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러다임’이라는 말은 요즘 누구나가 사용하는 일상용어가 되었다.
너무나 자주 사용되다보니 오히려 누가 ‘패러다임’을 들먹이면 진부해 보이기까지 한다.
하지만 정작 ‘패러다임’의 의미에 대해 얘기해 보라하면 이를 제대로 설명하는 사람을 찾기는 쉽지 않다.
그리고 ‘패러다임’이라는 용어가 고작 50년쯤 전에 탄생했으며,더구나 고도의 전문 학술용어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누구나 놀라움과 함께 ‘패러다임’의 실질적 의미에 대해 반추해 보게 될 것이다.
‘패러다임’은 1962년 초판(1970년 재판)이 발행된 토마스 쿤(1922∼1996)의 세기적 명작 ‘과학혁명의 구조’를 통해 세상에 본격적으로 알려졌다.
이 저서는 20세기 후반에 출간된 책 가운데 가장 널리 알려진 학술서적으로,출간되자마자 과학사와 과학철학 연구자들에게 엄청난 충격과 반향을 불러 일으켰으며,세계적으로 100만부 이상 팔리고,20개 이의 언어로 번역되면서 현대의 고전으로 자리잡았다.
쿤은 처음 하버드대에서 물리학을 전공했지만 과학사로 관심을 돌렸고,이런 연구를 통해 과학의 본질에 대한 그의 생각을 바꾸게 되었다.
1960년대 초에는 과학이 자연에 대한 객관적이고 절대적인 지식을 다루고 있으며 그 지식의 발전은 점진적이고 누적적 진보의 역사라는 과학에 대한 전통적인 해석이 득세하고 있었지만,쿤은 ‘과학혁명의 구조’에서 이런 해석이 역사적 증거와 부합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쿤은 역사적 사례들과 더 잘 부합하는 과학이론을 제시하기 위해 새로운 과학관을 전개하였는데,그 과학관은 과학 진보의 혁명적 성격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과학적 진보의 계기가 되는 혁명은 하나의 이론 구조라 할 수 있는 패러다임의 포기와,그 자리를 양립 불가능한 다른 패러다임이 대신하는 것으로서 이루어진다.
이는 곧 과학사가 비누적적인 발전의 에피소드로 구성되어 있다는 주장이다.
쿤의 이론에서는 이런 패러다임의 천이(遷移,shift) 과정을 결정하는 객관적인 절차 따위는 존재하지 않으며,오히려 여기에는 과학자 공통체의 사회학적 성격이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과학혁명의 구조’는 흔히 고등학생을 위한 권장도서로 언급되곤 하지만,그 내용을 고교생들이 소화해 내기란 그리 녹녹하지 않을 것이다.
책의 주제가 과학사이다 보니,과학이론과 과학사에 대한 충분한 소양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교생들이 ‘패러다임’의 의미를 비롯한 이 책의 기본 아이디어들은 숙지해 둘 필요가 있다.
‘고전읽기’ 같은 코너를 통해서라도 말이다.
◆원문읽기: 패러다임의 의미
1.패러다임은 어느 주어진 과학자 사회의 구성원들에 의해 공유되는 신념,가치,기술 등을 망라한 총체적 집합을 가리킨다.
다른 한편으로는 패러다임은 그런 집합에서 한 유형의 구성 요소를 가리키는 것으로서 모형이나 또는 예제로서 사용되어,정상과학의 나머지 수수께끼에 대한 풀이의 기초로서 명시적 규칙들을 대치할 수 있는 구체적 수수께끼-풀이를 나타낸다.
2.새로운 패러다임을 채택한 과학자는 해석자이기보다는 차라리 거꾸로 보이는 렌즈를 낀 사람과 비슷하다.
이전과 똑같은 무수한 대상들을 마주 대하면서 그리고 그렇게 변함 없는 대상을 보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과학자는 대상들의 세부적인 것의 여기저기에서 속속들이 그 대상들이 변형되었음을 깨닫게 된다.
▶해설=이 책의 전체에서 ‘패러다임’에 대한 명확한 개념 규정을 찾기는 어렵다.
연구자들은 쿤이 그 책 전체에서 ‘패러다임’을 적어도 22가지의 서로 다른 용례로 사용하고 있다고 지적하기도 한다.
이를 의식한 듯 쿤은 2판 후기에서 ‘패러다임’이라는 용어의 의미에 대해 밝히는 대목이 위의 지문 1이다.
패러다임의 일상적 의미는 언어 학습에 사용되는 ‘표준예’(exemplar)이다.
불어나 독어 사전의 뒤쪽에 동사의 어형 변화표가 있을 것이다.
학생들은 이 표를 통해 동사의 여러가지 변형들을 이끌어내며 언어를 배운다.
동사는 어떤 형태로든 변형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이 어형 변화표의 테두리 내에서 변화하게 된다.
과학자들 역시 과학이론을 배우고 더 나아가 새로운 형태의 이론을 내놓은 활동도 대부분 어떤 커다란 과학적 이론 틀의 테두리 내에서 이루어진다는 점에 착안하여 ‘패러다임’이란 새로운 용어를 제안한 것이다.
언어 학습에서 새로운 동사 변화형을 발견하게 되면 사전의 어형 변화표를 뒤지듯,과학자들도 기존에 발견하지 못한 새로운 현상을 발견하게 되면 기존의 패러다임에 어떻게든 꿰어 맞춰 그 현상에 대한 이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