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식은 과연 본유의 통일성을 지니는가?
인간을 포함한 동물의 사회적 행동이 진화 과정의 결과로서 형성된 것이라는 생각에 바탕을 둔 사회생물학의 창시자 에드워드 윌슨(1929~)은 20여권이 넘는 과학 명저를 저술한 과학저술가로 명성이 높으며,'인간 본성에 대하여'와 '개미'로 퓰리처상을 두 번이나 수상했다.
그는 현재 하버드대 생물학과 석좌교수로 있는데,1975년 대표작 '사회생물학'을 발표한 이후 학문적 관심 영역을 점차 확대해 이제는 자연과학,사회학 그리고 인문학을 아우르는 통합적 사상체계를 구축,학문 전반에 지대한 영향을 주는 현대를 대표하는 과학 지성으로 손꼽힌다.
또한 그는 과학과 자연 보존에서 쌓은 업적으로 수많은 상을 수상,학문이 현실에 어떠한 관심과 태도를 지녀야 하는지도 잘 보여주었다.
'통섭; 지식의 대통합'(Consilience; The Unity of Knowledge)은 이러한 윌슨의 사상을 집대성한 책이라 할 수 있다.
이 책에서 그는 인간의 지식이 본유적인 통일성을 가지고 있는지의 문제를 제기하며,이런 '지식의 통일성'을 '통섭'(consilience)이라는 잘 쓰이지 않는 개념으로 담아낸다.
'통섭'의 원어 'consilience'를 어원적으로 살펴보면 '함께 도약함'(con+salire)의 의미를 지니고 있는데,'여러분과 학문들이 독자적 영역에서 자기 나름대로의 목소리를 내면서도 그것들이 전체적으로는 대조화를 이루는 상태에 있음'을 의미한다고 생각해 볼 수 있다.
윌슨은 지식의 계속적인 파편화와 그것으로 인한 철학의 혼란은 실제 세계의 반영이라기보다는 학자들이 만든 인공물이라고 본다.
그는 지식의 통일성이 철학의 중심 논제여야 한다고 주장하는데,그것은 그가 지식의 통일성 획득이 인간의 본성(인간의 내면)과 인간의 조건(외부 세계)에 대한 올바른 이해의 대전제라고 보기 때문이다.
이러한 지식의 통일성을 획득하기 위해서는 자연과학적 설명들을 인문학과 사회과학적인 설명들과 아우르는 작업이 필요하며,이런 작업이야말로 인간의 지식 체계의 기초를 새롭게 다지는 통합을 낳게 될 것이라고 윌슨은 전망한다.
'통섭'은 윌슨의 이러한 전망과 더불어 인문학 사회과학 자연과학을 아우르는 그의 실제적 작업과 그 성과를 담고 있는 책이다.
◎원문읽기
과학을 넘어서서 학문의 큰 가지들을 가로지르는 통섭의 가능성에 대한 믿음은 아직 과학이 아니다.
그것은 형이상학적 세계관이고 몇몇 과학자와 철학자만이 공유하는 소수 견해이다.
그것은 제1원리로부터 논리적으로 증명될 수 없다.
또 어떤 경험적 시험에도 뿌리를 두고 있지 않다.
그렇다면 그 세계관을 지지해 주는 것은 무엇인가? 자연과학이 지금까지 지속적으로 성공해 왔다는 사실밖에는 없다.
즉 그런 성공으로부터 추정할 수 있을 뿐이다.
만일 사회과학과 인문학에서도 이 세계관이 힘을 발휘한다면 그것은 아주 확실한 지지 증거로 작용할 것이다.
통섭이 매력적인 가장 큰 이유는 그것이 지적인 모험의 전망을 열어 주고 비록 만족스럽지는 않더라도 인간의 조건을 보다 정확하게 이해하도록 이끈다는 데 있다.
▶해설=물질세계가 법칙의 지배를 받는다는 과학의 형이상학적 전제는 우리들이 믿는 지배적 세계관이며,그 세계관의 확실성은 지금까지의 인류의 경험에 의해 뒷받침되어 왔다.
하지만 인간은 이 법칙에 대한 믿음에 덧붙여 법칙의 단순성에 대한 심미적 애착까지 지니고 있다.
우리는 우주의 법칙은 그리 복잡하지 않을 것이며,법칙은 단순할수록 좋다고 믿는 것이다.
이러한 애착은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이후 현대 물리학자들이 물리학 법칙들을 하나로 아우르는 대통일장 이론을 갈구하는 것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윌슨은 우리가 과학에 대해 지니고 있는 이러한 지식의 통일성에 대한 믿음이 과학을 넘어서 사회과학과 인문학에서도 확인될 수 있다고 믿고 있다.
사회과학과 인문학도 자연과학과의 통섭에서 면제되어서는 안 되며,이런 통섭의 확인 작업은 인간과 세계에 대한 본질적 이해라는 이득을 가져다 줄 것이라고 그는 전망하고 있다.
◎원문읽기
세계가 정말로 지식의 통섭을 장려하게끔 작동한다면 나는 문화의 영역도 결국에는 과학,즉 자연과학과 인문학 특히 창조적 예술로 전환될 것이라고 믿는다.
자연과학과 인문학은 21세기 학문의 거대한 두 가지가 될 것이다.
반면 사회과학은 계속해서 세분화되면서 그 중 어떤 부분은 생물학으로 편입되거나 생물학의 연장선 위에 있게 될 것이며,그 밖의 부분들은 인문학과 융합될 것이다.
사회과학의 분과들은 계속해서 존재하겠지만 결국 그 형태는 극단적으로 변할 것이다.
그런 와중에 철학 역사학 윤리학 비교종교학 미학을 아우르는 인문학은 과학에 접근할 것이고 부분적으로 과학과 융합할 것이다.
▶해설=윌슨이 통섭 이후의 학문에 대해 예측하는 대목이어서 흥미롭다.
그는 앞으로의 학문은 자연과학과 인문학으로 양분될 것이며,사회과학은 생물학과 인문학 속으로 분해되어 흡수될 것이라고 보고 있다.
사회과학이 생물학으로 편입될 것이라는 주장에서 사회의 제반 현상을 진화론적 생물학의 이론으로 설명하려는 시도인 사회생물학을 주창한 윌슨의 면모를 확인할 수 있다.
더 나아가 윌슨은 인문학 역시 과학과 융합할 수 있을 것이라는 조심스러운 전망을 제시하고 있다.
윌슨의 전망이 맞아 미래의 학문이 통섭적 양상을 나타낼지,아니면 지금처럼 고도의 전문적이고 분과적인 양상이 심화될지 예상해보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원문읽기
과학의 최전선에는 언제나 자연을 자연적 구성 성분으로 쪼개는 환원주의가 있다. (중략)
환원주의는 다른 방도로는 도저히 뚫고 들어갈 수 없는 복잡한 체계를 비집고 들어가기 위해 채용된 탐구 전략이다.
궁극적으로 과학자들을 흥분시키는 것은 복잡성이지 단순성이 아니다.
환원주의는 그 복잡성을 이해하는 유일한 방법이다.
환원주의 없이 복잡성을 추구하면 예술이 탄생하지만 환원주의로 무장하고 복잡성을 탐구하면 그것은 과학이 된다. (중략)
우리는 환원주의가 과학의 일차적이고 핵심적인 활동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과학자들이 분해와 분석만 하는 것은 아니다.
가치와 의미에 관한 철학적 반성을 통해 종합과 통합의 능력을 단련하는 것도 매우 중요하다.
예를 들어,기본 단위를 찾는 데 몰두하는 과학자들처럼 아무리 좁은 영역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연구자라 할지라도 복잡성은 늘 그들의 머릿속에 맴돌고 있다. (중략)
더 큰 조직을 작은 부분들로 나누는 작업 뒤에는 환원주의의 개념적 쟁점이 숨어 있다.
각 조직의 수준에서 잘 통하는 법칙과 원리를 더 일반적이고 근본적인 조직 수준의 법칙과 원리로 환원할 수 있을까? 이런 질문에 대한 긍정적인 대답 중 가장 강한 형태는 완전 통섭(total consilience)이다.
이 입장에 따르면 자연은 물리학의 단순한 보편법칙에 따라 조직되어 있고 모든 다른 법칙과 원리가 결국에는 이 법칙으로 환원된다.
이런 형이상학적 세계관은 나를 비롯한 수많은 과학적 유물론자들에게는 길이요 빛이기는 하지만 실상 참은 아니다.
적어도 이런 견해는 지나친 단순화의 산물이다.
예컨대 살아 있는 세포 수준과 그 위 수준들에서는 새로운 법칙과 원리로 설명해야 하는 현상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법칙과 원리는 더 일반적인 수준의 법칙과 원리로부터는 예측될 수 없는 것들이다.
아마도 상위 수준의 법칙과 원리 중에는 어쩌면 우리가 영원히 이해할 수 없는 것들도 있을 것이다.
가장 일반적인 수준에서 가장 복잡한 체계를 예측하기는 아마 불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이런 사실이 모두 나쁜 것만은 아니다.
나는 기꺼이 다음과 같이 고백할 수 있다.
과학에 이러한 형이상학적 자극을 줌으로써 마치 살얼음판을 걷는 흥분을 느낄 수 있다고.
▶해설=윌슨이 과학적 방법론의 핵심적 이념인 환원주의에 대해 평가하고 있는 대목이다.
환원주의란 복잡한 현상이나 개념을 기본적인 요소로 설명하려는 입장을 말하는데,예를 들어 '물'이라는 현상을 '수소 둘과 산소 하나'라는 기본적 요소로 구성되어 있다고 설명하는 방식이다.
윌슨은 환원주의가 복잡성을 이해하게 하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환원주의의 효용을 말하면서도 예측될 수 없는 상위 수준의 법칙과 원리를 인정하면서 환원주의의 한계 또한 지적하고 있다.
이 대목은 윌슨이 자신이 주창하는 통섭 개념의 효용과 한계를 고백하는 대목이라고도 볼 수 있다.
왜냐하면 통섭은 인간 지식의 통일성을 찾으려는 환원주의적 시도이지만,환원주의가 설명력의 한계를 지니는 만큼 통섭 또한 완벽한 통일성을 꿈꿀 수 없다는 고백이기 때문이다.
윌슨은 그렇다고 통섭을 포기하지 않는다.
끊임없는 통섭의 시도 자체가 가져다주는 지적 모험의 흥분이야말로 인간의 무한한 진보를 가능케 하는 원동력이기 때문이다.
김훈회 S·논술 선임연구원 toatopia@nonsul.com
인간을 포함한 동물의 사회적 행동이 진화 과정의 결과로서 형성된 것이라는 생각에 바탕을 둔 사회생물학의 창시자 에드워드 윌슨(1929~)은 20여권이 넘는 과학 명저를 저술한 과학저술가로 명성이 높으며,'인간 본성에 대하여'와 '개미'로 퓰리처상을 두 번이나 수상했다.
그는 현재 하버드대 생물학과 석좌교수로 있는데,1975년 대표작 '사회생물학'을 발표한 이후 학문적 관심 영역을 점차 확대해 이제는 자연과학,사회학 그리고 인문학을 아우르는 통합적 사상체계를 구축,학문 전반에 지대한 영향을 주는 현대를 대표하는 과학 지성으로 손꼽힌다.
또한 그는 과학과 자연 보존에서 쌓은 업적으로 수많은 상을 수상,학문이 현실에 어떠한 관심과 태도를 지녀야 하는지도 잘 보여주었다.
'통섭; 지식의 대통합'(Consilience; The Unity of Knowledge)은 이러한 윌슨의 사상을 집대성한 책이라 할 수 있다.
이 책에서 그는 인간의 지식이 본유적인 통일성을 가지고 있는지의 문제를 제기하며,이런 '지식의 통일성'을 '통섭'(consilience)이라는 잘 쓰이지 않는 개념으로 담아낸다.
'통섭'의 원어 'consilience'를 어원적으로 살펴보면 '함께 도약함'(con+salire)의 의미를 지니고 있는데,'여러분과 학문들이 독자적 영역에서 자기 나름대로의 목소리를 내면서도 그것들이 전체적으로는 대조화를 이루는 상태에 있음'을 의미한다고 생각해 볼 수 있다.
윌슨은 지식의 계속적인 파편화와 그것으로 인한 철학의 혼란은 실제 세계의 반영이라기보다는 학자들이 만든 인공물이라고 본다.
그는 지식의 통일성이 철학의 중심 논제여야 한다고 주장하는데,그것은 그가 지식의 통일성 획득이 인간의 본성(인간의 내면)과 인간의 조건(외부 세계)에 대한 올바른 이해의 대전제라고 보기 때문이다.
이러한 지식의 통일성을 획득하기 위해서는 자연과학적 설명들을 인문학과 사회과학적인 설명들과 아우르는 작업이 필요하며,이런 작업이야말로 인간의 지식 체계의 기초를 새롭게 다지는 통합을 낳게 될 것이라고 윌슨은 전망한다.
'통섭'은 윌슨의 이러한 전망과 더불어 인문학 사회과학 자연과학을 아우르는 그의 실제적 작업과 그 성과를 담고 있는 책이다.
◎원문읽기
과학을 넘어서서 학문의 큰 가지들을 가로지르는 통섭의 가능성에 대한 믿음은 아직 과학이 아니다.
그것은 형이상학적 세계관이고 몇몇 과학자와 철학자만이 공유하는 소수 견해이다.
그것은 제1원리로부터 논리적으로 증명될 수 없다.
또 어떤 경험적 시험에도 뿌리를 두고 있지 않다.
그렇다면 그 세계관을 지지해 주는 것은 무엇인가? 자연과학이 지금까지 지속적으로 성공해 왔다는 사실밖에는 없다.
즉 그런 성공으로부터 추정할 수 있을 뿐이다.
만일 사회과학과 인문학에서도 이 세계관이 힘을 발휘한다면 그것은 아주 확실한 지지 증거로 작용할 것이다.
통섭이 매력적인 가장 큰 이유는 그것이 지적인 모험의 전망을 열어 주고 비록 만족스럽지는 않더라도 인간의 조건을 보다 정확하게 이해하도록 이끈다는 데 있다.
▶해설=물질세계가 법칙의 지배를 받는다는 과학의 형이상학적 전제는 우리들이 믿는 지배적 세계관이며,그 세계관의 확실성은 지금까지의 인류의 경험에 의해 뒷받침되어 왔다.
하지만 인간은 이 법칙에 대한 믿음에 덧붙여 법칙의 단순성에 대한 심미적 애착까지 지니고 있다.
우리는 우주의 법칙은 그리 복잡하지 않을 것이며,법칙은 단순할수록 좋다고 믿는 것이다.
이러한 애착은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이후 현대 물리학자들이 물리학 법칙들을 하나로 아우르는 대통일장 이론을 갈구하는 것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윌슨은 우리가 과학에 대해 지니고 있는 이러한 지식의 통일성에 대한 믿음이 과학을 넘어서 사회과학과 인문학에서도 확인될 수 있다고 믿고 있다.
사회과학과 인문학도 자연과학과의 통섭에서 면제되어서는 안 되며,이런 통섭의 확인 작업은 인간과 세계에 대한 본질적 이해라는 이득을 가져다 줄 것이라고 그는 전망하고 있다.
◎원문읽기
세계가 정말로 지식의 통섭을 장려하게끔 작동한다면 나는 문화의 영역도 결국에는 과학,즉 자연과학과 인문학 특히 창조적 예술로 전환될 것이라고 믿는다.
자연과학과 인문학은 21세기 학문의 거대한 두 가지가 될 것이다.
반면 사회과학은 계속해서 세분화되면서 그 중 어떤 부분은 생물학으로 편입되거나 생물학의 연장선 위에 있게 될 것이며,그 밖의 부분들은 인문학과 융합될 것이다.
사회과학의 분과들은 계속해서 존재하겠지만 결국 그 형태는 극단적으로 변할 것이다.
그런 와중에 철학 역사학 윤리학 비교종교학 미학을 아우르는 인문학은 과학에 접근할 것이고 부분적으로 과학과 융합할 것이다.
▶해설=윌슨이 통섭 이후의 학문에 대해 예측하는 대목이어서 흥미롭다.
그는 앞으로의 학문은 자연과학과 인문학으로 양분될 것이며,사회과학은 생물학과 인문학 속으로 분해되어 흡수될 것이라고 보고 있다.
사회과학이 생물학으로 편입될 것이라는 주장에서 사회의 제반 현상을 진화론적 생물학의 이론으로 설명하려는 시도인 사회생물학을 주창한 윌슨의 면모를 확인할 수 있다.
더 나아가 윌슨은 인문학 역시 과학과 융합할 수 있을 것이라는 조심스러운 전망을 제시하고 있다.
윌슨의 전망이 맞아 미래의 학문이 통섭적 양상을 나타낼지,아니면 지금처럼 고도의 전문적이고 분과적인 양상이 심화될지 예상해보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원문읽기
과학의 최전선에는 언제나 자연을 자연적 구성 성분으로 쪼개는 환원주의가 있다. (중략)
환원주의는 다른 방도로는 도저히 뚫고 들어갈 수 없는 복잡한 체계를 비집고 들어가기 위해 채용된 탐구 전략이다.
궁극적으로 과학자들을 흥분시키는 것은 복잡성이지 단순성이 아니다.
환원주의는 그 복잡성을 이해하는 유일한 방법이다.
환원주의 없이 복잡성을 추구하면 예술이 탄생하지만 환원주의로 무장하고 복잡성을 탐구하면 그것은 과학이 된다. (중략)
우리는 환원주의가 과학의 일차적이고 핵심적인 활동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과학자들이 분해와 분석만 하는 것은 아니다.
가치와 의미에 관한 철학적 반성을 통해 종합과 통합의 능력을 단련하는 것도 매우 중요하다.
예를 들어,기본 단위를 찾는 데 몰두하는 과학자들처럼 아무리 좁은 영역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연구자라 할지라도 복잡성은 늘 그들의 머릿속에 맴돌고 있다. (중략)
더 큰 조직을 작은 부분들로 나누는 작업 뒤에는 환원주의의 개념적 쟁점이 숨어 있다.
각 조직의 수준에서 잘 통하는 법칙과 원리를 더 일반적이고 근본적인 조직 수준의 법칙과 원리로 환원할 수 있을까? 이런 질문에 대한 긍정적인 대답 중 가장 강한 형태는 완전 통섭(total consilience)이다.
이 입장에 따르면 자연은 물리학의 단순한 보편법칙에 따라 조직되어 있고 모든 다른 법칙과 원리가 결국에는 이 법칙으로 환원된다.
이런 형이상학적 세계관은 나를 비롯한 수많은 과학적 유물론자들에게는 길이요 빛이기는 하지만 실상 참은 아니다.
적어도 이런 견해는 지나친 단순화의 산물이다.
예컨대 살아 있는 세포 수준과 그 위 수준들에서는 새로운 법칙과 원리로 설명해야 하는 현상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법칙과 원리는 더 일반적인 수준의 법칙과 원리로부터는 예측될 수 없는 것들이다.
아마도 상위 수준의 법칙과 원리 중에는 어쩌면 우리가 영원히 이해할 수 없는 것들도 있을 것이다.
가장 일반적인 수준에서 가장 복잡한 체계를 예측하기는 아마 불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이런 사실이 모두 나쁜 것만은 아니다.
나는 기꺼이 다음과 같이 고백할 수 있다.
과학에 이러한 형이상학적 자극을 줌으로써 마치 살얼음판을 걷는 흥분을 느낄 수 있다고.
▶해설=윌슨이 과학적 방법론의 핵심적 이념인 환원주의에 대해 평가하고 있는 대목이다.
환원주의란 복잡한 현상이나 개념을 기본적인 요소로 설명하려는 입장을 말하는데,예를 들어 '물'이라는 현상을 '수소 둘과 산소 하나'라는 기본적 요소로 구성되어 있다고 설명하는 방식이다.
윌슨은 환원주의가 복잡성을 이해하게 하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환원주의의 효용을 말하면서도 예측될 수 없는 상위 수준의 법칙과 원리를 인정하면서 환원주의의 한계 또한 지적하고 있다.
이 대목은 윌슨이 자신이 주창하는 통섭 개념의 효용과 한계를 고백하는 대목이라고도 볼 수 있다.
왜냐하면 통섭은 인간 지식의 통일성을 찾으려는 환원주의적 시도이지만,환원주의가 설명력의 한계를 지니는 만큼 통섭 또한 완벽한 통일성을 꿈꿀 수 없다는 고백이기 때문이다.
윌슨은 그렇다고 통섭을 포기하지 않는다.
끊임없는 통섭의 시도 자체가 가져다주는 지적 모험의 흥분이야말로 인간의 무한한 진보를 가능케 하는 원동력이기 때문이다.
김훈회 S·논술 선임연구원 toatopia@nonsu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