준다.

전반적인 이해관계에 영향을 주는 결정이 저명한 인사들의 모임에서 내려지고 있지만 그러나 제각기 다른 길을 걸어온 전문가들이기 때문에 이들의 결정이 우매한 사람들의 모임에서 내려진 결정보다 월등히 뛰어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이들은 다같이 평균적 인간의 범용한 자질로 그런 문제를 다루려 들기 때문이다.

군중 속에 누적되는 것은 우둔함이지 지혜가 아니다. 흔히들 볼테르보다 전 세계가 더 많은 지혜를 갖는다고 이야기 하지만 '전 세계'라는 것이 군중을 의미한다면 전 세계보다 엄연히 볼테르가 더 많은 지혜를 가진 사람이다.

▶ 해설

구스타브는 군중이란 개개인의 총합이 아닌 완전히 별개의 성격을 띠는 존재라고 설명한다.

개인의 심리와는 이질적인 집단심리가 형성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개인과 개인의 모임을 넘어서는 새로운 존재인 군중은 불행히도 고차원의 존재가 아니다.

구스타브가 만약 '중지(衆智)'라는 동양권의 표현을 알았다면 '군중심리'에서 이를 정면으로 공격하였을 것이다.

구스타브는 사람들이 모여서 현명해지는 것이 아니라 우매해진다고 주장한다.

군중은 그 구성원인 개인이 아무리 학식이 높고 현명하다 하더라고 '군중'으로서는 어리석을 수밖에 없다는 입장이다.

그는 "군중을 형성하는 개인의 정신적 자질은 고려돼서는 안된다.

군중에 합류하게 되면 개인의 자질은 중요하지 않다.

군중 속의 개인은 배운 사람이건 못 배운 사람이건 즉각 관찰능력을 상실한다"고 말하면서 전혀 모르는 익사체를 자기 자식이라고 주장하면서 슬퍼하는 유가족과 배 위의 나뭇더미를 구조를 요청하는 난민들로 본 사례를 들면서 군중의 집단적 환각 메커니즘을 설명한다.

구스타브는 대중 심리현상의 부정적인 측면에 주목하면서 이야기를 계속 끌어간다.

⊙ 원문 읽기

군중 속의 개인은 자기상실 상태이며 자신의 의지와 단절되어 버린 자동기계이다.

더구나 조직화된 군중에 참여했다는 사실 자체만으로 인간은 문명의 사다리 몇 계단을 내려와 버린다.

홀로 있을 때는 교양있는 사람들도 군중이 되면 본능에 움직이는 야만인이 되어 버린다.

그는 원시인의 자발성과 난폭성을 보이면서 나아가서는 광신과 영웅주의를 따른다.

심지어는 홀로 있을 때의 개인에게는 전혀 영향을 끼치지 못했을 언어와 이미지에 감화됨으로써 가장 명백한 자신의 이익을 해치거나 누구나 인정하는 주지의 관습을 위배하는 행동을 서슴지 않는다.

군중 속의 개인은 수많은 모래더미의 한낱 모래알 같아서 바람결에도 맥없이 흩날린다. (중략)

홀로 있는 개인의 경우 아무런 자극이 되지 않을 반감이나 불복의 표명도 군중 속의 개인에게는 분노의 발단이 된다.

특히 이질적 군중일 때 군중 감정이 격렬해지는 것은 책임감이 없기 때문이다.

처벌을 모면할 수 있다는 확실성, 군중은 수가 많으면 많을수록 강하다는 확실성, 숫자에서 오는 막강한 순간적 세력에 대한 생각 때문에 고립된 개인의 경우에는 상상할 수도 없는 감정과 행동이 군중으로부터 폭발하는 것이다.

우둔하고 무식한 그리고 질투에 찬 사람들도 군중에 끼게 되면 열등감과 무력감에서 해방돼 거칠고 감정적으로 변모하여 막강한 힘을 느끼게 된다.

▶해설

구스타브는 군중 속에 있는 사람들이 난폭해지는 이유를 격세유전의 영향이라고 설명한다.

군중이 되면 원시인의 본성이 튀어나온다는 것이다.

군중이 난폭하고 위험해지는 것은 세 가지 특성들 때문인데, 숫적 우세와 감염성, 피암시성이 그것이다.

군중은 다수의 힘을 믿고 공격적으로 변모하며, 다른 사람들이 말하는 바에 쉽게 감염된다.

그리고 암시에 조종을 받기 때문에 군중은 한층 더 위험한 존재가 된다. 조종자가 훌륭한 사람이라면 군중은 옳은 일을 하지만, 그 반대라면 군중은 파괴적이고 극악한 행위를 서슴지 않는다.

즉 군중은 단순하고 맹목적이어서 어떻게 움직여지느냐에 따라 행방이 극과 극을 오가게 된다.

구스타브의 설명에 의하자면,

'군중에 작용하는 유인이 다양하고 군중은 항상 이를 맹종하기 때문에 군중은 지극히 유동적이다.

따라서 군중의 특성은 가장 살벌한 잔인성에서 가장 극단적인 관용 또는 영웅주의로 순식간에 변신해 버린다.

군중은 쉽게 처형자의 역할을 맡는가 하면 또 쉽게 순교자가 된다.

온갖 신념의 승리를 위해 유혈참극을 연출한 것도 항시 군중이었다.'

그래서 구스타브는 리더의 역할을 크게 강조한다. 리더의 권위와 위엄은 군중을 움직이는 원동력이다.

비이성적인 군중의 특성상,군중은 지도자의 신비한 분위기와 설명하기 힘든 힘에 압도되어 움직인다.

'군중심리'는 군중심리와 발현의 다양한 면모를 조명하고 있지만, 전반적으로 군중에 대해서 부정적인 판단을 내리고 있다.

앞서 기술한 군중의 특성으로 인해 군중은 본질적으로 합리적이거나 도덕적일 수 없고, 전혀 무책임하다는 것이 '군중심리'의 골자다.

그래서 저자는 배심원제 및 민주주의에 대해 극히 회의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다.

군중을 폄하하는 '군중심리'의 시각을 모두 다 받아들이기는 곤란하지만, 개인과는 별개의 존재인 군중에 대해 새로운 접근을 시도하고 이를 역사적 다양한 실례로 풀이했다는 점에서 '군중심리'는 사회심리학의 원류로서 독보적인 가치를 지닌다.

홍보람 s·논술 선임연구원(nikehbr@nonsu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