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속 제시문 100선] (60) 에드워드 윌슨 '통섭 지식의 대통합' (하)
윌슨이 꿈꾼 지식의 대통합인 '통섭'(cosilience)은 단순한 '통일'(unification)과는 다르다.

'통일'은 '남북통일'이라는 예에서처럼 여러 병렬적 존재들을 단순히 하나로 종합하는 것을 의미한다.

남과 북이 통일을 이룰 때,남과 북 사이에 위계질서가 필수일 필요는 없는 것이다.

하지만 윌슨의 통섭은 여러 학문들 사이에는 위계적 질서가 존재한다고 전제한다.

예를 들어 사회과학은 인간에 대한 이해를 전제로 한다는 측면에서 인간에 대한 이해,특히 인간의 심리에 대한 이해와 분리될 수 없다.

또한 인간의 심리에 대한 이해는 뇌에 대한 이해,더 나아가 생물학에 대한 이해에 토대를 둘 것이다.

윌슨은 인문학,사회과학,자연과학의 제 학문들이 생물의 계통수처럼 위계적 체계에 의해 하나로 파악될 수 있다고 믿고 있고,이렇게 체계적으로 학문을 파악하는 작업이 곧 '통섭'이다.

지난 주에는 윌슨이 구상하는 '통섭'의 일반적 의미를 살펴보았고,이번 주에는 윌슨이 시도하고 있는 '통섭'의 구체적 내용을 살짝 엿볼 것이다.

윌슨은 마음,문화,인간의 본성,사회과학,예술,윤리와 종교 등 여러 분야에 대해서 현대 과학의 성과,특히 생물학적 연구의 성과를 토대로 사회생물학의 거장으로서 안목과 식견이 느껴지는 통합적 설명을 제시하고 있다.

◎ 원문읽기

문화는 공동의 마음에 의해 창조되지만 이때 개별 마음은 유전적으로 조성된 인간 두뇌의 산물이다.

따라서 유전자와 문화는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하지만 이 연결은 유동적이다.

얼마나 그런지는 불명확하지만 말이다.

또한 이 연결은 편향되어 있다.

즉 유전자는 인지 발달의 신경회로와 규칙적인 후성규칙(後成規則,epigenetic rules)을 만들어 내고 개별 마음은 그 규칙을 통해 자기 자신을 조직한다.

(중략)

문화는 유전자·문화 공진화(共進化)의 부분으로서 각 세대 구성원 개인의 마음 속에서 집합적으로 재구성된다.

(중략)

어떤 이들은 주변 문화와 환경에 더 잘 생존하고 번식하도록 해 주는 후성 규칙들은 대물림한다.

그리고 그런 규칙을 전혀 갖지 않은 사람이나 있어도 약한 규칙을 가진 이들은 생존과 번식에서 밀려난다.

바로 이런 방식으로 좀 더 성공적인 후성 규칙들은 많은 세대를 거치면서 그 규칙들을 규정하는 유전자들과 함께 개체군 내에서 널리 퍼지게 된다.

결과적으로 인간 두뇌의 해부·생리적 구조가 진화해 왔듯이 행동도 자연선택에 의해 유전적으로 진화해 왔다.

▶해설=7장 '유전자에서 문화까지'는 이 책의 하이라이트라 할 수 있다.

윌슨은 인간을 포함한 동물의 행동을 진화와 유전자를 중심으로 해석하고자 하는 자신의 시도를 사회생물학이라 불렀다.

사회생물학자로서의 윌슨에게 있어 문화를 사회생물학적으로 설명해 내는 것은 무엇보다도 중요한 과업이었으며,이 과업을 이루기 위해 등장한 개념이 '유전자·문화 공진화'(gene-culture coevolution) 개념이다.

이 개념은 인류가 유전적 진화에 덧붙여 문화적 진화를 진행해 왔으며,두 진화는 상호작용으로 연결됐다는 견해이다.

이런 공진화 개념은 과학적 문화와 인문학적 문화를 이어주는 통섭의 핵심이랄 수 있다.

생물학과 문화가 어떻게 상호작용하는가를 밝힘으로써 인문학과 자연과학의 분리된 양극화 현상을 종식시키고 학문의 대통합을 이룰 수 있기 때문이다.

'후성규칙'은 유전자와 문화의 관계를 이해하는 데 필수적인 개념이다.

후성규칙은 유전자 자체에 들어 있는 규칙이 아니라 인지 발달의 편향된 신경 회로를 뜻한다.

유전자는 이 후성규칙을 만들어 내고 개별 마음은 그 규칙을 통해 자기 자신을 조직한다.

◎ 원문읽기

통섭을 향한 첫 걸음은 사회과학이 서술적·분석적으로 진행될 때 진정한 과학이겠지만 사회 이론은 아직 진정한 이론이 아니라는 사실을 인식하는 일이다.

사회과학은 초기 자연사 전통의 자연과학과 동일한 일반적 특징을 갖고 있다.

즉 사회과학은 풍부한 자료로부터 사회 현상들을 체계적으로 분류한다.

사회과학은 공동 행동의 예기치 않은 양상을 발견해 왔고 역사와 문화 진화의 상호작용을 성공적으로 추적해 왔다.

그러나 사회에서 마음과 뇌로 이어지는 여러 수준들을 관통하는 인과적 설명망을 만들어 내지는 못했다.

이런 실패로 인해 사회과학은 진정한 과학 이론의 본질을 결여하고 있다.

따라서 비록 사회과학자들이 종종 '이론'을 이야기하고 더 나아가 동일한 수준에서 동일한 종류의 언급을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통합되지 않는 이야기에 불과하다.

▶해설=윌슨은 사회학이 학문의 통섭의 측면에서 볼 때 초창기 수준에 불과하다고 비판하고 있다.

사회학 이론들이 사회현상에 대한 풍부한 자료들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창시자들에 얽매여 있거나 다원적이고 상대적인 정치 이념들에 얽매여 있다고 비판한다.

이 대목은 사회과학이 진정한 '이론'으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인간 행동의 특이성을 유전적 진화의 산물로 해석하는 진화생물학의 통찰을 수용해 자연과학과의 연합을 이뤄야 할 것이라는 윌슨의 사회과학에 대한 생각을 반영한다.

◎ 원문읽기

(예술의) 해석은 다중의 차원들,즉 역사,전기,언어,미적 판단 등의 여러 차원들에서 진행되며 인간 정신의 물질적 과정은 그 차원들의 기저에 놓여 있다.

이론적으로 편향된 과거의 비평가들은 많은 큰 길들로 한 번 가 보다가 정신분석학과 포스트모더니즘적 유아론 같은 명패가 붙은 밀실로 들어가 버렸다.

뇌가 작동하는 방식을 이해하는 데 있어 별다른 과학적 도움 없이 직관에만 의존했던 이들의 접근법은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중략) 만일 뇌과학,심리학,진화생물학의 통섭적 연구를 통해 뇌의 기능들이 도표로 정리되면 그 부산물로서 예술에 대한 영속적 이론을 얻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와 같은 과정을 통해 창조적 정신을 이해하려면 과학자와 인문학자 간의 공동 연구가 필요할 것이다.

▶해설=윌슨은 예술에 대한 인류의 이해도 자연과학적 연구의 성과와 결합해야 그 깊이를 획득할 수 있다고 본다.

특히 뇌의 진화에 대한 이해가 과학과 예술의 결합의 핵심이라고 윌슨은 주장한다.

윌슨이 예술의 모든 내용이 뇌의 생리학적 현상으로 모두 환원될 수 있음을 주장하려는 것은 아니다.

생물학적 이해를 바탕으로 예술을 바라볼 때 우리의 예술에 대한 이해가 풍부해짐을 설파하는 것이다.

◎ 원문읽기

종교적 초월론과 과학적 경험론 중 어떤 세계관이 우세한지는 인류가 미래를 어떤 식으로 규정하느냐에 따라 크게 다라질 것이다.

다음과 같이 결정적인 사실들을 깨닫게 된다면 모종의 화해에 이를 수도 있다.

즉 한편으로는 윤리와 종교가 여전히 너무 복잡하여 오늘날의 과학만으로는 깊이 있게 설명될 수 없다는 점과 다른 한편으로는 윤리와 종교는 대부분의 신학자들이 인정하는 것보다 훨씬 더 자율적인 진화의 산물이라는 사실이다.

과학은 윤리와 종교 속에서 가장 흥미롭고 아마도 자신을 겸허하게 만드는 도전에 직면할 것이며,반면 종교는 자신의 신빙성을 계속 유지하기 위해 과학의 발견들을 한데 통합시키는 방법을 어떻게든 찾아내야만 할 것이다.

종교는 경험적 지식에 모순되지 않는 인류 최고의 가치들을 불후의 시적 형식 속에 집어넣을 수 있을 때 그 만큼의 힘을 소유하게 될 것이다.

이것이 바로 강력한 도덕적 리더십을 제공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맹목적 신앙은 제아무리 열정적으로 표출된다 할지라도 충분하지 못하다.

과학은 자신의 자리에서 인간의 조건에 대한 모든 가정들을 가차 없이 시험대 위에 올려놓아야 할 것이다.

그러다 때가 되면 도덕적이고 종교적인 감정들의 기반이 발견될 것이다.

▶해설=윌슨은 윤리와 종교의 문제에 있어 기본적으로 경험론자의 입장 위에 서있다.

윤리와 종교 현상의 생물학적 근원을 탐색하고 물질적 기원이나 편향을 설명함으로 더 현명하고 지속성 있는 윤리적 혹은 종교적 합의를 이끌어 낼 수 있다는 것이다.

위 대목에서도 윌슨은 종교가 미래에서도 삶의 리더로서 기능하려면 더 이상 초월의 영역에만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되며 현실의 경험적 지식을 포용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반면 과학에게는 종교와 화해하기 위해서 겸허히 인간에 대한 과학적 발견과 가정들을 반성적으로 검토해야 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과학이 겸허의 미덕을 보일 때 종교 또한 경험의 영역을 포용할 수 있다는 말이다.

김훈회 S·논술 선임연구원 toatopia@nonsu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