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가탑의 침묵

'무구정광다라니경'은 현존하는 세계 최고(最古)의 목판인쇄물로 알려져 있었다.

서기 868년에 인쇄한 중국 최고의 목판인쇄물 '금강반야바라밀경'이나 서기 770년께 인쇄한 일본의 '백만탑다라니경'보다 앞선 750년께로 추산되어 왔다.

무구정광다라니경(무구정경)이 보관되어 있던 석가탑이 위치한 불국사의 건립 연대가 750년께라고 삼국유사가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민족문화의 우수함을 증명하는 자랑스러운 유물은 당연히 국보(126호)로 지정되었다.

그러나 1966년 '무구정경'과 함께 석가탑 안에서 발견된 인쇄물을 발견한 지 20년 만에 정리하던 국립중앙박물관은 놀라운 기록을 만난다.

'묵서지편'으로 불리는 이 인쇄물에는 11세기 초,고려 때 석가탑을 보수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무구정경의 연도를 750년 이전으로 추산할 수 있는 전제에는 석가탑이 불국사와 함께 만들어진 후 한번도 개봉되지 않았었다는 적극적인 '추측'이 있었다.

석가탑이 11세기에 보수되었다는 기록이 함께 발견되었더라도 무구정경은 그 이전의 작품일 수 있지만 '밀봉'의 전제가 깨져버리게 되면 일본보다 20년 전이라거나 중국보다 100년 전이라고 꼭 짚어서 주장할 근거는 사라져 버린다.

학계의 정설을 허물어뜨릴 기록을 판독한 국립중앙박물관의 반응은 어땠을까? 보다 나은 진실로 안내하는 새로운 발견 앞에서 적어도 환호하지는 않은 듯하다.

발견을 비밀에 부치고 연구를 중단했다.

밀봉된 비밀은 10년을 기다려야 했다.

[오태민의 마중물논술] (28) 바람직하지 않은 사실을 대하는 과학적 태도
⊙서양 약은 화학품,동양 약은 식품?

페닐프로판올아민(PPA)은 50년간이나 코막힘을 풀어주는 충혈완화제로 사용된 약물이다.

'콘택600'이라는 상표가 더 익숙하다.

그러나 수년 전 미국 식품의약국(FDA)은 오랫동안 사용되어온 싸고 효과가 좋은 이 약을 금지했다.

예일대 연구팀이 PPA가 뇌졸중의 가능성을 증가시킨다는 임상 결과를 내놓았기 때문이다.

예일대 연구 결과에 대해 하버드대와 뉴욕시립대의 일부 연구자들은 통계적으로 무의미하다고 반박하고 있어 논란은 여전하다.

"PPA 저용량 감기약을 먹더라도 출혈성 뇌졸중의 발생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으며 통계적으로 유의한 수준은 아니지만 상관관계 가능성을 부정할 수 없다.

" 서울대 의대 연구팀의 역학조사와 이에 대한 최종보고다.

역시 한국의 식품의약청도 PPA가 들어간 약물의 제조와 판매를 금지했다.

임상실험의 통계적 결과는 미묘하지만 이 약을 금지한 미국 식품의약국의 계산식은 의외로 간단하다.

코막힘을 풀어주는 약의 성능이 고맙긴 해도 죽어가는 생명을 살리는 정도는 아니다.

그러나 뇌졸중은 생명을 위협하고 살아남아도 중증장애로 이어진다.

그 가능성이 미비해도 완전히 배제할 수 없는 한 약의 경제성을 따져보아야 한다.

약물이 주는 이득에 비해 만에 하나 약이 끼칠 수 있는 해악이 크다면 이런 약물을 금지되어야 한다는 논리다.

인체에 치명적일 수 있는 약물에 대해서 과학적으로 설계된 실험과 통계 결과,그리고 이익과 비용의 미묘한 차이를 저울질할 기준이 필요하다는 논리에 대해서는 이견이 없다.

그러나 이런 조심스런 과정이 오래 전에 작성된 문헌,이어져온 관습,그리고 사람들의 희망 섞인 믿음에 의해 무시되는 분야가 있다.

바로 한약이다.

한약에 쓰이는 여러 약재는 동식물로부터 얻는다.

이러한 사실이 한약은 화학약품 덩어리인 양약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헛된 믿음을 부추긴다.

지극히 상식적인 이야기지만 한약이 약효가 있는 것은 특수한 화학적 성분이 함유 되어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화학성분은 이미 의학에서도 광범위하게 응용된다.

즉 현대의학의 약은 특수한 화학성분만을 자연으로부터 추출,정제한 것이다.

특수한 성분만을 정제해야 다른 효과를 최대한 억제하면서 약효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아스피린 주성분 살리신이 버드나무 껍질에서 추출되기 시작했다는 사실은 유명하다. 누구나 자신이 먹는 약에 의사가 필요하다고 생각한 성분 이외의 다른 이물질이 함유되어 있는 줄 알게 되면 즐거워할 리 없다.

물론 100%라는 수치는 가능하지 않아서 양약에도 이물질이 섞여있지만 그 수치가 통제범위 안에 머물러야 한다.

그러나 정제나 표준화,그리고 유통에 이르기까지 어느 것 하나 엄격하게 수치화되어 관리되지 않고 있는 한약을 대할 때면 사람들의 경계심은 누그러진다.

약성분과 함께 있을 여러 가지 성분들도 비싼 만큼 몸에 좋으리라 믿는다.

식품이 아닌 약물이 의도하지 않은 이득을 줄 수 있다는 말은 곧 의도하지 않은 해를 끼칠 수도 있다는 뜻이다.

때로 그 해는 누군가에게는 치명적일 수도 있다.

⊙생각과 다른 사실

중병을 앓다가 죽은 환자의 시체를 부검하면 사망원인을 보다 정확하게 알 수 있다.

그러나 경황이 없는 가족들에게 부검을 하겠다는 말을 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렇다고 환자가 다시 살아올 수도 없으니 말이다.

또 의사들도 부검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기는 마찬가지다.

부검 결과가 진단과 같다면 얻을 게 없지만 만약 오진이었다고 밝혀지면 난처한 일일 것이다.

그러나 의학도 인간의 일이다.

실수가 없을 수 없다.

오히려 오진을 막기 위해서라도 부검은 적극적으로 권장되어야할 중요한 의료과정이다.

부검을 통해 사인에 대한 중대한 오진이 드러나는 경우는 얼마나 될까? 1988년과 1999년에 행해진 세 연구에 따르면 그 수치는 약 40%에 달한다고 한다.

부검 연구를 광범위하게 검토한 결과 오진된 사례 중 약 3분의 1은 적절한 처치를 했더라면 환자가 살 수 있었다는 결론이다.

(아톨가완디,「나는 고백한다,현대의학을」) 이 사실은 정말 충격적이다.

속된 말로 시체를 까보면 의사가 엉뚱한 치료를 했을 경우가 40%에 달한다는 것이다.

한국의 경우는 보다 나을 거라 안심하려 해도 마음이 놓이지 않는다.

아무래도 사정이 별반 다르지 않을 것 같다.

이 수치를 보고 의학의 정확성을 의심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사실은 과학의 현재를 정확하게 보여준다.

의학은 첨단과학이 가장 활발히 이용되는 분야다.

사람의 인체라는 복잡한 시스템을 다루는 첨단과학의 현주소는 이렇듯 완벽과는 거리가 아주 멀다.

과학이 정확성의 동의어라고 알고 있던 학생들은 혼란스럽다.

그러나 과학은 정확성의 동의어가 아니다.

과학이 정확성을 향해 가지만 아직 인간의 지적능력은 완벽과는 거리가 멀기 때문이다.

오히려 '부검을 통한 오진의 발견'이 과학의 정신을 잘 보여준다.

참 과학과 거짓과학은 바로 예상하지 못한 사실을 접했을 때의 반응과 태도의 차이로 구별 할 수 있다.

거짓과학자는 실험 결과가 예상과 다르면 예상된 결과가 나올 때까지 실험을 계속하든지 아니면 실험 결과를 왜곡하든지 아예 무시한다.

참 과학은 예측하지 못한 실험 결과를 진지하게 받아들인다.

몇 차례 반복해도 예측하지 못한 실험 결과가 나온다면 그 가설은 수정되거나 폐기된다.

⊙진실을 향한 인류보편의 도구

동양의학의 정체성이 따로 있으리라 믿는 이들은 현대의학을 서양의학이라 별칭한다.

서양의학이라 부를 게 있긴 있다.

바로 과학화 이전의 서양의학은 놀랍게도 오늘날의 동양의학과 유사했다.

사람의 체질을 구분하거나 기이한 동식물을 처방하고 인간의 몸을 우주적인 시스템으로 이해했으며 인체를 존재라는 측면보다는 관계라는 관점에서 바라보았다.

이런 철학적 이론들은 구체적인 해부와 임상을 통해 증명할 수 없거나 의미가 없거나 모순된다는 것이 밝혀졌다.

바로 근대 과학적 사고가 꽃을 피우면서 서양의학은 현대의학으로 대체될 수 있었다.

과학이 정확성의 동의어가 아니듯 '과학이 아닌 것은 진실이 아니다'라는 논리도 성립하진 않는다.

현대의학이 포기한 환자가 민간요법이나 대체의학을 통해 생명을 얻기도 한다.

석가탑은 11세기에 중수되었지만 무구정경은 여전히 750년 아니 그보다도 전의 것일 수 있다.

다만 콘텍600이 뇌졸중을 일으킬 가능성이 있듯 무구정경이 고려 때의 것이라는 바람직하지 못한 가능성도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바람직하지 못한 가능성을 다루는 태도'에서 우리는 과학의 의미를 다시 한번 성찰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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