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속 제시문 100선] (72) 동양고전의 세계를 찾아서 ② 韓非子
인간 본성은 원래 이기적,

평화와 안정위해서 법치가 바로 서야

제자백가(諸子百家)의 태동은 중국 춘추전국시대의 난세에서 비롯하였다.

끊임없는 전쟁과 정변으로 나라의 주인과 국경이 하룻밤 새 바뀌는 혼란한 시대에 사람들은 평화롭고 안정된 세상이 도래하기를 바랐다.

그러나 '평화와 안정'을 구현하기 위해 강구한 방안은 사상가마다 제각기 달랐다.

그 가운데 법가(法家)는 가장 현실적인 관점을 보여준다.

[고전속 제시문 100선] (72) 동양고전의 세계를 찾아서 ② 韓非子
법가 사상가들은 지나친 이상주의적 태도를 배격하고,확실한 실효성이 보장되는 방책에 의거하여 국가를 운영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들은 '사람'에 대해 정도 이상의 기대를 걸지 않았다.

탁월한 현인이 출현하여 세상을 구원할 것을 바라거나,세상 사람들이 어느 날 갑자기 선량하고 도덕적으로 변모하기를 기대하지 않았다.

오히려 법가 사상가들은 인간 본성이란 원래 이기적이라는 기본 전제에서 출발한다.

기원전 3세기 전국시대 말기에 법치주의를 주장한 『한비자(韓非子)』는 그런 의미에서 인간 세상을 제대로 꿰뚫어 보아,현대 사회의 운영 원리와도 맥이 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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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속 제시문 100선] (72) 동양고전의 세계를 찾아서 ② 韓非子
무릇 백성들의 본성은 힘든 것을 싫어하고 편히 노는 것을 좋아한다.

그들이 편히 놀면 나라가 황폐해진다.

나라가 황폐해지면 사회의 안정을 찾을 수 없다.

사회가 안정되지 않으면 필시 혼란해지게 마련이다.

그래서 상(賞)과 벌(罰)을 천하에 실시하지 않으면 나라의 운명이 다하게 된다.

해설=유가 내지 묵가 사상가들이 인간의 '타락'에 개탄하면서 인간 도덕성의 '회복'을 강조할 때,법가는 인간 본성이란 본디 도덕적이지 않고 이기적이라고 단언한다.

인간 본성이 그러할진대 인간의 도덕에 호소하는 덕치(德治)는 그 부자연스러움으로 인해 필연적 한계와 맞닥뜨릴 수밖에 없다.

이처럼 법가 사상가들은 상벌로 대표되는 법치의 필연성을 인간 본성에서 이끌어 내었다.

본성이 이기적인 인간에게 어울리는 것은 강제성을 띤 법에 의한 통치이지,(허구에 불과한) 내면의 도덕성에 기반하는 자율적 사회 운영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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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안하고 이로우면 그쪽으로 나아가고,위험하고 해로우면 물러나 피하려는 것이 사람의 본마음이다.

나라의 신하가 되어 온 힘을 다해 공을 세우고 지혜를 다하여 충성을 바쳐도 일신이 고달프고 집안이 가난하면 피해를 보는 셈이다.

반면에 간교한 이득을 내세워 군주를 현혹하고 뇌물을 써서 지위가 높고 세력이 있는 대신들을 받들면 자기 몸도 높아지고 집안도 부유해지니 혜택을 보는 셈이다.

사람들이 어찌 편안하고 이로운 길을 버려두고 위험과 해악의 길로 달려가겠는가?

나라를 다스림에 이런 과실이 있다면 위에서 다스리는 자가 아래에서 일하는 이들이 나쁜 짓을 하지 않기를 바라는 것이 불가능함은 명백하다.

해설=계산적이고 이해타산적인 존재인 인간은 자신의 이해관계에 따라서 움직이게 된다.

한비자는 인간의 자연스러운 본성에 위배하는 숭고한 도덕과 사명감에 기대어 사회를 운영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고 보았다.

이는 불가능한 일일 뿐더러,개인에게 지나친 희생을 강요한다는 것이다.

계산을 할 때 추정되는 '이득'이 크도록 하여 사람들을 움직이고,'해악'을 미리 알려 저지함이 가장 합당한 사회 운영 방식이라고 한비자는 주장한다.

한비자는 현실적인 감각에 기반한 실리주의적 인간관을 기본으로 삼고 있다.

그런데 흔히 '법가' 사상에서 떠올리는 냉엄한 인상은 법가 사상의 철저한 현실성에서 기인한 일면을 지나치게 확대 해석한 것이라 볼 수 있다.

특히 다른 법가 사상가인 상앙을 지나치게 냉혹하다고 비판한 한비자는 무조건 엄한 형벌만 내세워 국정을 꾸리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 여겼다.

한비자에게는 실리를 따지는 인간의 계산적 합리성에 근거한 국정이 타당하였던 것이지,공포정치는 이상주의 정치관에 못지 않는 문제점이 있었다.

세상의 '평화'와 사회의 '안정'을 위한 법치를 주장하던 한비자는 인간 개인의 본성에 관해 냉철한 시선을 보인 것과 마찬가지로 사회 일반에 대해서도 객관적이고 예리한 통찰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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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왕의 대명사인) 요 임금과 순 임금,(악명 높은) 걸 임금과 주 임금 같은 이들은 천년에 한 번 나와도 이는 연달아 이어서 무더기로 많이 나온 셈이다.

세상의 통치자는 중(中)급 인물이 끊이지 않는다.

내가 '세(勢)'를 말하려는 것은 중급 인물들을 대상으로 한 것이다.

중급 인물은 위로는 요나 순 같은 성군에 못 미치고 또한 아래로는 걸이나 주와 같은 폭군 수준은 아니다.

'법(法)'에 근거하여 '세(勢)'를 대하면 다스려지고,'법(法)'을 어기고 '세(勢)'를 버리면 혼란을 일으키는 것이다.

(중략) 무릇 '세'란 쓸 만한 것임은 또한 자명하다.

그러나 "반드시 현인을 기다려야만 한다!"라고 말한다면 타당하지 않다.

장차 좋은 밥과 고기를 먹기 위해 백일 동안 먹지 않으면 지금 굶고 있는 자는 살아나지 못한다.

지금 요나 순의 현명함을 기다려 당세의 백성을 다스리는 것은 좋은 밥과 고기를 기다려 허기를 채우겠다는 것처럼 허망한 말이다.

사람들은 "좋은 말과 튼튼한 수레는 무식한 종놈들이 몰면 세상의 비웃음을 사게 된다.

왕량(옛날의 유명한 말몰이꾼)이 몰면 하루에 천리를 달릴 수 있다"고 말한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남쪽 머나 먼 나라인 월나라의 헤엄 잘 치는 사람을 기다려서 중원 땅에서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하려 한다면 멀리 있는 월나라 사람이 비록 수영은 잘 해도 지금 여기 중원 땅에서 물에 빠진 사람은 구해낼 수가 없다.

옛날의 왕량이 다시 태어나기를 기다려 지금 눈 앞에 있는 말을 몰게 하는 것은 월나라 사람으로 하여금 중원땅에서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하게 한다는 말과 같은 이치이나 그 옳지 못함이 자명하다.

좋은 말과 튼튼한 마차를 50리에 하나씩 배치해 두면 보통 사람이 몰고 가도 먼 곳까지 빨리 갈 수 있다.

왜 반드시 옛날의 왕량 같은 특출난 이가 나타나 천리를 가기를 기다려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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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술을 버리고 사람들의 마음에 호소하는 정치를 하려 한다면 요 임금이라 할지라도 한 나라를 바로잡지 못한다.

자(規)로 재지 않고 제멋대로 마음으로 추측해서 일을 한다면 유명한 제작공인 해중이라 하더라도 수레바퀴 하나를 제대로 만들 수 없다.

척촌(尺寸)과 같은 길이의 단위를 폐해서 기준을 찾을 수 없다면 아무리 뛰어난 기술자라도 물건을 만들 수가 없다.

보통 인물인 중급(中級)의 군주로 하여금 법술을 지키게 하고,서툰 장인으로 하여금 자를 사용하여 척도에 따라 물건을 만들게 한다면 절대로 실패하는 일이 없을 것이다.

현명하고 교묘한 사람이라도 할 수 없는 어렵고 힘든 일을 바라지 말고,보통의 군주나 서툰 기술자라도 절대 실패하지 않는 법도를 지키게 한다면 인력을 최대로 활용하여 재주를 발휘할 수 있고,나라의 공과 군주의 명성이 세워진다.

해설=한비자가 제도로써 사회를 다스리자는 법치를 주장한 것은 인간의 본성이 이기적이라는 이유 하나만은 아니다.

인간의 능력은 제한적이고,세상에는 그저 그런 '보통 사람'이 넘친다.

그런데 탁월한 개인적 능력에 의해 사회를 운영하자는 것은 곤란한 일이다.

사회 일반이 '보통'의 갑남을녀가 대다수인데 현명한 사람이 출현하기만을 기다린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한비자는 보통의 사람 누구나가 쉽게 세상을 살아갈 수 있는 방법으로서 공평무사한 제도에 의한 법치를 말하였다.

요즘 말로 하면 시스템이다.

한비자를 비롯한 법가사상이 '사람'을 믿지 못하는 비인도적이고 전체주의적인 사상이라는 평도 일견 받지만 그 반면에 누구나가 큰 희생이나 노력 없이 따를 수 있다는 장점도 충분히 발견할 수 있다.

法家사상의 대표자인 한비자는 평탄한 인생을 살지는 못했다.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는 방대한 『韓非子』(55권 20책)를 집필한 주된 계기도 그가 말더듬이여서 언술로는 뜻을 풀어내기가 힘들었기 때문이다.

그의 사상에 매력을 느낀 진(秦)나라 왕의 부름을 받았으나 한(韓)나라의 서자라서 한을 위해 종래에는 진을 배신할 것이라는 모함을 받고 옥중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하지만 그가 해석한 인간의 본성과 사회 일반의 본면은 아직도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우리는 인간을 믿는 덕치를 할 것인가,인간의 한계를 인정하는 법치를 할 것인가? 이는 각자의 세계관에 물어보아야 할 일이다.

홍보람 S·논술 선임연구원 nikehbr@nonsu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