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 이기적이거나 공익적이거나

[고전속 제시문 100선] (53) 리하르트 반 뒬멘 '개인의 발견'
독일의 역사학자 리하르트 반 뒬멘의 '개인의 발견-어떻게 개인을 찾아가는가 1500~1800'은 개인의 자기발견에 대한 기존의 인식에 대해 새로운 시각을 제공한다. 개인에 대한 인식은 르네상스시기부터가 아니라 중세의 기독교에서부터 살펴볼 수 있으며,우리가 알고 있는 현대적인 의미의 보편적이고 자유로운 '근대적 개인'은 18세기 이후에야 나타났다고 한다.

뒬멘은 개인 중심의 사고와 행동의 발달이 가정,학교,교회,국가와 같은 사회 문화적인 맥락의 변화 속에서 역사적으로 서서히 형성됐다는 것을 풍부한 사례를 들어 제시한다. 자화상,자서전,일기,개인적 서신,교양소설,해부학,골상학,인류학,심리학,가톨릭의 고백성사,학교와 가정의 양육제도,형벌과 법정 제도 등을 포괄하는 다양한 영역에서 '개인의 발견'이라는 주제를 다루고 있다. 전통주의적 행동에서 개인주의적 행동으로 이행하는 과정을 시대의 변화 속에 놓인 구체적인 개인의 삶과 행동에서 발견하고 있는 점에서 현대 역사학의 새로운 흐름을 잘 보여주는 책이라고도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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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 르네상스 시기가 자기성찰이라는 점에서 괄목할 만한 성장이 있었던 시기라 해도,그렇다고 중세에는 자아발견을 위한 노력이 없었다거나 혹은 전반적인 보편주의 가운데 자아가 푹 파묻혀 있었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또한 르네상스의 개인이 19세기가 구성해 낸 것처럼 '시민적(burgerlich)' 개인이었던 것도 아니다. 계몽적 사고,시민적 사고라는 특징을 확실하게 보여주는 근대적 개인은 18세기 말 이전에는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해설=개인의 발견이 르네상스시기부터라는 야코프 부르크하르트와 빌헴름 딜타이의 생각은 오늘날까지 별다른 이견 없이 받아들여지고 있다. 하지만 기독교가 대부분 사람들의 삶의 원리로 작용했던 중세시대에도 개인에 대한 인식과 관념은 싹이 트고 있었다. 교회는 성이나 계급에 따른 구별 없이 여자와 노예까지도 세례를 받게 함으로써 모든 개개인을 신의 피조물로 인정했다. 원칙적으로 교회는 각 개인의 가족 관계와 계급 관계를 벗어나 모든 개개인에게 동등하게 다가갔다. 이러한 개인이라는 의식과 개인의 자기발견에 대한 의식은 르네상스시기를 거쳐 18세기까지의 사회 발전과 정치경제적 상황 속에서 점진적으로 '근대적' 개인에 대한 의식으로 변화한다. 스스로 생각하고 스스로를 교육하며 스스로 결정하는 근대적 개인이라는 의식은 계몽주의에 의해 19세기에야 비로소 확립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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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단적으로 종교적이었던,즉 신에게만 매달렸던 종교개혁 시기에도 개인에게 집중했었지만 이와 달리,르네상스시기에 존재했던 인간과 자기 자신에 대한 관심은 분명 세속적인 특징이 두드러졌다. 종교개혁자들이 자신들의 세속적인 관심을 열어두었던 것처럼 르네상스에도 종교적인 차원이 내포되기는 했지만 말이다. 다양한 영역에서 세속적인 고백이 이루어졌고 이는 특히 전기에 대한 관심이나 인간과 그의 육체,성격에 대한 학문적인 관심,특히 초상화가 부각됐던 미술에서 두드러졌다. 이 모든 관심분야에서 학문적이나 학자적인 성찰은 직접 관찰과 경험에 점차 밀려나게 됐다.

▶해설=종교개혁은 전 유럽에 걸쳐서 교황의 오랜 역사적 권위를 거부하게 만들었다. 개인의 구원은 더 이상 성직자 같은 중간 매개자 없이 신과 '직접' 관계를 맺게 됐다. 모든 개인은 신 앞에서 양심에 따라 스스로를 책임져야 한다는 새로운 기독교인들은 전통의 틀에 얽매여 생각하거나 살지 않았으며 자신의 확신과 견해에 따라 행동했다. 르네상스시기의 인문주의자들과 학자들은 교회의 지배적인 권력에서 벗어나기 위해 자신에 대한 기록을 남기기 시작했다. 자기 자신의 길을 걸어가려는 욕구와 자기에 대해 책임을 지려는 욕구는 자기 성찰의 결과인 자서전과 개인 감정을 이야기하는 사적인 편지로 표현됐다. 16세기에 널리 유행한 초상화 예술을 통해 군주와 귀족,시민과 상인,학자들은 자신을 개성이 있는 영원불멸의 존재로 만들려고 했다. 개인을 주제화하는 이런 성향은 당시의 변화하는 사회 문화적 상황 속에서 이루어졌고 발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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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성의 발견과 개인화의 역사에서,교회-종교의 통제 이외에 근대 초기 국가제도도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이 제도 안에서 개인은 주체 및 개인으로 확인되고 선언될 수 있었고 또 그렇게 되었어야 했다. 바로 신문 제도를 갖춘 근대 초기의 형벌 체제와 법정 제도다. 신문 제도는 추상적인 법과 국가 권위의 이름으로 인간적인-더 정확히 말하면 비인간적인-행동의 '진실함(Wahrheit)'을 시험해야 했다. 근대 초기의 고통스러운 형벌 법정은 우선적으로 국내 질서를 유지하고 국민들을 길들이려(통제하려) 한 국가와 이익관계가 부합했다.

▶해설=법정은 사회와 국가의 규범을 어긴 모든 사람들에게 자신을 변호하라고 강요했고 죄를 인정한 모든 사람들을 처벌했다. 모든 사람은 개인으로서 자신의 행동에 책임을 져야 했다. 신분과 지위에 따른 현실적인 특권과 부당함이 근대 초기의 형벌 체제에 존재하기도 했지만,법정에 선 모든 사람들은 예외 없이 개인으로서 재판을 받았다. 법정의 판결은 공포되고 어떤 범죄가 어떤 처벌을 받는지가 공적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근대 초기의 법정 제도는 국민의 죄나 부당함에 대한 새로운 윤리 의식을 강화시켰다. 또한 법정은 진실에 맞게 사건을 재구성하고 범죄자의 책임을 밝히기 위해 광범위한 자료를 바탕으로 범죄자를 신문해야 했다. 판사가 전체 사건과 그 원인에 대해 판결을 내리기 위해서는 범죄자의 인격 전체에 관심을 기울여야 했고 범죄자가 자신의 인생사를 고백하도록 해서 죄인 본인과 대중의 완전한 동의를 얻어야 했다. 결과적으로 이러한 법정 제도는 개인의 '자기발견' 과정을 반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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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 후기와 근대 후기 사회사상과 정치사상의 핵심 개념은 공공의 이익,즉 공익(Gemeinnurtz)이었다. 모든 사회적·정치적 행동은 공익에 기여해야만 했다. 그렇다고 이러한 규칙을 어긴 사람이 없었다거나 실제로 자기의 사익을 추구한 사람이 없었다는 것은 아니지만 '자기 이익만 차리는(이기적)' 행동이라는 비난만큼 뭇사람들의 지탄의 대상이 된 것도 없었다. (중략)개인적으로 부를 추구하는 것은 모두 비난을 받아 마땅하다고 여겨졌다. 사회의 목표는 '양식'을 각 신분에 맞게 안정화시켜 배분하는 것이었다. 비록 16세기 후반부터 구체적인 사회 현실이나 경제 현실의 모습이 변하기 시작했어도 18세기까지는 '공익'이라는 질서가 공적으로 지지를 받았다. 이 질서는 그러나 이미 '개인의 이기심'이 도처에 만연한 현상에 대한 반응이기도 했다.

▶해설=권력자들은 지배를 정당화하기 위해 자신의 모든 행동을 공익을 위한 것이라고 강변했다. 다른 한편으로 공익은 신분제인 모든 구사회의 도덕적 바탕이었고 정치는 공익이라는 명분으로 개개인의 행동을 규제했다. 공익만이 법과 평화를 보장하는 이념적인 수단이었다. 이기적인 행동들은 단호한 처벌의 대상이었다. 이기적인 행동은 사회의 화합을 저해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 질서에도 어긋나는 것이었다. 하지만 16세기 후반부터 철학과 신학에서 벌어진 정열과 자기애에 대한 논쟁은 자기애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를 가능하게 했다. 이런 논의는 자기이익에 대한 긍정적인 새로운 가치평가를 가능하게 했고,18세기 후반에 영국에서 애덤 스미스로부터 시작된 경제적 개인주의는 사회 질서의 바탕을 공익에서 개인적 이익으로 변화시켰다. 바야흐로 더 나은 삶을 위해 개인이 자신의 이익을 끊임없이 추구하는 행위가 사회의 발전과 번영의 원천이 됐다.

근대화 과정에서 많은 굴곡이 있었던 우리나라는 '근대적 개인'에 대한 깊이 있는 성찰을 할 수 있는 물리적 시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근대화 내지는 현대화라는 개념이 이미 우리의 보편적인 일상으로 존재하고 있지만,아직도 전근대적인 생각과 행동들이 우리 사회에 실재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사회적 약자의 입장에서 '근대적 개인'은 여전히 논의할 만한 유효한 개념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아울러 개인 내면의 규율화 과정으로 개인화 과정을 이해하는 미셸 푸코의 생각과 자아성찰과 자기기획의 과정으로 개인화 과정을 이해하는 뒬멘의 생각을 비교해 보는 것도 이 책을 읽은 뒤에 생각해 볼 수 있는 재미있는 토론거리이다.

양충공 S·논술 선임연구원 newage@nonsu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