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덕적 해이(moral hazard)
[경제를 알면 논술이 술술] 10.왜 들어갈 때 맘, 나올 때 맘이 다를까?


액션영화에는 '영화의 공식'이 있다.

아널드 슈워제네거가 나오는 액션영화를 보면 악당이 막판에 목숨을 구걸하다가 정작 살려주면 돌변해서 달려드는 장면이 어김없이 등장한다.

이렇듯 사람들은 정말 아쉬울 때와 아쉬움이 해소된 뒤 행동이 크게 달라지는 경향이 있다.

속된 말로 "(화장실에) 들어갈 때 맘 다르고,나올 때 맘 다르다"고 한다.

이런 심리나 행태가 좀 더 심해지면 자기 권리는 '칼' 같이 챙기면서 책임은 '물'처럼 여기게 된다.

한마디로 뻔뻔해지는 것이다.

'뻔뻔함'은 법적으로 처벌이 어렵지만 도덕적으로 비난을 사기 충분하다.

"나는 절대 그럴 리 없다…"고? 대입이나 입사 면접에서 다들 "뽑아만 주신다면 열심히 하겠다"고 다짐한다.

하지만 그게 말처럼 쉬운가.

경제학에서는 이런 행태를 '도덕적 해이(moral hazard)'라고 한다.

'역선택'이 정보비대칭에서 생기는 거래(계약) 이전 단계의 문제라면,'도덕적 해이'는 거래 이후 정보비대칭에서 파생되는 문제다.

주로 주인-대리인 관계에서 나타난다.

세상에 얼마나 '도덕적 해이'의 위험이 널려있는지 살펴보자.

◎정보비대칭은 아파트 출입문 구멍

도덕적 해이의 원인이 되는 정보비대칭은 아파트 출입문의 '내다보기 구멍'에 비유할 수 있다.

바깥을 내다보기 위한 이 구멍은 아파트 안에서 바깥 사람을 내다볼 때는 크게 보이지만 바깥에선 안을 들여다 볼 수 없다.

즉,내가 내 자신에 대해 아는 만큼 상대방도 나를 잘 알 수는 없다.

여기에다 남이 볼 때와 남이 안 볼 때의 행동이 달라지는 사람들의 일반적인 성향이 더해지게 마련이다.

부모는 수험생 자녀가 열심히 공부하라고 방문을 닫아 주고,행여 공부에 방해될까봐 뒤꿈치를 들고 살금살금 걷기까지 한다.

하지만 공부가 싫은 수험생이라면 방문이 닫힌 순간 부모의 기대를 저버리고 얼마든지 '딴 짓'을 할 수도 있다.

그래서 선조들은 "혼자 있음을 삼가라(愼獨)"고 가르쳤다.

남이 안 볼 때(남이 내 의도를 모를 때) 이를 이용해 마음대로 행동하거나 자기 이익을 극대화하려는 도덕적 해이가 생기기 때문이다.

◎"보험 들었으니 안심하고 운전하라(?)"

도덕적 해이도 역선택과 마찬가지로 보험회사들이 가장 고민해온 현상이다.

생명보험에 가입했다고 건강에 신경 안 쓰고,화재보험에 들었다고 화재 예방을 소홀히 하는 사람이 많다는 이야기다.

한 자동차보험의 광고문구는 '(보험에 들었으니) 이제 안심하고 운전하세요'이다.

고객이 사고가 나도 다 보상해주니 걱정말라는 이야기일 터이다.

하지만 이 광고를 보험계약자 입장에서 뒤집어 생각해 보면 '보험에 들었으니 방심운전을 해도 된다'는 것처럼 들릴 수 있다.

낡은 차 운전자들은 대체로 운전이 거칠다.

서슴없이 끼어들고 차선을 바꾼다.

다른 차가 뒤에서 받아주면 이 참에 낡은 범퍼를 갈아보겠다는 심보는 아닐까.

미국에선 귀국이 임박한 중국 유학생이 그동안 몰던 낡은 중고차로 다른 중국 학생 차를 고의로 들이받아 사고를 내는 경우가 종종 있다고 한다.

자신은 보험에 든 데다 곧 귀국할 테니 손해볼 게 없고,피해자인 중국 학생은 차값보다 더 많은 보상금을 받아 모자라는 유학비에 보태는 식이다.

◎도덕적 해이와 기회주의

'맨큐의 경제학'에선 도덕적 해이를 "불완전하게 감시를 받는 사람이 부정직하거나 바람직하지 못한 행위를 하는 경향"이라고 정의했다.

예컨대 기업의 고용주는 직원들이 열심히 일하는지를 일일이 감시할 수 없어 직원들이 적당히 '농땡이' 부릴 여지가 생긴다.

근무시간에 인터넷으로 주식시세를 들여다보고,'싸이질'을 하는 등 대충 시간만 때우다 월급을 타가는 것이다.

보험금을 지급해야 할 보험회사도 가입자들이 얼마나 건강관리,안전운전,화재 조심에 신경쓰는지 모른다.

바로 주인(고용주,보험회사)과 대리인(직원,가입자)의 이해상충 문제다.

의료분야도 마찬가지다.

고가 의료장비를 들여놓은 병원에 가면 대개 환자들에게 MRI 등 비싼 검사를 권한다.

자기 건강에 대한 정보가 의사보다 부족한 환자들로선 쉽게 거부하지 못한다.

법적으론 문제삼기 어렵더라도 도덕적으로 떳떳할까.

◎한국에서 확장된 도덕적 해이

위환위기를 겪으면서 도덕적 해이,또는 모럴 해저드가 일상용어처럼 쓰였다.

재벌들은 은행 돈 빌려다 문어발 확장에 나섰고,은행들 역시 '대마불사'(大馬不死,too big to fail)만 믿고 제대로 신용상태를 점검하지 않은 채 막대한 자금을 대출해줬다.

그 결과 무수한 재벌이 도산했고,국민혈세로 공적자금을 넣어 은행의 손실을 메워줘야 했다.

금융회사가 문 닫는 상황에 대비해 정부가 예금 지급을 전액 보장해 주던 예금자보호제도도 평시에 별 문제가 없었지만 외환위기가 닥치자 도덕적 해이의 표본으로 떠올랐다.

예금을 전액 보호해주니 예금자는 앞뒤 재지 않고 이자가 높은 데로 몰렸고,아무리 부실한 금융회사도 고금리로 예금을 끌어모아 고수익 고위험 자산에 앞다퉈 투자했다.

잘 되면 자기 능력,잘못 돼도 정부가 메워주니 걱정이 없었기 때문이다.

법규상 잘못된 것은 아닌데 그 손실은 고스란히 국민 부담이 됐다.

결국 도덕적 해이는 자기에겐 이익인데 타인,사회,국가엔 큰 손실을 끼친다.

이 때문에 금융감독,건전성 규제 등 사회적 감시가 강화되고 있는 것이다.


오형규 한국경제신문 연구위원 ohk@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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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덕적 해이 해소, 교육.계도보다 인센티브가 낫다

보건복지부는 의료급여 1종 수급자들의 도덕적 해이 때문에 골치를 썩였다.

극빈층인 1종 수급자들은 병원비,약값을 재정에서 대신 내주는 것을 이용해 이 병원 저 병원 '의료 쇼핑'을 다녔다.

한 사람이 1년간 8823번이나 병원과 약국을 들렀는가 하면,하루에 27군데 병원에서 진료받은 기록까지 있다.

일부 병원과 약국은 이들을 이용해 진료도 하지 않고 의료비를 허위 청구하는 부정을 저지르기도 했다.

의료급여로 인한 재정부담액은 2002년 2조313억원에서 지난해 3조9251억원으로 4년 새 두 배로 늘었다.

복지부는 의료급여 제도의 파행을 막기 위해 꾀를 냈다.

경제학에서 강조하는 자기책임 원리를 도입한 것이다.

매달 6000원(연간 7만2000원)을 건강생활유지비로 104만명의 1종 수급자에게 주고,이들이 진료받으러 갈 때마다 병원은 1000원,약국은 500원씩 내도록 했다.

의료급여를 받을 수 있는 날도 365일(당뇨 등 만성질환은 30일 추가)로 제한해 하루 1회를 넘지 못하도록 했다.

일부 진보 정당과 시민단체에선 지나치다고 비난했지만 복지부는 병원·약국에 들러 건강생활유지비 이상 쓸 사람은 1종 수급자의 3%에 불과하고 나머지는 오히려 돈이 남는다고 일축했다.

이 제도가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미지수지만,과도한 의료 쇼핑과 재정 부담은 상당부분 줄어들 전망이다.

이렇듯 도덕적 해이를 막는 방법은 '남의 것'을 '자기 것'으로 여기게끔 인센티브를 주는 것이 최선이다.

1종 수급자는 진료를 적게 받을수록 건강생활유지비가 남으므로 이익이 된다.

보험가입자에겐 일정 요건(금연,교통법규 준수)을 갖춘 경우 할인 혜택을 준다.

예금자보호제도의 도덕적 해이는 전액 보장이 아닌 부분 보장(1인당 5000만원)으로 전환하고,은행들로 하여금 대출 시 철저한 신용조사를 하도록 유도하는 것도 그런 맥락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