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버스의 마음씨

[오태민의 마중물 논술] (18) 재량권의 비극
산골 깊숙이 숨어있는 마을들을 세상과 연결해 주던 시골버스. 느티나무가 서 있는 허름한 담뱃가게 창문에는 시간표가 붙어 있다. 외지인은 가게 툇마루에 앉아 버스를 기다려 보지만 예정된 시간이 되어도 버스는 나타나지 않는다.'이제 올거여'라는 가겟집 할매의 말마따나 주민 한두 명이 모습을 드러내는 건 예정된 시간보다 30분이 지나서다. 산 어귀를 돌아 먼지바람과 함께 버스가 나타난다. 외지인은 급한 마음에 서둘러 버스에 오르지만 기사는 시동을 꺼버리고 아예 차에서 내린다. 본격적으로 승객들이 시골 정류장 앞에 모여드는 건 버스가 도착하고 나서다. 먼지바람과 시끄러운 엔진 소리가 '읍내 볼 일 있는 사람 이제 모이소'라는 신호였기 때문이다. 앞 마을에서 탄 사람들도 비슷한 사정이었기에 출발을 재촉하는 이는 아무도 없다. 애타는 외지인만 의자에 편히 기대지도 못하고 괜히 허리만 꼿꼿이 펴고 앉아 있다. 한나절 한 대밖에 없는 시골버스는 한 명의 승객도 버려두지 않으려고 이렇듯 마음씨 좋게 운행되곤 했다.

◆경제학자들의 냉정함

폴리 사이는 주요 항공 이착륙 노선의 바로 아래 지역에 주택을 소유하고 있는데,어느 날 아침 제트비행기 소리에 수면을 방해받고는 보상받을 권리가 있다고 판단했다. 그녀는 공항,또는 항공사가 자신의 휴식과 재충전의 권리를 박탈한 대가로 얼마간이라도 보상을 받기 위하여 법적으로 제소한다. 그녀는 의당 보상을 받아야 하는가? (폴 헤인 '경제학적 사고방식')

마음씨 좋은 사람들은 대기업인 항공회사나 공항이 폴리 사이의 권리에 대해서 어느 정도 보상해 주는 것이 좋을 것 같다고 생각한다. 일단 법원이 폴리 사이의 손을 들어주게 되면 수천 혹은 수만 명의 주민들이 비슷한 보상을 청구할 것이다. 법원의 판결과 동시에 공항 주변의 주택가격은 크게 오르겠지만 보상을 떠안게 된 항공사의 주식은 곤두박질 칠 것이다. 대기업의 주식이 내리고 서민들의 집값이 오른 게 뭐가 문제냐고 반문할 수 있지만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젊어서 열심히 일한 부부의 노후보장이 바로 그 항공회사의 주식일런지 모른다. 비용을 견디지 못한 항공사가 관련 노선 운항을 중단하게 되면 부자가 아닌 게 분명한 직원 일부가 직장을 잃을 것이며,그 노선을 이용하던 승객들은 더 비싼 교통수단을 선택해야 한다.

그럼 폴리 사이의 권리는 무시해도 좋다는 말인가? 경제학자들은 폴리 사이의 처지가 안타깝긴 해도 이미 기대한 선택이기 때문에 이 기대를 뒤집는 것이 더 불공평하다고 생각한다.

◆가격은 기대를 반영한다

세상에 완벽한 주거지역은 없다. 소음도 없고 도심과도 가깝고 안전하며 편의시설도 잘 갖추어져 있고 게다가 공기도 맑은 지역이 없다는 뜻이 아니다. 완벽하진 않아도 어느 정도 이런 조건을 갖춘 지역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이 지역을 원하기 때문에 이런 지역에 거주하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들과 경쟁해야만 한다. 경쟁은 호가(呼價)를 높인다. 결국 사람들이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요소들을 만족하면서 동시에 집값까지 저렴한 거주 지역은 있을 수 없다.

항공노선을 유지한다는 기대가 항공회사의 주식가격에 포함되어 있는 것처럼 그녀의 집값에는 새벽잠을 깨우는 소음의 가격이 반영되어 있다. 법원이 이런 기대를 뒤집고 폴리 사이의 손을 들어주면 집값이 오르게 되는데 이것은 부의 창출이 아니다. 항공사의 주식가격이 폭락했기 때문에 부가 이동했을 뿐이다. 이런 예상하지 못한 재분배는 사람들의 선택과 그간의 노력을 흩뜨려놓기 때문에 불공평하다. 누군가에게 기대하지 않던 횡재는 누군가에게는 기대하지 못한 손실을 의미한다. 폴리 사이의 처지를 염려한 법원의 선량한 마음은 공평성을 훼손했을 뿐 아니라 사회적 비용까지 증가시킨다.

◆재량권의 비극

산골 주민들은 왜 제 시간에 정류장으로 모이지 않을까? 버스가 자기를 버리고 가는 일이란 없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일까? 제 시간에 가면 분명히 손해 보기 때문이다. 괜히 서둘러 나가봐야 시간만 허비한다. 그 시간이면 고추를 널 수 있고 밭 한 뙈기를 더 김매기 할 수 있다. 시간은 도시나 시골이나 귀중한 자원이고 선량한 사람들도 계산은 할 줄 안다. 누구나 기다려주는 마음씨 좋은 버스기사는 결국 모든 사람을 기다리게 만든다. 시간을 냉정하게 지키면 하루 두 번도 운행할지 모르지만 한 번에 족하면서도 느려터진 교통수단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외지인이 골탕 먹는 것은 한 번이지만 버스를 이용하는 모든 주민들은 늘 손해를 보아야 한다.

기사의 재량권이 문제의 원인이다. 기다려줄 수 있는 권한이 있다는 것을 다 아는데 냉정하게 굴었다가는 비난을 견디기 어렵다. 그러나 기사가 발휘한 권한은 기사의 것이 아니다. 누군가의 편의를 봐주는 순간 누군가에게는 피해를 주게 된다. 없던 효용을 만들어서 누군가에게 준 것이 아니라 다른 이들의 것을 거칠게 옮겨 논 것에 불과하다. 선의로 포장되어 있지만 선의의 비용은 자신이 지불하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이 대신 감수했다. 역시 미덕은 좋은 결과를 낳고 악덕은 나쁜 열매를 맺는다. 버스기사의 선의는 사실 미덕이 아니라는 것이 문제의 본질이었다.

◆탈레반은 합리적일까?

이미 희생당했거나 억류되어 있는 피랍자와 그 가족들의 고난을 생각하면 냉정함을 유지하는 자체가 잔인해 보인다. 그러나 인터넷과 언론을 통해 유포되고 있는 이야기들은 도움은커녕 사태 해결을 가로막는 것이 태반이다. 탈레반은 특정 종교를 응징하기 위해 사건을 꾸민 것이 아니다. 위험한 곳에서 더 주의하지 못한 것은 문제가 있지만 활동 자체를 탓하는 것도 분별력 없는 태도다. 도움을 필요로 하는 곳에 한국의 젊은이들이 자기 비용을 들여 찾아가는 것은 권장되어야지 싸잡아 비난할 일은 아니다. 지난 세기 우리에게도 다른 나라 젊은이들의 희생에 진 빚이 많이 남아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탈레반의 목적이 응징이 아니라 협상이라면 이들도 계산해야 한다. 목적을 위해 사용할 자원이 제한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들의 광신보다는 이익과 비용을 따져보는 것이 사태 해결에 더 도움이 된다. 인질의 억류나 처형은 비용을 수반한다. 어쨌건 거친 환경에서 인질의 생존을 도와야 하기 때문이며 처형은 국제적인 비난을 초래하고 어쩌면 자신들의 지지기반을 희생시키게 된다.

◆사태를 악화시키고 있는 실력의 과신

탈레반 입장에서 인질의 억류 비용에 비해 이익이 보잘 것 없어지는 것은 해결을 위해 좋은 일이다. 탈레반 입장에서 따져보자. 한국 대통령이 나서면 미국이나 아프가니스탄 정부가 설득당할 것이라는 기대가 인질 억류의 이익을 높일까,낮출까? 한국의 여론이 대통령과 정부로 하여금 행동할 수밖에 없도록 내몰 것을 기대할 때와 그렇지 않을 때 인질의 값어치는 높아질까,낮아질까? 피해자 가족들이 애끓는 노력을 통해 국제사회 여론을 움직일 것이라고 기대할 때와 그렇지 않을 때 인질 한 명을 더 죽이겠다는 위협은 도움이 될까,그렇지 않을까?

인간은 생각보다 나약하다. 벼랑에 내몰리면 누구나 무언가를 붙잡게 된다. 이런 인간의 나약함을 이용해 목적을 달성하려는 탈레반의 행동은 야만의 극치다. 그러나 우리 역시 이렇게 나약한 인간의 실력에 너무 의존했던 것은 아닌지 성찰해야 한다. 사태 이후 대통령은 자신에게 권한이 많은 것처럼 말했고,정부는 능력이 있는 것처럼 굴었으며,언론은 자신들이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처럼 반응했다. 가족들은 자신들의 노력이 상황을 바꿀 것이란 기대를 실천하고 있다. 이런 인간적인 격정이 탈레반의 기대를 한껏 높여 놓았지만 국제사회의 굳은 행동은 한국에 재량권이 없다는 것을 탈레반에 확인 시켜 주었다. 그들로 기대를 꺾고 현실적인 계산을 다시 하도록 한 것은 국제사회의 냉정함이지 한국의 뜨거움이 아니었다. 적지 않은 후유증을 남기겠지만 재량권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곱씹어 보게 하는 사건으로 기억될 것이다.


▶학생글: 이예인 한광여고 2학년

(…)우리나라 국민들의 지대한 관심이 탈레반 내부의 의사결정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 탈레반은 한국국민들이 정부에게 인질석방을 요구하기를 바란다. 한국정부가 미국과 아프간 정부에 영향력을 끼쳐 포로석방을 하게 만들겠다는 생각일 것이다. 물론 자국민이 잡혀있는 것에 대해 한국국민들이 관심을 갖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잡혀있는 인질들에게 어떤 방향으로 영향을 끼칠지는 깊이 생각해봐야 한다. 국내의 여론에 힘입어 한국은 아프간에 특사를 파견하여 아프간정부를 설득하려 했다. 이것은 그들의 뜻대로 움직이는 상황밖에는 않된다. 그들은 이 일을 크게 알려 국제사회의 의견도 포로석방을 향할 것을 바랄 것이다. 또한 탈레반은 국내외 관심을 더 끌기 위해 차례로 인질을 사살할 것이다. 자국민이 위험에 처해있다고는 하지만 좀 더 이성을 찾고 우리의 반응이 탈레반에 억류되어 있는 인질들의 안전에 어떻게 영향을 끼칠지 생각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