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수다쟁이 증후군

데니스는 14세 소녀다.

뇌수종이라는 병을 앓고 있는데 척추기형으로 뇌의 성장이 억제되기에 뇌수종을 앓고 있는 아이들은 심한 지진아다.

혼자서 일상생활을 하기 어렵다.

그렇지만 지진아인 데니스는 말을 매우 잘한다.

"우리 엄마는 병동에서 일해요.

엄마는 "다시 이런 은행통지서가 오면 안돼"라고 했어요.

나는 말했죠,"이틀만에 두 번째예요."

그랬더니 엄마가 "내가 점심시간에 너 대신 은행에 갈까?" 하셨고,나는 "아니에요,이번에는 내가 직접 가서 설명할래요"라고 말했죠.

무슨 일 때문이냐면요,내가 거래하는 은행은 한심해요.

그 사람들이 내 예금통장을 분실했대요.

나는 도저히 찾을 수가 없잖아요.

나는 티에스비 은행과 거래하는데,은행을 바꿔야겠어요.

정말 한심하잖아요.

그 사람들은 자꾸만 분실해요.

(…) 티에스비는 수탁인들이,사실 거래하기에 좋은 곳은 아니에요.

절망적이에요."

데니스는 혼자 은행에 갈 수도,숫자를 확인하지도 못한다.

이 모든 말은 죄다 거짓이지만 이렇게 논리적으로 말한다는 사실 자체가 믿기 어렵다.

데니스와 같이 뇌수종을 앓고 있는 이들 중에는 다른 정신능력은 현격하게 낮지만 언어는 오히려 평균보다 유창한 경우가 종종 있다.

이를 '수다쟁이 증후군'이라고 한다.

언어 능력을 담당하는 뇌의 특별한 구역을 찾고자 하는 과학자들에게 데니스와 같은 백치 수다쟁이는 귀중한 연구자료다.

반대의 경우도 있다.

흔히 중풍으로 알려진 뇌졸중은 뇌의 핏줄이 터져 뇌 일부가 손상돼 발생한다.

유능한 엔지니어가 갑자기 뇌졸중에 걸려 말을 제대로 못하는 경우였다.

말을 못한다고 해도 성대나 구강근육에 이상이 있는 건 아니다.

정상적인 문법을 구성하지 못하고 자동차나 의자 같이 너무나 일상적인 단어를 떠올리지 못해 애를 먹었다.

세 살배기보다도 유치하게 말한다.

그러나 자신의 업무와 관련해서는 복잡한 작업을 순서대로 정확하게 해낸다.

이론적으로는 메스와 거즈라는 단어를 말하지 못하는 뇌졸중에 걸린 외과의사가 수술을 해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 인류학적 유언비어

"에스키모인들은 눈에 대한 수 백 가지의 어휘를 갖고 있다."

수능 문제의 제시문에도 나온 적이 있고 교과서에까지 등장하곤 하는 이 이야기는 순 거짓이다.

한 사전에서는 에스키모인들의 눈에 대한 어휘 수를 2개로 적고 있다.

전문가들이 후하게 셈하여 약 10개 정도로 제시한다.

하지만 우리말에도 함박눈,싸락눈,진눈깨비,찰눈,메눈처럼 다양한 단어가 있다.

영어만 해도 눈을 가리키지만 어근이 다른 단어가 10개나 있다고 한다(우리말도 한자 설(雪)의 파생어를 더하면 이에 뒤지지 않는다).

사람들이 잘 모르는 지역이나 종족의 예를 과장하여 떠벌리는 이야기를 인류학적 유언비어라고 한다.

다른 유언비어와 달리 일반인들은 확인할 수 없는데다 전문가와 언론을 통해 윤색되고 나면 사람들은 이런 유언비어를 아무런 의심 없이 받아들인다.

남들이 잘 모르는 신기한 이야기는 자기만 아는 교양이다.

"어느 종족이 어쨌다"는 이야기들은 다른 관점을 갖고 현장을 조사하는 학자들에 의해 전혀 사실이 아닌 것으로 밝혀질 때가 많다.

에스키모인들이 눈에 대해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단어를 갖고 있다는 이야기는 흔히 믿는 상식이지만 바로 인류학적 유언비어 중 가장 유명한 사기로 꼽힌다는 것도 알아둘 필요가 있다.

(스티븐 핑커 '언어본능')

⊙ 단어와 사고

[오태민의 마중물 논술] (36) 언어가 결정한다. 뭘 말이야?
"언어는 지역의 문화와 전통을 담는 그릇이며 나아가서는 사고를 결정한다.

고로 언어를 상실하는 것은 문화와 전통의 상실이자 사고의 단절을 의미한다.

" 날조된 줄도 모르고 에스키모 눈 이야기를 들먹일 때 펴는 주장이다.

또 '푸르스름하다'나 '퍼렇다'는 단어도 덧붙인다.

영어에 대응하는 말이 없어 우리의 사고를 전달하기는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한다.

[오태민의 마중물 논술] (36) 언어가 결정한다. 뭘 말이야?
즉 '푸르스름하다'와 '퍼렇다'를 상실하는 건 대응하는 사고와 색감의 실종을 의미하며 이는 인류 정신문화의 훼손이란 것이다.

색의 연속적인 변화를 보여주는 팔레트를 펼쳐놓고 '푸르스름'과 '퍼렇다'에 가장 가깝다고 여겨지는 영어 단어를 들은 영어 화자가 지적하는 색의 구간은 한국인의 그것과 다르다.

영어 화자에게는 이에 해당하는 색감과 개념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퍼렇다'와 '푸르스름'을 들은 한국인들이 지적하는 색의 구간은 일치할까?

혹은 이 두 단어가 가리키는 구간은 팔레트 좌표에서 명확하게 구별될까?

영어권 화자와 일치하는지를 따지기 전에 한국인들끼리는 문제의 단어들이 불러일으키는 개념이 얼마나 일관성 있는지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언어의 전달이 문제이기 전에 개념 자체가 미묘하다는 말,한(恨)을 번역할 수 없다고 하지만 한국 사람이라 할지라도 한을 이해하기 어렵고 이해했다고 주장하는 경우에도 그 해석의 차이가 크다.

⊙ 피진어,크리올어

하와이의 사탕수수농장은 중국·한국·일본인들의 이민을 끌어들였다.

대농장은 혹독한 노동으로 악명 높았지만 언어학적으로는 매우 유용한 실험을 유산으로 남겼다.

전혀 다른 언어가 모국어인 사람들이 모여서 만든 사회에서는 어떤 말을 할까?

이 때 발달한 언어가 피진(pidgin)어다.

영어가 공용어라 해도 일본어가 모국어인 이들과,중국어를 모국어로 쓰는 이들,그리고 하와이 원주민들의 영어는 서로 다르다.

사실 영어 단어가 몇 개씩 섞이는 것 말고는 이들의 말을 영어로 보기 어렵다.

쉽지 않지만 그래도 서로 의사소통을 해낸다.

피진어는 콩글리시를 생각하면 된다.

더 신기한 건 크리올(creole)어다.

피진어를 쓰는 부모 밑에서 자라는 2세들은 부모와 달리 모국어가 없다.

언어라고 보기도 어려운 피진어를 사용하면서 일본인 2세들과 하와이 원주민 아이들은 공통의 언어를 창조해 낸다.

당연히 영어는 아니다.

크리올어를 연구한 언어학자들은 경이로운 사실을 발견한다.

문법다운 문법도 없고 일관성도 없는 피진어가 20년 만에 완벽한 언어로 다듬어진다.

크리올어는 독립된 언어지만 유치한 언어가 아니다.

전통을 자랑하는 영어나 프랑스어와 비교해도 손색없는 구조와 우아함을 갖추고 있다.

이 신생어를 갖고 복잡한 법률과 과학 논문을 쓸 수 있고 심지어는 시와 소설을 지을 수도 있다.

아이들은 어른들의 조각난 언어를 이어 붙여 단 한 세대 만에 유려하고도 독립된 언어를 창조해낸다.

⊙ 언어는 위계적이다

한글 워드프로그램 '아래아 한글'에는 저장기능이 있다.

사용자들은 저장기능이 '아래아 한글'의 프로그램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저장기능은 아래아 한글이 아니라 이를 구동시키는 밑단의 프로그램 기능이다.

현재 대부분은 마이크로소프트사의 윈도 시리즈가 아래아 한글이 구동되는 바탕이다.

프로그래머가 아래아 한글을 만들면서 아래아 한글이 수행하는 모든 기능을 새로 프로그램하진 않는다는 말이다.

사용자는 아래아 한글이 하는 일로 알지만 아래아 한글 같은 응용 프로그램(application program)은 사용자의 명령을 컴퓨터에 이미 내재된 기능에 번역해 주는 일을 주로 한다.

컴퓨터 프로그램은 계층적이기 때문이다.

언어학자들은 인간의 언어능력도 컴퓨터 프로그램처럼 위계적일 것으로 추정한다.

정상적인 아이는 자라면서 말을 배운다.

그러나 아이가 배우는 말은 단지 한국어일 뿐이다.

즉 언어능력은 배우지 않는다.

타고난다.

다만 모국어를 셋업해야 하는 결정적인 시기가 있다.

이 때 노출되는 언어가 한국어이면 평생 한국어로 사고하고,영어이면 영어가 모국어가 된다.

그러나 피진어처럼 말도 안 되는 말이라 할지라도 아이들은 논리적으로 모순되거나 일관성 없는 잡음을 제거하고 기본 기능을 갖춘 새로운 모국어를 생산해 낼 수 있다.

이미 거의 완성된 언어 프로그램을 내장하고 태어났기에 가능한 일이다.

⊙ 열린 교과서관(觀)

백치 수다쟁이나 뇌졸중을 앓지만 여전히 유능한 엔지니어,그리고 크리올어 등의 사례가 공통적으로 암시하는 건 무엇일까?

언어가 사고를 결정하거나 매우 강력한 영향을 미친다는 가설은 이런 증거 앞에서 여전히 유효할까?

게다가 한국어나 영어와 같은 특정 언어는 타고난 언어 능력 위에서 구동하는 응용 프로그램이라 할 수 있는데 한국어의 일부 단어를 상실하면 그에 해당하는 사고가 영원히 사장될 수 있다는 경고는 또 어떤가?

고등학교 국어 교과서 첫 번째 단원을 다시 읽어보자.

영어 공용화 문제로 알려져 있지만 그보다 훨씬 심각한 언어·과학적 가설들을 다루고 있는 '황소개구리와 우리말'을 위에서 나열한 과학적 증거에 비추어 재평가해보자.

'황소개구리와 우리말'에서 주장의 논거로 사용하고 있는 숨겨진 전제나 가설 중에 백치 수다쟁이나 크리올어의 암시와 대응하는 내용을 걸러낸 다음 이를 기초로 필자의 주장을 비평하는 작업이다.

교과서의 전제를 파헤쳐 뒤집어 보려는 자세를 교수들은 '열린 교과서관(觀)'이라 부르며 논술에서 매우 필요한 자세라고 권장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