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질서와 조화를 사랑한 미술학도

사실은 그랬다.

빈 예술학교가 18세인 아돌프 히틀러의 입학을 허락했었다면 우리는 아마 히틀러를 전혀 다른 사람으로 기억하고 있을 테다.

화가 히틀러로 말이다.

화가 히틀러가 우리가 아는 히틀러만큼 유명하지 않았을지라도 한 명의 화가를 얻는 대신 학살자를 잃은 셈이니 인류로서는 큰 소득이다. 두

차례나 미술학교 입학에 좌절한 청년 히틀러는 미술에 대한 꿈을 버리지 않고 빈에 머물며 엽서나 광고의 그림을 그려서 생활하다 다방면에 걸친 독서를 했다.

이 때를 회고하는 히틀러의 자서전을 보면 세상이 자기를 몰라준다는 비틀린 생각이 '사회 문제'에 대해 눈 뜨게 했다는 것을 감지할 수 있다.

예술가들은 히틀러의 그림에 별다른 가치를 두려 하지 않는다.

지나치게 고리타분한 그림인 탓도 있겠지만 2차 세계대전을 일으키고 유대인 수백만을 학살한 '악마'가 그린 그림이라는 가치 판단도 개입되었을 것이다.

다만 수집가들 사이에서 그의 그림은 꽤 인기 있다고 한다.

어쨌건 역사적 인물의 작품이 아닌가.

[오태민의 마중물 논술] (25) 히틀러의 꿈과 가을의 소망


그의 그림을 보면 히틀러의 미적 태도를 유추할 수 있다.

비례와 균형을 중시하는 전통적인 건축물을 정직한 화풍으로 그리길 좋아했다.

그는 고전주의를 찬양했다.

20세기 초 조화와 균형을 강조하는 고전 예술은 틀에 박힌 구닥다리로 치부되는 분위기였다.

그의 그림을 평가한 교수들은 아마 창의력이나 미학적 상상력이 부족하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 나치즘 또한 보편적이다

히틀러가 꿈꾼 새로운 베를린은 제3제국의 수도로서, 옛 로마의 명성뿐 아니라 고전적 건축까지도 빌리려 했다.

히틀러가 세기의 건축가인 슈페르(Albert Speer)와 함께 공동 설계했다는 '독일 민족대회당'은 르네상스시대 '성 베드로 대성당'의 재현 같다.

[오태민의 마중물 논술] (25) 히틀러의 꿈과 가을의 소망
히틀러가 꿈꾸었던 제3제국의 수도 베를린은 어떤 의미에서 고대 로마로의 완전한 회귀였다.

신고전주의가 아니라 고전주의의 재현이다.

히틀러는 술도 담배도 하지 않는 금욕적인 생활을 했고,채식주의자였으며 개인 생활은 검소했다고 한다.

그의 그림을 보면 절제와 금욕을 중시하는 그의 성품이 보인다.

학살자를 지나치게 미화한다고 느끼겠지만 원래 전체주의는 질서를 숭배하는 가치관과 인연이 깊다.

확실한 것은 신체의 균형을 따져가며 게르만족의 우수성을 강조하고 장애인이나 집시들은 불량품이기 때문에 인류의 우생학적 진보를 위해서는 청소되어야 한다고 믿었던 나치주의자들은 역사의 돌연변이가 아니라는 점이다.

인류 역사에서 면면히 이어 오는 어떤 사고의 경향이자 당시 일군의 생물학자와 인문·사회과학자들에 의해 주창되었고 널리 받아들여졌던 시대 정신이기도 했었다.

공산주의가 이상(理想) 국가를 모델로 한 하나의 거대한 실험이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히틀러의 제3제국 역시 질서와 조화를 지고(至高)의 가치로 내세운 사회 실험이었다.

◎ 질서 숭배의 끝

자연스럽다는 말처럼 시대에 따라 의미가 확연하게 다른 말도 드물다.

현대 사회에서 자연스럽다는 말은 제멋대로라는 말에 가깝다.

적어도 통일된 질서와 조화를 가리키지는 않는다.

누군가의 생김새를 자연스럽다고 표현하면 결코 칭찬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 증거다.

그러나 자연을 이런 식으로 인식하는 태도는 매우 현대적이다.

자연은 오랫동안 질서와 조화의 모태였다.

인간의 노력으로는 완성할 수 없는 질서의 전형을 자연은 보여준다.

그래서 고전주의 시대의 예술가들이 도달하고자 하는 자연미는 오늘날 우리가 인공적이라고 표현하는 것보다 훨씬 딱딱 떨어지는 질서와 조화의 아름다움이었다.

르네상스 시대의 거장 라파엘로가 죽자 그의 묘비에는 '이제 그가 죽었으니 그와 함께 자연 또한 죽을까 두려워하노라'(멤보 추기경,'서양미술사')라고 씌어졌다.

살아 생전 라파엘로가 도달하고자 노력했고 도달한 것으로 보이는 미학의 경지는 어머니 자연을 닮은 질서와 조화 그 자체였기 때문이다.

"고전주의를 숭앙한 히틀러의 미학적 태도로부터 히틀러의 정신 세계를 이해하려는 시도는 부질없다.

" 그의 참모이자 건축 동료였던 알베르트 슈페르의 경고다(Speer,'Third Reich').

그러나 질서와 조화에 대한 과잉 숭배가 파시즘의 빼놓을 수 없는 속성이라는 것을 부인하긴 어렵다.

'하나는 전체를 위해 전체는 하나를 위해'라는 모토는 전체주의의 변함 없는 속성이다.

전체주의는 자연이 시계 톱니와 같은 통일적으로 짜 맞춰진 완벽한 시스템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우주에서 전체로부터 독립된 개체란 있을 수도, 있어서도 안 되는 난센스일 뿐이다.

그래서 어떤 거창한 우주관을 새로 내놓더라도,그 사회가 한 인간이나 소수의 지적 이상에 맞춰 통일적으로 구조화되어야 한다고 우기는 한 그것은 전체주의다.

자연의 질서 그 자체는 틀림없다 하더라도 그것은 아직 인간의 지성이 도달하지 못한 어떤 것이라고 열어놓는 겸손이 그들에게는 없다.

전체주의라는 기막힌 농담을 창안하는 이들은 자연의 통일적 질서가 이미 탁월한 누군가에 의해 완전히 꿰뚫렸다고 말한다.

다수는 다만 우주의 통일적 질서 그 자체일지도 모를 그 한 인간 혹은 소수를 중심에 두고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짜임새 있게 배치되기만 하면 된다. 낭비 없는 공동체요, 미학적인 사회다.

이런 장광설에 감탄할 필요는 전혀 없다. 인류 역사에 빈번히 출몰했었고 비극을 대량으로 양산했던 전체주의의 또 다른 변종이요 아류일 뿐이다.

틀림없다.

◎ 이런,아리랑을 재발견하다니!

'아리랑에 출연하는 5만여 명의 동작이 변검의 탈처럼 순식간에 변하여 일초일촌의 오차도 있을 수 없다. (…) 그 절제 있는 동작의 미학은 찬탄을 자아낸다. (…) 이것은 그들 유토피아의 삶이며 역사이며 가치이며 희망이다'(도올 김용옥,중앙일보 10월6일자)

한 철학자가 눈으로 직접 확인해 스스로 서술한 아리랑이다.

5만여 명의 동작이 한 사람의 모습처럼 움직이기 위해 그들이 감내했어야 할 고통과,이 절제의 미학을 가능토록 뒷받침하는 사회에 켜켜이 배어 있을 숨 막히게 옥죄이는 삼엄함이 이 철학자 눈에는 보이지 않는다.

이 철학자는 전체주의라는 정확한 수식어를 사용하지 않기 위해 에둘러 긴 설명을 늘어놓았다.

역사 속의 전체주의가 인간 본성이 추구하는 미덕을 아예 무시하고 노골적으로 악을 추구한 적은 없다.

오히려 반대다.

인간 본성이 환영하는 여러 미덕 중에서 유독 몇 개의 미덕만을 지겨울 때까지 반복하는 것이 전체주의의 특징이다.

전체주의를 직접 보고 그들에게도 미덕이 있다며 뭔가 굉장한 발견이나 한 것처럼 말하고 싶어하는 그 자체가 어처구니 없는 일이다.

'이것 봐! 이 사람들 뿔 달리지 않았어.

우리랑 똑같고 우리처럼 뭔가를 추구해!' 악의 모습을 뿔이나 달린 우스꽝스런 악마로 인식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유아용이다.

어른이 되어 세상을 살다 보면 악은 그런 노골적인 모습으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챈다.

◎ 이 가을의 또 다른 풍경

가을,초등학교 운동회의 계절이다.

만국기와 솜사탕도 변함 없다.

하지만 응원하는 아이들의 손에는 총채가 없고 청군과 백군도 희미하다.

운동회의 중심이 경기가 아니어서인지 치열한 응원도 없는 것 같다.

오히려 막간에 등장하는 학년별 집단 무용이 중심이다. 집단 무용이라는 말 말고 달리 표현할 말이 없다.

우리에게도 아리랑과 같은 집체 무용이 있었던 것이다.

경기 중에는 멀찍이 있던 가족들이 무용만 시작하면 운동장 한가운데로 몰려 나온다.

손에 카메라를 들고 자기 자녀를 찾아 찍느라 바쁘다.

자녀들이 저학년일수록 부모들은 유별나서 카메라를 든 엄마 아빠가 아이들의 집단 무용 속으로 아예 들어가 버린다.

전체가 볼 수 있게 멀리서 찍어 달라고 장내 방송이 어김없이 나오지만 절실하지도 않다.

그도 그럴 것이 사진을 찍어대는 부모들 말고는 멀리서 이 무용을 바라보는 사람들이 별로 없기 때문이다.

우리 아이들의 집단 무용에서 집단은 발견하기 어렵다.

너무한다는 생각이 들다가도 가을 하늘을 올려다보며 이런 운동회의 학부모인 것이 가슴 시리도록 감사하다.

역사가 발전하지 않는다고 믿는 이들도 역사는 끊임없이 변한다고 말한다.

그래,변할 거면 발전하는 쪽으로 변해야 한다. 반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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