道를 道라 말하면 道가 아니다
노자의 「도덕경」은 '도가도비상도(道可道非常道)'라는 유명한 경구로 시작한다.
'도를 도라고 말하면 그것은 도가 아니다.
' 뭔가 그럴 듯한 말인 것 같기도 하지만 무슨 말인지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
철학,특히 동양철학은 이해하기 어렵다.
철학이 외면받는 가장 큰 이유 중의 하나는 이러한 이해의 어려움 때문이다.
그러나 사실 '도가도비상도'가 그렇게 심오하거나 난해한 의미는 아니다.
◎원문읽기: 도덕경 1장 '명(名)'
도(道)를 도라고 이름지어 부른다면,이름지어진 그 도는 실재의 도는 아니다.
(사물에 대해) 어떤 이름이든 이름붙일 수는 있지만 언제나 그 이름이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이름이 없다면 천지는 언제나 처음 시작된 때와 마찬가지겠지만 이름을 가지면서부터 만물은 분별과 계통를 갖게 된다.
(이하 생략)
▶해설=도를 도라고 말하면 그것은 도가 아니다.
다시 말하면 도란 말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또는 도는 말하는 순간 더 이상 도가 아니게 된다는 알쏭달쏭한 해설도 있다.
하지만 여기서 노자의 주요 의도는 도가 무엇인지를 정의하려는 것이 아니다.
노자는 도에 대해서 말하려기보다는 언어에 대해서 말하려는 것이다.
이 장의 제목이 '명(名)'인 것도 이 때문이다.
노자는 도의 대립 개념으로 명을 들고 있다.
명이란 바로 이름 또는 언어이다.
여기서 도가 과연 무엇인가의 의문과 함께,'도와 언어가 왜 대립되는가?'의 의문이 자연스럽게 도출된다.
이 의문은 두 번째 구절과 세 번째 구절을 읽으면 확실히 해소된다.
이름은 인간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므로 언제든 변할 수 있지만 천지,즉 우주와 세계 만물은 그것이 어떻게 이름붙여졌냐와 무관하게 그대로이다라고 노자는 말하고 있다.
즉 여기서 도란 그저 우주나 세계로 해석해도 무방하다고 할 수 있다.
이 세계는 존재한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사실 모든 것은 존재하는 것들뿐이다.
말할 필요도 없는 당연한 얘기다.
하지만 실제로 존재하지 않으면서도 존재하는 것이 있다.
바로 그것이 '언어'이다.
언어란 인간에게 존재하는 것들을 구분짓고 쉽게 인식하기 위해 필요한 도구이다.
언어가 없다면 인간이 존재하는 세계를 인식하기가 어려울 것이다.
언어란 인간의 생존을 위해서 필요하며,무엇보다 학문을 위해서 가장 필요한 것이다.
그러나 노자는 학문과 지식에 반대한다.
학문과 지식은 인간 머릿속의 관념일 뿐 존재 자체는 아니기 때문이다.
언어는 인간이 존재자에 다가갈 수 있도록 돕기도 하지만 존재자에게 도달하는 것을 막는 장애물이기도 하다.
존재하는 것과 언어는 결코 일치할 수 없다.
존재와 언어의 차이는 마치 미모의 여인과 그 여인의 사진의 차이와 같다고 할 수 있다.
사진이 아무리 실물과 동일하다 해도 그것은 가짜다.
인간이 언어를 사랑하고 집착하는 것은 사진 속의 여성을 사랑하는 것과 같다.
우리가 언어를 통해 무언가에 대해 안다고 해도 그 앎은 존재하는 것 자체는 아니다.
우리는 물을 안다고 생각한다.
물이 무엇인가?라고 물으면 물은 H2O라고 말한다.
H2O가 무엇이냐고 물으면 수소와 산소의 결합이라고 말한다.
우리는 물이라고 불려지는 어떤 실체를 아는 것이 아니다.
다만,그것이 언어로서 어떻게 설명되어지는지를 알 뿐이다.
존재는 복합적이고 총체적인 데 반해 언어는 쪼개고 구분짓길 좋아한다.
세상엔 악인도 선인도 없는데 선과 악이라는 말로 인해 우리는 선인과 악인이 실제로 존재하는 것처럼 생각한다.
그리고 '인간은 선한가 악한가?'와 같은 무의미한 논쟁이 일어난다.
이런 것 뿐만이 아니다.
인간과 동물이라는 개념과 언어로 인해서 우리는 인간과 동물이 절대적으로 구분되는 실체인 것처럼 생각한다.
하지만 외계인이 지구를 처음 둘러본다면 인간과 동물을 모두 합쳐서 '지구동물'로 구분지을지도 모른다.
언어란 인간의 편의에 의해 다분히 인간중심적으로 세계를 해석하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존재하는 것은 변화와 움직임 속에 있는데 언어는 변하지 않는다.
우리는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을 때 친구 또는 연인이라는 공식적인 명칭을 사용하길 좋아한다.
'나랑 친구하자' 이런 말만큼 무의미한 건 없다.
친구가 되기로 합의한다고 해서 바로 친구가 되는가? 남자와 여자가 사귀기로 합의하면 '연인'이라는 단어로 그 둘의 관계가 정의된다.
그러나 한 남자와 여자가 어느 시점까지 친구이고 어느 순간부터 연인이 되는건지 정확하게 정의할 순 없다.
친구였다가 연인이 될 수도 있고 그 반대도 가능하며 그 중간의 복합적인 관계일 수도 있다.
두 사람이 어떤 관계인지는 말로 명명함으로써 가능한 것이 아니라 관계자인 두 사람이 어떻게 느끼는가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다.
언어는 매우 유용하며 언어가 없다면 세상은 제대로 돌아갈 수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노자의 존재론적인 관점에서 볼 때 아닌 것은 아니라고 확실하게 해둘 필요가 있기 때문에 언어의 비실체성을 강조한 것으로 이해하면 좋을 것이다.
언어의 비실체성에 대해 논한 좋은 글이 있어 소개한다.
현대의 철학자이며 소설가인 알렝 드 보통의 글이다.
우리의 삶에서 중요한 테마인 사랑을 철학적 개념으로 해설하고 있다.
이 글을 읽고 다시 '도가도비상도'의 의미를 되새겨보길 바란다.
그리고 우리가 삶에서 어떻게 언어의 오류를 범하는지 생각해보길 바란다.
◎알렝 드 보통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중에서
언어는 그 지속성으로 우리의 우유부단함에 아첨한다.
세상은 시시각각 변하고 있는데, 언어 덕분에 우리는 지속과 고정이라는 착각 속에 숨을 수 있다.
"같은 강물에 두 번 발을 담글 수는 없다.
" 헤라클레이토스의 말이다.
모든 것이 흘러가버리는 것은 불가피한 일임을 지적하고 있지만, 강이라는 단어가 변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같은 강물에 발을 담근 것처럼 착각한다는 것을 말해준다.
여기에는 중요한 의미가 담겨 있다.
나는 한 여자를 사랑하는 남자이다.
그러나 그 말이 나의 감정들의 유동성과 변덕스러움 가운데 얼마나 많은 부분을 전달해줄까?
그 말 속에 이 사랑과 얽혀 있는 그 모든 배신,권태,짜증,무관심이 들어설 공간이 있을까?
어떤 사건이 이야기로 바뀌는 순간,사건은 추상화된 의미와 저자의 의도라는 미명하에 그 다양성을 상실한다.
클로이와 나는 상당 기간에 걸쳐서 사랑했고 그 시간 동안 나의 감정은 감정적인 계단을 워낙 광범위하게 가로질렀다.
그러나 시간에 쫓기고 단순화에 대한 욕구가 간절하기 때문에 우리는 생략에 의해서 사건들을 이야기하고 기억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단순히 사랑했다는 말은 그 사건들을 잔인하게 단축해버리는 것이다.
함께 보낸 주말을 단 한 단어 "유쾌했다'는 말로 기억할 수 있고 질서와 정체성을 만들어냈으니,언어가 위선임을 용서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가끔은 말 밑의 흐름,헤라클레이토스가 말하는 강 밑에 흐르는 물과 마주치게 된다.
나는 클로이를 사랑했다.
얼마나 쉽게 들리는가?
마치 나는 사과를 좋아한다거나 프루스트를 좋아한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그러나 현실은 얼마나 더 복잡했던가?
한 가지를 말하면 곧 다른 한 가지를 놓치게 된다.
모든 주장은 수많은 반박을 억압했다는 상징이다.
철학자들이 전통적으로 이성에 따른 삶을 옹호하고 이성의 이름으로 욕망에 의한 삶을 비난해왔다면,그것은 이성이 지속성의 기초이기 때문이고,이성에는 시간으로 제한된 범위가 없기 때문이고,유통기한이 없기 때문이다.
배신의 전형적인 시나리오에서 한 사람은 상대방에게 묻는다.
"어떻게 나를 사랑한다고 해놓고 X에게 빠져서 나를 버릴 수 있니?" 그러나 시간을 고려한다면 배신과 사랑 사이엔 모순이 없다.
(중략)
클로이의 생일 카드를 쓰는 과정에서 갑자기 내 펜은 종이 위에 정지하고 말았다.
그녀에게 한번도 사랑한다고 말 한 적이 없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우리 관계는 사랑이라는 단어를 중심으로 형성된 것이지만,그럼에도 그 핵심은 어쩐지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것 같았다.
언급할 가치가 없어서일 수도 있고,너무 의미가 깊어서 아직 정리할 시간이 없어서일 수도 있다.
고백의 어려움은 일반적인 의사소통의 어려움과는 수준이 다르다.
우리 둘 다 사랑한다고 말할 수는 있었다.
그러나 이 사랑은 우리 각자의 내부에서 완전히 다른 것을 의미할 수도 있었다.
사랑의 말을 보낸다는 것은 불완전한 송신기로 암호화된 메시지를 타진하는 것과 같다.
우리는 공통된 것으로 여겨지는 언어로 대화를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때도 그 말들이 서로 다른 원천에 뿌리를 대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할 뿐이다.
우리는 같은 침대에서 같은 책을 읽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그러나 나중에 가면 그 책들이 서로 다른 대목에서 감동을 주었으며,결국 우리 각각에게 다른 책이었음을 깨닫게 되었다.
따라서 한줄의 사랑의 메시지에서도 똑 같은 차이가 발생하지 않을까?
내 마음 → ㅅ ㅏ ㄹ ㅏ ㅇ → 그녀의 마음
클로이와의 저녁 식사에서 나는 나의 클로이에 대한 마음을 'ㅅ ㅏ ㄹ ㅏ ㅇ'이라는 수송 수단에 태워 보내려 했지만 내키지가 않았다.
식탁에서 나는 우연히 마시멜로 접시를 보았다.
의미론적 관점에선 설명할 수 없었지만 나는 클로이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마시멜로한다는 것이 분명해졌다.
마시멜로가 어쨌길래 그것이 나의 클로이에 대한 감정과 갑자기 일치하게 되었는지 나는 절대 알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너무 남용되고 닳아버린 사랑이라는 말보다 그 말이 나의 마음의 본질을 정확히 포착하는 것 같았다.
더 불가해한 일이지만 내가 클로의 손을 잡고 눈을 바라보며 '나는 너를 마시멜로한다'라고 말하자 그녀는 내 말을 완벽하게 이해하는 것 같았다.
그녀는 그것이 자기가 평생 들어본 가장 달콤한 말이라고 대답했다.
그 때부터 나와 클로이와의 사랑은 그저 단순한 사랑이 아니었다.
그것은 입에서 맛있게 녹는,지름 몇 밀리미터의 달콤하고 말캉말캉한 물체였다.
이중한 에듀한경 연구원 doodut@eduhankyung.com
노자의 「도덕경」은 '도가도비상도(道可道非常道)'라는 유명한 경구로 시작한다.
'도를 도라고 말하면 그것은 도가 아니다.
' 뭔가 그럴 듯한 말인 것 같기도 하지만 무슨 말인지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
철학,특히 동양철학은 이해하기 어렵다.
철학이 외면받는 가장 큰 이유 중의 하나는 이러한 이해의 어려움 때문이다.
그러나 사실 '도가도비상도'가 그렇게 심오하거나 난해한 의미는 아니다.
◎원문읽기: 도덕경 1장 '명(名)'
도(道)를 도라고 이름지어 부른다면,이름지어진 그 도는 실재의 도는 아니다.
(사물에 대해) 어떤 이름이든 이름붙일 수는 있지만 언제나 그 이름이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이름이 없다면 천지는 언제나 처음 시작된 때와 마찬가지겠지만 이름을 가지면서부터 만물은 분별과 계통를 갖게 된다.
(이하 생략)
▶해설=도를 도라고 말하면 그것은 도가 아니다.
다시 말하면 도란 말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또는 도는 말하는 순간 더 이상 도가 아니게 된다는 알쏭달쏭한 해설도 있다.
하지만 여기서 노자의 주요 의도는 도가 무엇인지를 정의하려는 것이 아니다.
노자는 도에 대해서 말하려기보다는 언어에 대해서 말하려는 것이다.
이 장의 제목이 '명(名)'인 것도 이 때문이다.
노자는 도의 대립 개념으로 명을 들고 있다.
명이란 바로 이름 또는 언어이다.
여기서 도가 과연 무엇인가의 의문과 함께,'도와 언어가 왜 대립되는가?'의 의문이 자연스럽게 도출된다.
이 의문은 두 번째 구절과 세 번째 구절을 읽으면 확실히 해소된다.
이름은 인간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므로 언제든 변할 수 있지만 천지,즉 우주와 세계 만물은 그것이 어떻게 이름붙여졌냐와 무관하게 그대로이다라고 노자는 말하고 있다.
즉 여기서 도란 그저 우주나 세계로 해석해도 무방하다고 할 수 있다.
이 세계는 존재한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사실 모든 것은 존재하는 것들뿐이다.
말할 필요도 없는 당연한 얘기다.
하지만 실제로 존재하지 않으면서도 존재하는 것이 있다.
바로 그것이 '언어'이다.
언어란 인간에게 존재하는 것들을 구분짓고 쉽게 인식하기 위해 필요한 도구이다.
언어가 없다면 인간이 존재하는 세계를 인식하기가 어려울 것이다.
언어란 인간의 생존을 위해서 필요하며,무엇보다 학문을 위해서 가장 필요한 것이다.
그러나 노자는 학문과 지식에 반대한다.
학문과 지식은 인간 머릿속의 관념일 뿐 존재 자체는 아니기 때문이다.
언어는 인간이 존재자에 다가갈 수 있도록 돕기도 하지만 존재자에게 도달하는 것을 막는 장애물이기도 하다.
존재하는 것과 언어는 결코 일치할 수 없다.
존재와 언어의 차이는 마치 미모의 여인과 그 여인의 사진의 차이와 같다고 할 수 있다.
사진이 아무리 실물과 동일하다 해도 그것은 가짜다.
인간이 언어를 사랑하고 집착하는 것은 사진 속의 여성을 사랑하는 것과 같다.
우리가 언어를 통해 무언가에 대해 안다고 해도 그 앎은 존재하는 것 자체는 아니다.
우리는 물을 안다고 생각한다.
물이 무엇인가?라고 물으면 물은 H2O라고 말한다.
H2O가 무엇이냐고 물으면 수소와 산소의 결합이라고 말한다.
우리는 물이라고 불려지는 어떤 실체를 아는 것이 아니다.
다만,그것이 언어로서 어떻게 설명되어지는지를 알 뿐이다.
존재는 복합적이고 총체적인 데 반해 언어는 쪼개고 구분짓길 좋아한다.
세상엔 악인도 선인도 없는데 선과 악이라는 말로 인해 우리는 선인과 악인이 실제로 존재하는 것처럼 생각한다.
그리고 '인간은 선한가 악한가?'와 같은 무의미한 논쟁이 일어난다.
이런 것 뿐만이 아니다.
인간과 동물이라는 개념과 언어로 인해서 우리는 인간과 동물이 절대적으로 구분되는 실체인 것처럼 생각한다.
하지만 외계인이 지구를 처음 둘러본다면 인간과 동물을 모두 합쳐서 '지구동물'로 구분지을지도 모른다.
언어란 인간의 편의에 의해 다분히 인간중심적으로 세계를 해석하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존재하는 것은 변화와 움직임 속에 있는데 언어는 변하지 않는다.
우리는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을 때 친구 또는 연인이라는 공식적인 명칭을 사용하길 좋아한다.
'나랑 친구하자' 이런 말만큼 무의미한 건 없다.
친구가 되기로 합의한다고 해서 바로 친구가 되는가? 남자와 여자가 사귀기로 합의하면 '연인'이라는 단어로 그 둘의 관계가 정의된다.
그러나 한 남자와 여자가 어느 시점까지 친구이고 어느 순간부터 연인이 되는건지 정확하게 정의할 순 없다.
친구였다가 연인이 될 수도 있고 그 반대도 가능하며 그 중간의 복합적인 관계일 수도 있다.
두 사람이 어떤 관계인지는 말로 명명함으로써 가능한 것이 아니라 관계자인 두 사람이 어떻게 느끼는가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다.
언어는 매우 유용하며 언어가 없다면 세상은 제대로 돌아갈 수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노자의 존재론적인 관점에서 볼 때 아닌 것은 아니라고 확실하게 해둘 필요가 있기 때문에 언어의 비실체성을 강조한 것으로 이해하면 좋을 것이다.
언어의 비실체성에 대해 논한 좋은 글이 있어 소개한다.
현대의 철학자이며 소설가인 알렝 드 보통의 글이다.
우리의 삶에서 중요한 테마인 사랑을 철학적 개념으로 해설하고 있다.
이 글을 읽고 다시 '도가도비상도'의 의미를 되새겨보길 바란다.
그리고 우리가 삶에서 어떻게 언어의 오류를 범하는지 생각해보길 바란다.
◎알렝 드 보통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중에서
언어는 그 지속성으로 우리의 우유부단함에 아첨한다.
세상은 시시각각 변하고 있는데, 언어 덕분에 우리는 지속과 고정이라는 착각 속에 숨을 수 있다.
"같은 강물에 두 번 발을 담글 수는 없다.
" 헤라클레이토스의 말이다.
모든 것이 흘러가버리는 것은 불가피한 일임을 지적하고 있지만, 강이라는 단어가 변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같은 강물에 발을 담근 것처럼 착각한다는 것을 말해준다.
여기에는 중요한 의미가 담겨 있다.
나는 한 여자를 사랑하는 남자이다.
그러나 그 말이 나의 감정들의 유동성과 변덕스러움 가운데 얼마나 많은 부분을 전달해줄까?
그 말 속에 이 사랑과 얽혀 있는 그 모든 배신,권태,짜증,무관심이 들어설 공간이 있을까?
어떤 사건이 이야기로 바뀌는 순간,사건은 추상화된 의미와 저자의 의도라는 미명하에 그 다양성을 상실한다.
클로이와 나는 상당 기간에 걸쳐서 사랑했고 그 시간 동안 나의 감정은 감정적인 계단을 워낙 광범위하게 가로질렀다.
그러나 시간에 쫓기고 단순화에 대한 욕구가 간절하기 때문에 우리는 생략에 의해서 사건들을 이야기하고 기억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단순히 사랑했다는 말은 그 사건들을 잔인하게 단축해버리는 것이다.
함께 보낸 주말을 단 한 단어 "유쾌했다'는 말로 기억할 수 있고 질서와 정체성을 만들어냈으니,언어가 위선임을 용서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가끔은 말 밑의 흐름,헤라클레이토스가 말하는 강 밑에 흐르는 물과 마주치게 된다.
나는 클로이를 사랑했다.
얼마나 쉽게 들리는가?
마치 나는 사과를 좋아한다거나 프루스트를 좋아한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그러나 현실은 얼마나 더 복잡했던가?
한 가지를 말하면 곧 다른 한 가지를 놓치게 된다.
모든 주장은 수많은 반박을 억압했다는 상징이다.
철학자들이 전통적으로 이성에 따른 삶을 옹호하고 이성의 이름으로 욕망에 의한 삶을 비난해왔다면,그것은 이성이 지속성의 기초이기 때문이고,이성에는 시간으로 제한된 범위가 없기 때문이고,유통기한이 없기 때문이다.
배신의 전형적인 시나리오에서 한 사람은 상대방에게 묻는다.
"어떻게 나를 사랑한다고 해놓고 X에게 빠져서 나를 버릴 수 있니?" 그러나 시간을 고려한다면 배신과 사랑 사이엔 모순이 없다.
(중략)
클로이의 생일 카드를 쓰는 과정에서 갑자기 내 펜은 종이 위에 정지하고 말았다.
그녀에게 한번도 사랑한다고 말 한 적이 없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우리 관계는 사랑이라는 단어를 중심으로 형성된 것이지만,그럼에도 그 핵심은 어쩐지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것 같았다.
언급할 가치가 없어서일 수도 있고,너무 의미가 깊어서 아직 정리할 시간이 없어서일 수도 있다.
고백의 어려움은 일반적인 의사소통의 어려움과는 수준이 다르다.
우리 둘 다 사랑한다고 말할 수는 있었다.
그러나 이 사랑은 우리 각자의 내부에서 완전히 다른 것을 의미할 수도 있었다.
사랑의 말을 보낸다는 것은 불완전한 송신기로 암호화된 메시지를 타진하는 것과 같다.
우리는 공통된 것으로 여겨지는 언어로 대화를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때도 그 말들이 서로 다른 원천에 뿌리를 대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할 뿐이다.
우리는 같은 침대에서 같은 책을 읽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그러나 나중에 가면 그 책들이 서로 다른 대목에서 감동을 주었으며,결국 우리 각각에게 다른 책이었음을 깨닫게 되었다.
따라서 한줄의 사랑의 메시지에서도 똑 같은 차이가 발생하지 않을까?
내 마음 → ㅅ ㅏ ㄹ ㅏ ㅇ → 그녀의 마음
클로이와의 저녁 식사에서 나는 나의 클로이에 대한 마음을 'ㅅ ㅏ ㄹ ㅏ ㅇ'이라는 수송 수단에 태워 보내려 했지만 내키지가 않았다.
식탁에서 나는 우연히 마시멜로 접시를 보았다.
의미론적 관점에선 설명할 수 없었지만 나는 클로이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마시멜로한다는 것이 분명해졌다.
마시멜로가 어쨌길래 그것이 나의 클로이에 대한 감정과 갑자기 일치하게 되었는지 나는 절대 알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너무 남용되고 닳아버린 사랑이라는 말보다 그 말이 나의 마음의 본질을 정확히 포착하는 것 같았다.
더 불가해한 일이지만 내가 클로의 손을 잡고 눈을 바라보며 '나는 너를 마시멜로한다'라고 말하자 그녀는 내 말을 완벽하게 이해하는 것 같았다.
그녀는 그것이 자기가 평생 들어본 가장 달콤한 말이라고 대답했다.
그 때부터 나와 클로이와의 사랑은 그저 단순한 사랑이 아니었다.
그것은 입에서 맛있게 녹는,지름 몇 밀리미터의 달콤하고 말캉말캉한 물체였다.
이중한 에듀한경 연구원 doodut@edu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