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마천의 선택…치욕보다 더 큰 명분

[고전속 제시문 100선] (54) 사마천 '사기(史記)'
저도 생명을 아까워하는 비겁한 자에 불과하지만 거취만은 분명하게 하려는 사람입니다. 어찌 치욕을 모르고 죄인 노릇만 하고 있겠습니까? 천한 노예와 하녀조차도 자결할 수 있습니다. 저 또한 그렇게 하려 했으면 언제든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고통과 굴욕을 참아내며 구차하게 삶을 이어가는 까닭은 가슴 속에 품고 있는 숙원이 있어,비루하게 세상에서 사라질 경우 후세에 문장을 전하지 못함을 안타깝게 여겼기 때문입니다.(중략)

만일 이 저술이 완성되면 명산에 보관되고 각지의 선비들에게 전해질 수 있다면,저의 치욕도 충분히 씻게 될 것이라 생각합니다. 설사 이 몸이 산산이 부서진다 해도 무슨 후회가 있겠습니까? (사마천,임안에게 보내는 편지 중에서)

<사기(史記)>는 130권에 이르는 방대한 내용으로,춘추전국시대를 살다 간 수많은 영웅호걸을 비롯한 다양한 인물들의 '열전',연대기에 따라 발생한 사건을 통해 제왕들의 삶을 서술한 '본기',제후들의 '세가',당시의 생활을 분야별로 서술한 '서',역사적인 사건들을 한눈에 볼 수 있도록 정리한 '표'로 구성된다.이러한 사기에 등장하는 사건들과 인물들은 우리들이 평소에도 대화에 인용할 정도로 매우 친숙하기까지 한다.그런데 우리 역사도 아닌 2000여년 전 중국 역사를,그것도 그 양이 어마어마하다 보니 모든 내용을 접하기란 쉽지 않다.하지만 당시 선비로서는 도저히 선택할 수 없는 궁형을 선택한 비극적인 인물이었던 사마천이 <사기>를 저술로 승화시킨 정신과 역사를 바라보는 관점은 오늘을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또한 인생의 의미,처세의 태도,인간관계 등에 대해 깊이 사색할 수 있는 철학서로서도 자리매김하고 있다.

◆원문읽기:태사공자서(太史公自序)

"<시경>과 <서경>의 뜻이 깊고 세세하며 서술이 간략한 것은 제약된 상황 속에서 작자들이 자신의 뜻을 표현하고자 하였기 때문이다.옛날 서백은 유리에 갇히게 되자 <주역>을 풀이하였으며,공자는 진나라와 채나라 사이에서 곤경에 처하여 <춘추>를 지었다.굴원 또한 추방당한 몸이 되어 <이소>를 지었고,좌구명을 실명한 이후에 <국어>를 남겼으며,손빈은 다리를 절단하는 형을 받고 병법을 저술하였다.또 여불위는 촉으로 유배된 이후에 <여씨춘추>를 세상에 남기었으며,한비자도 진에서 갇힌 몸이 되어서 <세난>,<고분>편을 지었던 것이다.<시경>에 수록된 300편의 시도 대체로 성현이 분노 속에서 지은 것이다.이들은 모두 마음에 깊이 맺힌 바가 있으나 그 뜻을 직접 표현할 수 없었기에 지나간 사실을 빌어 미래에 그 뜻을 전하였던 것이다."

▶해설=사마천은 '이릉의 화'로 인해 궁형을 받은 인물이다.절대적 권력 앞에서 자신의 양심을 지킨 대가로 사마천은 허리를 잘려 죽는 형벌을 받게 되었는데 아버지로부터 자신에게 넘겨져 모든 삶을 바쳤던 역사서의 완성을 위해 궁형을 선택한다.당시의 선비로서는 치욕스러웠을 뿐만 아니라 '하루에도 아홉 번 장이 뒤집혀지는' 고통을 안겨 준 이 사건을 통해 포기할 수 없었던 사마천의 역사서 편찬 의지를 알 수 있다.그가 <사기>의 완성을 위해 보여준 의지는 이후 그의 삶뿐만 아니라 역사를 바라보는 시각에까지 영향을 미친 것은 당연하다.어쩌면 사마천 개인의 인생 역정이 오히려 <사기>가 고전으로서의 생명력을 가질 수 있었던 계기가 되지 않았을까?

◆원문읽기:열전-백이열전(伯夷列傳)

[고전속 제시문 100선] (54) 사마천 '사기(史記)'
누군가 이렇게 말했다. '하늘의 뜻이란 사사로움이 없으며 언제나 착한 이 편이다.' 그렇다고 한다면 백이,숙제는 과연 착한 사람이었었는가? 어진 덕을 쌓고 품행을 바르게 했음에도 마침내 굶어 죽은 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인가? 옳고 그름이란 무엇인가? 공자의 70제자 가운데 공자는 오직 안회를 가리켜 학문을 즐기는 사람이라고 칭찬했는데,정작 안회는 끼니조차 제대로 이어갈 수 없었으며 지게미와 쌀겨로도 배를 채우지 못하고 마침내 일찍 세상을 떠났다.하늘이 착한 사람에게 지불하는 대가가 이런 것이란 말인가!

도척은 날마다 무고한 사람을 죽이고 사람의 간으로 회를 쳐서 먹었으며 포악한 수천 명의 무리를 이끌고 천하를 어지럽혔지만 끝내 아무 천벌도 받지 않고 제 목숨을 온전히 누리고 살았다.이러한 것은 도대체 무슨 이유인가? 평생 동안 하는 짓이 못되고 남에게 해꼬지만 하면서도 죽을 때까지 호의호식하고 죽은 이후에도 그 부귀가 자손까지 이어지는 경우가 많다.반면에 걸음 한 번 내딛는 데도 땅을 가려서 밟고,말 한 마디를 하는 데도 때를 가려서 하며,길을 가는 데도 지름길을 찾지 않고,공정한 일이 아니면 하지 않는 사람들이 오히려 재앙을 만나는 일이 부지기수다. 과연 하늘의 도리라는 것은 옳은 것인가, 잘못된 것인가!

▶해설=수많은 역사서 중에서 <사기>가 그 어떤 역사서들과 다른 '생명력'을 가진 역사서로서 자리매김할 수 있는 이유는 사마천 스스로가 '죽어 있는 역사서'를 거부했기 때문이다.사건,인물,기록과 같은 것들에 끊임없이 '왜?'라는 의문을 던지는 것에서 역사가로서의 사마천의 면모를 알 수 있다.때문에 사마천은 역사적 사건을 기존의 의식과 판단으로 대하지 않는데,이러한 태도가 가장 도드라지게 나타난 부분이 '열전'의 첫 번째 '백이열전'이다.사마천은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는 백이,숙제의 죽음에 강한 의문을 가진다.'과연 그들이 죽어가면서 한번도 원망하지 않았을까?','칭송받는 이들이 굶어 죽는 것이 하늘의 뜻이란 말인가?','도대체 하늘의 뜻이 무엇인가?','하늘의 뜻은 옳은가, 그른가?' 이러한 질문들은 어쩌면 그가 당한 형벌과 무관하지 않은 것 같다.궁형으로 치욕과 고통 속에서 살아가는 자신의 삶을 통해 역사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의 삶이 어떤 것이 옳고 그른 것인지에 대한 답을 찾고자 노력했다고 할 수 있다.그리고 이러한 태도가 현재까지 살아있는 역사서로서의 <사기>의 힘으로 작용한다.

◆원문읽기:본기-시황본기(始皇本紀)

겨우 열세 살의 어린 나이에 왕이 된 진시황은 39세의 젊은 나이에 드디어 천하를 평정하여 중국 역사상 가장 거대한 통일 국사를 건설하였다.어느 날 진시황은 신하들을 모아 놓고 말했다. "천하는 이미 통일되었는데,이 크나큰 업적을 영원히 후세에 전하기 위해서는 제왕이라는 호칭을 새로운 것으로 바꿔야겠소,그대들의 의견을 말해 보시오." 그러자 신하들이 입을 모아 아뢰었다. "폐하의 덕은 삼황보다 낫고,그 공적은 오제보다 높사옵니다. 옛날 태고 적에 천황,지황,태황이 있었는데 그 중에서도 태황이 가장 존엄했습니다.그래서 앞으로는 왕을 태황이라 부르는 것이 좋을 듯 싶습니다." 그러자 진시황이 말하였다. "그러면 태황의 황과 오제의 제를 따서 황제라 칭하기로 한다. 그리고 나는 짐이라 칭할 것이다."그때부터 진시황은 황제로 불려졌다.그 후 진시황은 다시,"짐은 최초로 황제가 되었기 때문에 시황제라 부르기로 한다.짐의 뒤는 차례대로 2세,3세 등으로 하여 이를 천만 세까지 이어 나가도록 하자"고 하여 진나라가 영원히 존재할 것으로 확신하였다.그러나 진나라는 천만세는커녕 겨우 2세에 이르러 멸망해 15년의 짧은 왕조로 끝나 버렸다.

▶해설=<사기>가 오랜 세월 동안 살아 숨 쉬는 역사서로 인정받은 이유는 사마천이 사실에 가까운 역사서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였다는 데 있다.그는 자기 스스로가 의문을 가진 내용에 대해서는 가급적 언급을 피하였으며,확인되지 않은 사건이나 분명하지 않은 사실은 기록하지 않았다.그러나 사실성을 높이기 위해 <사기>에는 '대화체'를 사용하고 있다.사실 '대화' 형식의 기록은 그 사건을 정확하게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사용하기 어려운 형식이다.그렇지만 과감하게 대화를 인용하는 것에서 사마천의 역사 인식을 엿볼 수 있다.역사 기록의 사실성을 높이면서,그 사실 여부에 관한 것은 후세의 판단에 맡기는 사마천의 태도 덕분에 <사기>는 그 어떤 역사서도 갖지 못한 생동감을 가지게 된 것일지도 모른다.

21세기,변혁의 세기를 맞아 <사기>에 관한 관심이 날로 높아지고 있다.'사마천'에 대한 관심도 마찬가지이다.우리보다 먼저 변혁의 시대를 살다간 인물에 대해 관심을 가지는 일은 어쩌면 당연할지도 모른다.2000년 전의 인물인 사마천의 깊은 고뇌와 의문들은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고뇌와 의문들과 다를 바 없다.때문에 <사기>를 접하는 사람들은 사마천과 마주하고 역사를 확인하는 느낌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김은희 S·논술 선임연구원 lovemin@nonsu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