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은 원폭 투하에 신중했어야 했다"

[고전속 제시문 100선] (62) 베르너 카를 하이젠베르크 ‘부분과 전체’
1927년 26세의 하이젠베르크(1901∼1976)는 “전자의 운동량은 에너지와 마찬가지로 불확정한 것이며,운동량과 위치의 곱은 일정한 상수(h/2)보다 작을 수 없다”는 그 유명한 ‘불확정성 원리’를 제창하여 고전적인 결정론적 인과율과 대상에 대한 객관적 관찰 가능성 등을 신봉하던 당시 과학계에 커다란 파장을 불러 일으켰다.

아인슈타인과 같은 대석학마저도 양자역학이 지닌 비결정론적 성격을 무척 못마땅하게 생각하며 “신은 주사위 놀이를 하지 않는다”는 자신의 생각을 굽히길 거부하며,보어와 양자역학의 유효성 문제를 두고 죽을 때까지 논쟁을 벌일 정도로 하이젠베르크의 새로운 이론은 획기적인 것이었다.

이번에 소개할 고전은 이 하이젠베르크가 20세기 초반 양자역학이라는 새로운 과학 태동의 한 복판에 서서 경험한 자신의 과학적 삶의 여정을 대화와 토론의 형식으로 풀어 쓴 자전적 글인 <부분과 전체>이다.

<부분과 전체>는 하이젠베르크가 19세 때 친구들과 도보여행에서 나누었던 대화에서 시작해서 약 50년간 현대 과학을 연구하면서 그가 과학적이고 사상적 교류를 나누었던 여러 인물과의 대화를 중심으로 20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좀머펠트,볼프강 파울리,보어,페르미,디랙과 같은 시대를 선도하던 물리학자들과의 대화는 양자역학이 단순히 하이젠베르크라는 한 천재의 결과물이 아니라 여러 학자들의 공동 작업의 산물이었음을 보여준다.

이처럼 학문적 성취와 과학의 발전은 전 인류의 축적적 지식과 경험에 근거한다는 하이젠베르크의 믿음이 이 책의 곳곳에 배어 있다.

또한 이 책을 읽으면서 우리는 하이젠베르크를 비롯한 당대 과학자들의 철학적 사유와 성찰이 대단한 수준을 보여준다는 것에서 놀라게 되는데,이 점 역시 과학도 다른 학문과의 공동 작업이 없이는 진보할 수 없다는 하이젠베르크의 신념을 증명한다.

책의 제목이 <부분과 전체>인 것은 부분으로서의 특정 학문(양자역학)이 전체로서의 다른 과학자들과의 공동 작업,그리고 또 다른 전체로서의 철학을 비롯한 다른 학문들의 지적 토대가 없이는 탄생할 수 없다는 점을 시사하는 듯하다.

부분과 전체의 관계는 이 책의 후반부에서 주로 언급되는 하이젠베르크의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태도에서도 확인된다.

2차 세계대전의 와중에서 미국으로 망명한 이탈리아 물리학자 페르미는 미국을 방문한 하이젠베르크에게 독일로 돌아갈 것을 만류하지만,하이젠베르크는 “일정한 주위환경과 일정한 언어와 사고영역에 태어나서 어릴 때 그곳을 떠나지 않는 이상 그는 그 영역에서 가장 적절하게 성장할 수 있으며 그곳에서 가장 능률적으로 일할 수 있는 것입니다”라는 말을 남기고 독일로 돌아갔다.

그는 개인의 삶이라는 부분을 조국이라는 전체와 떼어서 생각할 수 없었던 것이다.

또한 핵무기의 개발이 가져올 엄청난 파괴력을 알고 있던 하이젠베르크가 독일의 핵무기 개발을 늦추기 위해 노력했다는 것 역시 인류라는 전체 속에서의 부분으로서의 개인을 생각했음을 짐작케 해준다.

요즘 통합적이고 총체적 학문,혹은 학문간의 통합과 통섭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점점 늘어나고 있다.

그만큼 현재의 학문이 전문화되고 세분화되었다는 얘기일 것이다.

그간 전문화된 학문이 효율성과 성취 측면에서 탁월한 결과를 낸 것은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전체 속에 위치하지 않은 부분은 방향을 잃고 헤매거나 무의미한 자기 함몰에 이를 수 있다.

이 때 하이젠베르크가 전하는 메시지는 오늘날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얘기해 준다.

전체 속에 위치하지 않은 부분은 방향을 잃고 헤매거나 무의미해진다

⊙원문읽기

나는 적어도 학문만큼은―내가 뮌헨의 시민전쟁에서 아주 싫증이 나도록 들었던―정치적 의견의 싸움으로부터 완전히 떨어져 있을 수 있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그런데 성격적으로 약한 사람들이나 병적인 인간들을 이용하면 학문의 생활도 악의 있는 정치적 격정에 의하여 오염되고 일그러질 수 있다는 사실을 목격한 것이다.

(…)
뮌헨의 시민전쟁에서 경험한 사실들을 통하여 나는 오래 전부터 정견(政見)은 큰소리로 선전하거나 실지로 달성하려고 노력하는 그 목표에 의해서 판단할 것이 아니라 다만 그것을 실현시키기 위한 수단에 의해서 판단해야 한다는 것을 배웠기 때문이다.

부당한 수단은 이미 그 수단을 사용하고 있는 장본인부터 그 명제의 설득력을 스스로 믿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증명하고 있는 것이었다.

여기서도 한 물리학자가 상대성이론에 반대하여 사용한 수단은 아주 잘못된 것이고 비현실적인 것이기 때문에,이 반대자는 분명히 상대성이론을 학문적으로 논박할 수 있다는 것을 믿지 않는다는 증거가 되는 것이다.

▶해설=어떤 한 학문의 이론적 승리도 정치적인 힘의 역학 관계의 소산일 수 있다.

하지만 하이젠베르크는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의 정당성이야말로 학문적 정당성의 근거가 되고 있다는 신념을 보여주고 있다.

⊙원문읽기

미국 대륙을 발견한 크리스토퍼 콜롬버스의 위대성은 지금까지 동쪽으로만 한정됐던 인도로의 항해를 지구가 구형이라는 데에 착안하여 서쪽으로도 갈 수 있다고 착상한 데 있는 것은 아니었다.

이 아이디어는 이미 다른 사람들이 생각해 온 것이었기 때문이다.

(…)
이 역사적 항해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지금까지 알려져 있었던 모든 육지를 떠나,그때 보유하고 있던 지식으로는 되돌아간다는 일이 불가능해지는 바로 그 지점에서 더 멀리 서쪽으로 뱃머리를 돌린 바로 그 결단에 있었다고 말하여야 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과학에 있어서도 실질적인 신세계는 어느 결정적인 자리에서 지금까지의 과학이 의존하고 있었던 그 토대를 박차버리고,말하자면 허공에 뛰어들 각오가 되어 있을 때에만 얻어질 수 있는 것이다.

아인슈타인은 그의 상대성이론에서 그때까지의 물리학이 확고한 기반으로 삼고 있었던 동시성(同時性)의 개념을 포기하였다.

그리고 많은 지도적인 물리학자나 철학자들은 동시성에 관한 종전의 개념을 포기하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해서 상대성 이론의 격렬한 반대자가 되었던 것이다.

(…) 그러나 실제로 신세계에 들어가려면 새로운 사고 내용을 받아들여야 할뿐만 아니라 새로운 사실을 이해하기 위해 사고구조를 바꾸어야 할 경우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러한 사실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거나 받아들일 위치에 놓여 있지 않다.

▶해설=하이젠베르크는 이 대목에서 자신의 양자역학이 봉착할 난관에 대해 얘기하고 있다.

과학의 진보란 종전의 개념을 모두 포기하고 사고구조를 바꿔야 하는 그런 지점에서 이루어진다.

화이트헤드 식으로 말하자면 ‘모험’ 없이 ‘진보’도 없는 것이다.

백척간두에서의 진일보야말로 인간사 진보의 핵심이 아닐까….

⊙원문읽기

이 전체적인 사고(思考) 과정에서 이 모든 일들이 얼마나 강제적으로 이루어졌는지를 인식하게 될 때 우리는 참으로 몸서리를 칠 수밖에 없다.

여기서 우리는 세계사에 있어서 선(善)을 위해서는 모든 수단이 허용될 수 있으나 악을 위해서는 허용될 수 없다는 대원칙,좀 더 나쁘게 표현한다면 목적은 수단을 신성화한다는 이 원칙이 항상 반복해서 실천에 옮겨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사고과정을 저지시킬 수 있는 무엇이 존재할 수는 없는 것일까?
“과학적 기술적 진보는 결과적으로는 틀림없이 세상에서 독립된 정치적 단위를 점점 크게 할 것이고,따라서 그 수가 점차로 감소하면서 결국에는 하나의 중심적인 질서를 유지하는 관계를 지향하게 될 것이다.

(…) 따라서 이 전쟁 후에는 남아 있는 소수의 강대국들이 그들의 노력 범위를 가능한 한 확장하려고 노력할 것은 충분히 가능성 있는 이야기다.

(…)
그 결과로 강대국들이 이전보다 더 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될 것은 틀림없는 일이다.

미국이 두 번에 걸친 세계대전에 개입하게 된 것도 이러한 각도에서 해석이 가능하게 될 것이다.

(…) 물론 이 같은 팽창정책을 추진하고 있는 강대국들은 제국주의라는 비난을 면치 못할 것이다.

따라서 여기서 바른 수단의 선택에 대한 문제가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고 생각된다.

(…) 이러한 견지에서 미합중국은 많은 사람들로부터 개인이 가장 용이하게,그리고 매우 자유롭게 발전할 수 있는 사회구조를 가지고 있는 자유의 본거지로 인정받고 있다.

(…)
미국 사람들이 원자폭탄을 일본에 투하할 것인지를 숙고할 때에,바로 이 많은 사람들이 미국에 대해 가지고 있었던 희망을 고려에 넣었어야 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원자폭탄의 사용으로 말미암아 이 희망에 일대 충격을 가하는 결과가 되지 않았을까 하는 우려를 갖게 되기 때문이다.”

▶해설=하이젠베르크는 과학과 기술의 진보가 결과적으로 강대국들의 영향력 강화를 가져올 것이라고 예견하면서,세계의 미래적인 통일 질서를 위해서 ‘수단의 정당성’을 역설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그는 미국이 원폭 투하에 좀 더 신중했어야 한다고 말한다.

미래의 전지구적인 새로운 질서라는 커다란 전체와의 연관성 하에서 과학기술의 발전을 고려했어야 한다는 것이다.

부분에만 몰두할 것이 아니라 전체와의 총체적 연관성을 늘 생각하라는 이 책의 제목과 부합하는 대목이다.

김훈회 S·논술 선임연구원 toatopia@nonsu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