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공리주의만으론 살 수 없다

[고전속 제시문 100선] (58) 찰스 디킨스 '어려운 시절'
영국이 낳은 위대한 소설가 찰스 디킨스(Charles Dickens 1812~1870)는 '올리버 트위스트' '크리스마스 캐럴' 등의 작품을 통해 19세기 가난하지만 평범한 사람들의 삶을 사실적으로 담아내면서 다양한 계층에서 폭발적 인기를 누렸다. 그는 산업사회의 여러 부작용이 이를 조장하고 합리화하는 잘못된 사고방식,즉 공리주의적 사고방식에서 비롯되었다고 보고,'어려운 시절(Hard Times)'에서 당대 사회 지배 이데올로기로 작동하던 공리주의에 대해 근본적인 비판을 가한다.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라는 명제를 내건 공리주의는 개인의 행복을 최대로 향상시킬 수 있는 사회적 효용성을 최고 가치로 내세웠다. 행복의 척도를 산술적으로 측정 가능한 물질적 효용성에 두었기 때문에 개인의 감정과 상상력의 가치는 무시되었다. 인간은 사회 시스템의 부품으로 취급되었으며 생산수단의 일부로 전락했다. 인간적 가치는 부정되고 다만 '사실(fact)'에 기초한 설명과 이해만이 존재할 뿐이었다.

디킨스는 공리주의를 전면적으로 비판하기 위한 소재로 '교육'을 선택했다. 교육은 공리주의가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인간 개조의 원동력으로,공리주의자들은 산업체계가 강조하는 규율과 지식을 가르치기 위해 노동자와 빈민의 자식들에게도 교육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디킨스는 '어려운 시절'을 통해 인간을 감정과 상상력,지성을 가진 복합체가 아닌 경제적 단위,통계적 수치로만 생각하는 현실을 비판하고,반공리주의적 가치와 인간적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원문읽기

그것은 붉은 벽돌의 도시,만약 공장 연기와 재가 허락했다면 붉은색이었을 벽돌로 이루어진 도시였다. 그러나 사실은 야만인의 물감 칠한 얼굴처럼 부자연스러운 붉음과 검정의 도시였다. 그것은 기계와 높은 굴뚝의 도시였는데,그 높다란 굴뚝으로부터 연기의 뱀이 끊임없이 영원히 영원히 기어나와서 결코 풀어지지 않았다. 도시 안에는 검은 운하가 하나 있고 고약한 악취를 풍기는 염료 때문에 자줏빛으로 흐르는 강이 하나 있었다.창으로 꽉 찬 거대한 건물더미가 있는데 거기서는 하루 종일 덜컹거리고 덜덜 떠는 소리가 들렸고,우울한 광증에 사로잡힌 코끼리의 머리 같은 증기기관의 피스톤이 단조롭게 상하운동을 했다. 서로 똑같이 닮은 큰 길이 몇 개 있었고 한층 더 닮은 작은 거리가 많이 있었다. 그 거리에는 마찬가지로 꼭 닮은 사람들이 같은 시간에 같은 포도에서 같은 소리를 내며 같은 일을 하기 위해 출퇴근하면서 살고 있었다. 그들에게 매일은 어제나 내일과 꼭 같았고 매해는 작년이나 내년과 꼭 같았다. 코크타운의 이런 속성은 그 도시를 지탱하는 노동과 대체적으로는 떼어놓을 수 없는 것이었다. (중략) 코크타운에서는 심하게 일하는 것 외에는 어떤 것도 볼 수 없었다.

▶해설=이 소설의 배경인 코크타운은 런던 같은 전통적 도시가 아니라 산업혁명을 거치면서 새로 부상한 북부 산업도시를 대표한다. 도시 전체의 파괴적이고 기계적인 이미지를 공장과 기계,그 속에서 일하는 노동자의 일상과 연결지어 산업자본주의 시대의 한 단면을 강렬한 이미지로 제시한다.

◆원문읽기

"자,내가 원하는 것은 사실이오. 이 학생들에게 사실만을 가르치시오. 살아가는 데는 사실만이 필요한 거요. 사실 외에는 어떤 것도 심지 말고 사실 이외의 모든 것을 뽑아버리시오. 사실에 기초할 때만 논리적으로 사고하는 인간을 만들 수 있는 거요. 학생들에겐 사실 이외의 어떤 것도 하등의 도움이 되지 못하오. 이것이 내가 내 자식들을 키우는 원칙이고,이것이 내가 이 학생들을 교육시키는 원칙이오. 사실만을 고수하시오,선생!" (중략) "상상이란 단어를 완전히 버리도록. 상상과 자네(씨시)는 아무 관계도 없으니까." (☞2003학년도 고려대 수시2에서 영어 지문으로 제시되었음)

▶해설=디킨스는 이 소설 전체에 걸쳐 산업사회에서 '사실' 중심의 공리주의 교육이 갖는 폐해를 그리고 있다. 이 교육의 요체는 '궁금해 하지 말라'이고 모든 일을 산술적 계산에 의해 해결하는 것이다. 디킨스는 자유로운 상상과 인간적 호기심을 가진 씨시를 강경하고 완고한 태도로 나무라면서 사실만을 강조하는 학교 이사장 그래드그라인드를 통해 역설적으로 사실(fact) 너머에 존재하는 인간미와 상상(fancy)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산업사회의 학교 교육은 산업현장에 필요한 훈련된 노동자를 길러내는 데 목적이 있었다. 따라서 교사는 사회가 요구하는 지식을 일방적으로 주입하고 학생은 (자신이 노동현장에서 관리자의 지시를 받는 것과 마찬가지로) 흡수하기만 하면 된다고 여겨졌다. 디킨스는 학교 교육과 공장 운영 사이의 연관성을 밝혀내고 양자 모두가 공리주의에 의해 뒷받침된다는 사실을 포착한다. 교육과 사회적 요구에 관한 다양한 문제를 생각해볼 만하다.

◆원문읽기

"선생님이 '자,이 학급이 하나의 국가라고 하자. 이 국가에 5000만파운드의 돈이 있다. 이 국가가 부자나라가 아니겠느냐? 20번 여학생'하고 물었어요. 모르겠다고 말했어요. 누가 돈을 갖고 있는지,그리고 일부나마 제 돈인지 아닌지를 모른다면,여기가 부자나라인지 아닌지,제가 부자나라에서 사는지 아닌지 알 수 없다고 생각했어요. (중략) 그러자 선생님은 말씀하셨어요. 이 교실이 커다란 도시고 100만명이 살고 있는데 연간 스물다섯 명만이 길에서 굶어 죽는다. 그 비율에 대한 너의 의견은 무엇이냐 하고요. 저는-더 나은 답변이 생각나지 않았기 때문에-굶어 죽는 사람에게는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100만명이든 100만명의 100만배이든 마찬가지로 견디기 힘든 일일 거라고 말했어요. 그 답변 역시 틀린 거지요."

▶해설=씨시는 절대적으로 사실과 계산만이 존재하는 공리주의 교육의 열등생이다. 디킨스는 씨시를 통해서 국가의 부와 인간의 삶의 질에 대한 기존의 사고를 거부하는 혁명적인 모습을 보인다. 공리주의에서 강조하는 '합리성'이란 자본주의의 경제적 합리성에 부응하는 것이고 아동의 인격적 성장보다 산업체계가 요구하는 ('사실'에 의거한) 지식 주입을 목적으로 하는 교육과도 상응한다.

씨시는 분업이 아닌 협동이 우선시되고,노동과 생활이 유희와 어우러지는 곡마단에서 성장하였다. 씨시는 그래드그라인드에 의해 공리주의 교육을 받으면서도 인간의 본질적인 생명력과 활기,타인에 대한 믿음과 상부상조의 미덕을 간직한 긍정적 인물로 그려진다. 디킨스는 씨시와 곡마단을 통해 코크타운의 세계를 효과적으로 비판하며,대안은 인간의 창조적 생명력과 인간미에 있음을 시사한다.

◆원문읽기

"많은 사람들이 책임 있는 자리에 앉아 있는데 그 사람들 중에 많은 사람들이 부정한 짓을 할 겁니다. 그것이 세상 돌아가는 법이라고 아버지가 말하는 걸 수백 번은 들었습니다. 저라고 세상 돌아가는 법을 어쩔 수 있겠어요? 그런 식으로 다른 사람들을 위로했었잖아요,아버지. 편하게 생각하세요!"

▶해설=그래드그라인드는 공리주의 교육을 받은 딸 루이자가 '취향이나 상상''열망이나 애정'을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해 토로하고 결혼이 불행하게 끝나는 것을 보면서,자신이 유일하고 확실한 길이라고 믿어왔던 사실 위주의 교육이 실패했음을 인식하게 된다. 아들 톰은 공리주의 교육의 부작용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톰은 범죄(절도)를 저지르고도 뉘우치지 않는다. 각자의 이익 추구가 정당한 사회에서,자신 역시 (타인들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이익을 위해 행동했을 뿐이라고 말한다. 디킨스는 공리주의 교육을 받은 톰이 단순히 사실과 지식을 강조하는 것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자신의 이익을 추구하기 위해서는 부정까지도 용인하는 모습을 통해 공리주의가 가지고 있는 모순을 신랄하게 비판한다.

◆원문읽기

"세상에는 사랑이 있습지요,결국 전부가 자기 이익만은 아니고 아주 다른 어떤 것이 있습지요" "두 가지 생각이 동시에 드는 것 같지 않습니까,선생님?" 슬리어리씨가 물을 탄 브랜디 잔을 들여다보며 생각에 잠겼다가 말했다. "하나는 이 세상에 이기심이 아니고 그것과는 전혀 다른 무엇인 사랑이 존재한다는 것이고,다른 하나는…,그 사랑도 그 나름대로 계산하거나 계산하지 않는 방식을 지니고 있다는 점 말입니다."

▶해설=디킨스는 범죄를 저지른 톰의 탈출을 돕는 곡마단 주인 슬리어리의 행위가 실정법에 위배됨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정당성을 부여한다. 여기서 디킨스는 기존의 법률보다 더 큰 정의가 존재하며,그것은 계산과 도표에 근거한 '사실'이 아닌,인간미와 창조적 상상에서 비롯한 '사랑'이라고 이야기한다.

디킨스는 영문학 사상 유례없는 대중적 인기를 누렸다. 문학작품(혹은 예술작품)에서 예술성과 대중성은 반비례한다는 통념에도 불구하고 그는 '대중적이기 때문에 위대한 예술가'로 평가받는다. 이는 그가 살았던 시대가 아직 대중성과 민중성,그리고 예술성이 상호배타적이지 않은 시대였기 때문이기도 하지만,그의 작품이 민중적 시각과 민중의 생생하고 풍부한 예술적 활력에 근거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어려운 시절'의 모순을 정확하게 파악하고,대중 독자들이 진정으로 열망하는 바를 분명하게 제시한 것이다. 대중에 대한 애정을 바탕으로 디킨스가 발견한 것은 인간적 미덕과 존엄성,그리고 사랑 바로 그것이다.

석연숙 S·논술 선임연구원 verver@nonsu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