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禮)가 아니면 보지도, 듣지도, 말하지도, 행하지도 말라

[고전속 제시문 100선] (73) 동양고전의 세계를 찾아서 ③ 論語
"To be or not to be, that is the question."

햄릿의 유명한 이 대사가 가장 잘 어울리는 동양 사상가는 단연코 공자이다.

원전의 문맥과 공자의 철학이 사실 상관이 없기는 하나,언어유희를 즐기는 셰익스피어가 만약 「논어」를 읽었다면 무릎을 치면서 이 대사를 공자에게 헌정했을 것이다.

머리가 짱구여서 이름이 구(丘)라는 재미있는 속설도 떠도는 공자(본명 孔丘,자는 仲尼)는 일고의 의심도 없는 확고한 신념을 바탕으로 그의 사상을 구축했다.

본시 모든 철학이 눈앞에 펼쳐진 세상에 대한 '주관적 해석'이라는 점에서 제 아무리 냉철함과 논리로 무장한 '철학'이라도 결국은 '신념의 체계'로 환원하기는 하지만,공자의 사상은 그 '믿음'의 색채가 유난히 두드러진다.

공자는 인간을 믿었고,인(仁)과 예(禮)를 믿었고,도덕을 믿었고,그 도덕에 기반한 덕치를 믿었다.

'믿었다'라는 표현을 반복하는 이유는 공자의 언행을 기록한 「논어」에서 공자가 상대를 감화하고자 한 바는 있어도 정교한 철학적 논변을 펼친 적은 없기 때문이다.

어떤 면에서 보자면,공자는 치밀한 논리를 갖춘 사상가라기보다는,도덕적 계몽가였다.

공자가 평생에 걸쳐 주장한 바를 압축하면 간명하다.

본연의 인성은 선(善)하다는 것과 선으로 나아갈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태어난 인간은 도덕적인 존재로 완성되기 위해서 노력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즉,올바른 길(正道)로 나아가느냐 마느냐의 문제가 있을 뿐이지 다른 점은 고려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To be or not to be",올바른 인간이 되느냐 마느냐,공자에게는 정녕 이것이 진정한 문제였다.

동양 사상에서는 전반적으로 악(惡)이 크게 문제시되지 않는다.

반면,서양에서의 악(惡)은 선(善)과 대비되는 뚜렷한 실체이다.

서로 대립하고 충돌하는 선과 악이라는 이분법적 관념은 서양문화 전반에 스며들어 있는데,조로아스터교의 아후라마즈다와 앙그라마이뉴의 싸움도 그러한 세계관의 표출이며,신과 악마라는 흔한 비유도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동양 사상,그 가운데에서도 특히 공자에게 있어서는 악은 선이 결여된 상태일 따름이다.

이 세상에 유일하게 존재하는 것은 선이며,선을 제외한 다른 실체란 상정할 수 없다.

그래서 공자에 의하면 이 세상에 본성적으로 악한 이는 있을 수가 없다.

악이란 애당초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인성이란 원래가 선하므로,선하지 못한 사람은 인간으로서의 본성을 자각하지 못하거나 올바른 길에서 벗어나 헤매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핑가레트가 「공자의 철학」에서 분석하였듯이,공자에게는 '선택'이라는 개념이 존재하지 않았다.

여러 개의 길에서 특정한 하나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유일하게 주어진 하나의 길을 제대로 가느냐 못 가느냐 하는 것이 문제가 된다.

사람으로 태어난 이상 누구나 선하고 올바른 인성을 깨닫고 이의 완성을 위해 부단히 노력해야 한다.

그리고 인간으로서의 바른 길을 걷기 위해 공자는 '예'를 철저히 지키며 살아야 한다고 다음과 같이 말한다.

⊙ 원문읽기

제자 안연이 인(仁)에 대해 묻자,공자가 대답하였다.

"자기의 사사로운 욕심을 이겨 언행이 예(禮)에 합치되면 그것이 바로 인(仁)이다.

하루라도 그렇게 한다면 온 세상이 인(仁)을 따르게 된다.

인(仁)을 실천하는 것은 자기 자신에게 달린 것이지,다른 사람에게 달린 것이 아니다!"

안연이 좀 더 상세한 실천 조목을 부탁하자 공자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예(禮)가 아니면 보지 말며,예(禮)가 아니면 듣지 말며,예(禮)가 아니면 말하지 말며,예(禮)가 아니면 행하지 말라."

해설=인간 앞에 놓인 유일한 길인 도의를 좇기 위해서는 응당 '예'를 배우고 실천하여야 한다는 의미다.

'예'란 인간과 짐승을 구별 짓는 가시적 잣대이자,진정한 인성을 개발하기 위해 필수적인 요소이다.

공자는 교육을 강조하였는데,이는 공자가 인간을 출생 때부터 완벽한 인성을 가지고 태어난 존재로 보지 않고 교육과 도덕적 자각을 통해 완성되는 질료로 파악하였기 때문이다.

인간이 걸어나가야 하는 올바른 길을 제대로 걷기 위해서는 반드시 가르치고 배워야만 하였고,그 학습의 중심에는 '예'가 있었다.

그런데 성선설을 주장한 여타 사상가들에 비해 유독 공자가 '예'를 강조한 이유는,군사·경제적으로는 약소하였으나 문화적으로는 세련되었던 노(魯)나라 출신이라는 배경이 작용했다는 분석도 있다.

인구도 적고 영토도 협소한 노나라는 힘의 논리가 지배하는 춘추전국 시대에 많은 고난을 겪었다.

공자는 주(周)나라의 전통 예식과 문화를 전수받은 자국이,(공자 눈에 비치기에는) 야만국들의 등쌀에 고생하는 것이 무척이나 못마땅하였을 것이다.

자국에 대한 애착과 울분으로 공자는 노나라의 상대적 장점이었던 예식과 문화를 더욱 강조하였을 것이다.

게다가 유가사상의 '유(儒)'는 제례 의식을 주관하는 상형 문자라는 유력한 분석과,공자 자신이 젊은 시절 제사를 담당하는 관리였다는 점은 공자의 유가사상과 예식이 갖는 깊은 연관성을 한층 더 강화한다.

그러나 공자의 '예'가 단순히 '형식'에 그치지 아니함은 공자의 여러 언행에서 거듭 확인할 수 있다.

⊙ 원문 읽기

자공이 공자에게 정치에 대해 묻자 공자가 대답했다.

"먹을 것을 충분히 하고 병력을 충분히 하며 백성들이 정부를 신뢰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자공이 물었다.

"어쩔 수 없이 하나를 버린다면 그 세 가지 중 어느 것을 버려야 합니까?"

"병력을 버려라."

자공이 다시 물었다.

"어쩔 수 없이 나머지 둘 중 또 하나를 버려야 한다면 무엇을 버려야 합니까?"

공자가 대답하길,"식량이다.

옛날부터 인간은 모두 죽음을 맞이해 왔으니 굶어 죽는 일은 큰 일이 아니다.

그러나 백성의 믿음이 없으면 정부는 세워질 수가 없다"라고 하였다.

해설=공자는 인간에 대한 확고한 '믿음'을 가졌다.

그 믿음이란,인간은 육신과 재산의 해로움을 보더라도 도덕적 선을 추구하는 살신성인(殺身成仁)의 자세를 견지한다는 것이다.

간단히 말해 공자 사상의 또 다른 요체인 '덕치'이다.

그런데 일견 도덕을 강조한 공자의 사상이 사회를 운영하는 원칙을 제공할 수 있는지 의문이 들 수도 있다.

개개인의 수신은 미시적인 일이고,사회의 운영은 거시적 차원에서 접근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하지만 공자가 개인의 도의를 설파하면서 그를 통해 사회를 구제할 수 있다고 한 이유는,한 개인의 덕이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미치고,사회 전체를 교화시킬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이는 다음과 같은 구절에서 명백히 드러난다.

⊙ 원문 읽기

1. 계강자가 공자에게 정치에 대하여 물었다.

"만약 무법자를 죽여 없애고 백성들로 하여금 올바른 도를 지키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한다면 어떠하겠소?" 공자가 대답하였다.

"그대는 나라를 다스리겠다고 하면서 어찌 살인을 하시려고 하십니까?

당신이 선을 원하면 백성들도 착하게 되는 것입니다.

군자의 덕은 바람과 같고 소인의 덕은 풀과 같은 것이라 풀은 바람이 불면 반드시 바람에 쏠리어 따르게 마련입니다."

2. 위정자 자신이 올바르면 명령을 내리지 않아도 만사가 이루어지고 위정자 자신이 올바르지 못하면 비록 아무리 호령한다 해도 백성들이 따르지 아니한다.

(중략) 위정자 자신을 올바르게 하면 나라를 통치하는 데 무슨 어려움이 있겠는가?

그러나 그 자신을 올바르게 하지 못 하면 어찌 다른 사람을 올바르게 할 수가 있겠는가?

3. 백성들을 행정명령을 통해서 지도하고,형벌을 써서 강제하면 백성들은 조문에 규정된 죄만 짓지 않으려 할 뿐이지 진정으로 부끄러워하는 마음은 오히려 사라지게 된다.

그러나 백성들을 이끌기를 덕(德)으로써 하고 예(禮)를 써서 그들을 규율한다면 백성들은 부끄러워할 줄 아는 마음을 가질 뿐 아니라 진심으로 따르게 된다.

해설=공자는 군자의 도덕적 실천이 사회 전반을 감화하고 계도할 수 있다고 믿었다.

따라서 공자에게 있어서는 군자를 육성하는 것이 곧 사회를 원활히 운영하는 길이 되었다.

공자는 군자라는 도덕적 지식인이 사회를 구제하고 이끌어가는 핵심 주축이 된다고 설파하였다.

이는 여러 면에서 공자의 철학이 비판 받는 이유를 제공하였다.

혼란한 사회를 반성하고 인간 본성인 선으로 돌아가자는 공자의 외침에 사회 유신(維新)은 선량한 군자의 영향만으로는 불가능하다는 냉정한 비판이,도덕적이고 고상한 군자의 위선을 꼬집는 조소와 함께 이어졌다.

특히 공산주의가 유행하던 시절에는 공자의 정명론과 군자 우선론이 차등 없는 사회를 주장하던 마르크스주의자들에게 신랄한 공격을 받았다.

공자의 사당이 곳곳에서 불태워지는 등 공자의 사상에 대한 반감은 격렬하였다.

한동안 잠잠하던 공자 비판은 1970년대 초 중국에서 양영국,곽말약 등을 중심으로 다시 일어난다.

생존 당대의 춘추전국시대를 천하무도(天下無道)의 위기 상황으로 파악하였던 공자는 노나라의 문화 전수자이자 그가 생각한 이상적 국가인 주나라 시절로 돌아가기를 주장하는 복고적인 역사관을 보여주었다.

"나는 무척 노쇠해졌나 보다.

오랫동안 주공(周公)을 꿈에서 만나 뵙지 못하였도다!"

라며 한탄할 만큼 공자는 이상적인 주례의 복귀를 염원하였다.

하지만 1970년대 양영국을 위시한 학자들은 '유법투쟁사관'이라는 새로운 역사 해석을 하면서 공자의 진부함을 다시 한번 비판한다.

사회가 변하면 사회를 다스리는 원칙도 변화해야 한다는 법가 사상은 진보적이며,그에 반하는 유가는 보수반동이라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도 근래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는 책이 인기를 끌었고,이에 반박하는 「공자가 살아야 나라가 산다」는 책이 나오면서 공자를 둘러싼 격론은 끊이지 않고 있다.

이러한 격론의 소용돌이 가운데 공자는 아직 숨쉬면서 살아있다.

공자를 좋아하든 싫어하든 그의 철학을 다시금 되새겨 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인간은 무한한 도덕적 가능성을 가진 존재일까,아니면 지난 주에 정리한 법가처럼 이기적이고 제약적인 존재일까?

그리고 객관적인 제도에 의한 통치가 바람직한 것일까,아니면 도덕으로써 마음을 감동시키는 것이 올바른 정치일까?

역시 자신의 세계관,그리고 하루하루 자라나는 자신의 철학에 물어보아야 할 것이다.

홍보람 S·논술 선임연구원 nikehbr@nonsu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