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혁명과 산업혁명은 분리돼 있지 않다
에릭 홉스봄(1917~ )은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에서 오스트리아계 어미니와 유태계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났다. 런던의 성 메리르본 고전문법학교를 다녔고 케임브리지의 킹스칼리지에 들어가 역사학을 전공했다. 홉스봄은 오늘날 활동하고 있는 최고의 마르크스주의 역사가로 손꼽히고 있다. 동시대 역사가로서 로드니 힐튼과 크리스토퍼 힐,그리고 에드워드 톰슨이 영국사 연구에 치중한 반면,홉스봄의 저작들은 영국, 유럽에서 라틴아메리카에 이르기까지 광범한 영역에 걸쳐 있으며,그 시기도 17세기부터 20세기 현대사까지 통괄하고 있다. 특히 '아래로부터 위로의 역사'적 시각에서 전체사로서의 역사 구도를 일관되게 견지해 당대의 정치와 경제,사회와 문화,예술 및 문화비평을 포괄하는 박식한 역사가의 면모를 유감없이 드러내고 있다. 역사 3부작 혁명의 시대(1962),자본의 시대(1975),제국의 시대(1987)는 그의 대표작으로,프랑스 대혁명과 산업혁명으로 인류사회가 어떻게 변화·발전해왔는가를,근대세계가 어떻게 형성되었는가를 방대한 자료를 통해 완전히 새롭게 해석해내고 있다.
◆원문읽기
유럽의 교역 및 자본주의적 기업에 의한 급속하고도 광범위한 팽창은 이미 이러한 문명과 세력들의 사회질서를 잠식하고 있었다. 이는 아프리카의 경우 전례 없이 활발하게 이루어졌던 끔찍한 노예무역을 통해서,인도양 주변에서는 경쟁적인 식민화 세력의 침투를 통해서,중동·극동에서는 교역과 군사적 충돌을 통해서 진행되었다. 이미 유럽에 의한 직접 정복은 16세기 에스파니아 및 포르투갈인들과 17세기 북아메리카 백인 정착민들의 선구적 식민지 개척에 의해,오래 전부터 이전 점유지역을 벗어나 상당히 뻗어나가기 시작했다. 영국인들에 의해 커다란 변화가 이루어졌는데,그들은 사실상 무굴 왕조를 쓰러뜨리고 인도의 일부 지역(특히 벵골)에 대한 직접적인 영토 지배를 이미 확립시켜 놓고 있었다. 우리가 다루는 시대가 되면 영국인들은 인도 전체의 지배자 및 관리자가 되는데,이는 이러한 목표를 향한 제 1보였다.
▶해설=프랑스혁명 이후 유럽에 의한 세계의 지배체제가 본격화된다는 점에서 프랑스혁명 직전의 세계―특히 유럽과 유럽 외 지역과의 관계를 중심으로 홉스봄은 살펴보고 있다. 18세기 후반까지도 유럽 이외 지역의 거대한 문명들은 대체로 동등한 입장에서 유럽의 상업,해상무역,군사세력과 맞서고 있었다. 오히려 문화 면에서는 동양의 문물을 유럽인들은 적극적으로 수용하였다. 하지만 절대왕정의 후원에 힘입은 자본주의적 교역상과 기업들은 점점 극동,인도,아프리카 지역의 사회를 잠식해가고 있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유럽 세력들이 단순히 총칼을 통해서 식민지화를 이룩하고 내키는 대로 착취해가지는 않았다는 점이다. 그들은 자본주의적 양식을 식민지와 기타 문명에 내재화시킴으로써 착취와 파괴를 자연스럽게 진행해 나갈 수 있었다. 즉,승인된 폭력과 만들어진 제도에 의해서 그것은 정당화되어 갔다.
◆원문읽기
프랑스혁명은 그 이전이나 이후의 모든 혁명 중에서 유일한 대중사회 혁명이었으며,이에 비견될 만한 어떠한 격변보다도 훨씬 더 급진적이었다. 미국의 혁명가들과 정치적인 공감 때문에 프랑스로 이주했던 영국의 자코뱅파들이 프랑스에서는 자신들이 온건주의자라고 느꼈던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다. 토머스 폐인은 영국과 미국에서는 극단주의자였지만,파리에서는 지롱드 당원 중에서도 가장 온건한 사람에 속했다. 대체로 말해서,아메리카 대륙에서는 혁명의 결과 영국,에스파니아,포르투갈의 정치적 지배만이 배제되었을 뿐 이전과 거의 마찬가지로 진행되고 있었다. 그러나 마담 뒤바리 시대가 발자크의 시대에 의해 대체되었다고 하는 것이 프랑스혁명의 결과였다.
▶해설=19세기 역사에 있어서 프랑스혁명은 정치와 이데올로기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혁명이었다. 프랑스혁명은 자유주의적이며 민주적인 정치용어와 논점을 제공하였으며 법전,과학적·기술적 모델,미터법을 제공하였다. 몇몇 역사학자들은 당시 단기적이고 자주 일어난 봉기들의 혁명적 성향을 들어 당시를 '민중혁명의 시대'라고 표현하며 프랑스혁명 또한 그 중 하나일 뿐이라고 분석하였다. 하지만 프랑스혁명은 당시의 여타 봉기와는 현격한 차이를 보인다. 여러 가지 면에서 차이점이 지적될 수 있지만 프랑스혁명의 독자성을 드러내주는 것은 혁명의 '급진성'과 '보편성'이었다. 프랑스혁명은 외적으로 나타나는 과격성을 고려하지 않더라도 혁명 과정에서 만들어진 제도,타파된 인습과 구습의 정도,과거와의 단절성은 혁명의 급진성을 선명하게 드러내 준다. 또 프랑스혁명에 내재된 이념과 제도들은 혁명이 종결된 후 유럽 전역에 영향을 미쳐 세계사의 지평을 바꿔 놓았다는 점에서 '보편성'을 띤다. 원문의 마지막 부분에서 '마담 뒤바리'는 전 근대성을 표상하고 '발자크'는 합리적인 원칙과 제도의 정착을 상징한다고 할 수 있다.
◆원문읽기
한 나라의 혁명이 전 유럽의 현상이 될 수 있다는 것,즉 그 혁명의 원리가 국경을 넘어 퍼져 나가고,그리고 더욱 고약하게도 혁명의 십자군이 한 대륙의 정치체제를 풍비박산시킬 수 있다는 것을 이제 알게 된 것이었다. 사회혁명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것,즉 국가는 왕국과는 따로 존재하는 그 무엇이고,백성들은 그 지배자와는 독립하여 존재하는 그 무엇이며,가난한 사람도 그 지배계급과는 독립하여 존재하는 그 무엇이라는 것을 이제 알게 된 것이다.
▶해설=사실 '프랑스혁명'이라는 어휘에서 '프랑스'는 혁명의 진원지로서 의미가 있는 것이지,혁명의 내용과 전부가 프랑스에만 한정되는 것은 아니다. 즉,프랑스혁명은 단일 국가 내부에서 일어난 국지적인 현상이 아니라 적어도 유럽적인 현상,더 확장시킨다면 전 세계적인 현상으로 파악할 수 있는 것이다. 200여년 전의 운송수단과 통신상태가 지금과 비교하기 어려울 만큼 낙후되어 있었던 점을 감안할 때 혁명의 영향과 전파는 실로 필연성을 띤 것이었다. 역사가 진보한다고 가정할 때 당시 전 유럽 곳곳에서 산발적으로 진행되고 있었던 봉기들은 단순히 우연적이고 개별적인 현상들이 아니었다. 봉건적 억압에서 새로운 시대로 나아가기 위한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발견될 수밖에 없는 작은 몸부림들이었다. 프랑스혁명을 통해서 '주체성'이 인식된 것 역시 주목해야 하는 점이다. 나 아닌 다른 대상과의 차이를 자각하고 자신의 사회적 위치를 인식함으로써 혁명은 가능해졌고,또한 혁명에 의해서 그러한 점은 더욱 고양되었다. 그렇게 하여 역사상 최초로 집단의식(시대정신)은 형성될 수 있었다.
◆원문읽기
이중 혁명의 시대가 가져온 경제적 귀결 가운데서도 선진국과 저개발국을 갈라놓은 이러한 분열이 가장 뿌리 깊고 영속적이었다는 것은 그 후의 사실들에 의해 입증되었다. 개략적으로 말해서 1848년까지는 몇 나라가 선두그룹에 속하는가가 분명해졌다. (이베리아 반도를 제외한) 서부 유럽과 독일,북부 이탈리아,중앙 유럽의 일부와 스칸디나비아 및 미국,그리고 아마도 영어를 사용하는 이민자들이 사는 식민지가 곧 이 그룹에 속했다. 또 한 가지 명백했던 것은 세계의 나머지 지역은 몇몇 작은 땅덩어리를 제외하고는 모두 뒤져 있거나,아니면 서양의 경제적 종속물로 전락했다는 사실이다. 러시아 사람들이 1930년대에 후진국과 선진국 간의 이 같은 격차를 뛰어넘는 방도를 개발해내기까지 이러한 격차는 움직일 수도,뛰어넘을 수도 없는 것으로 남아 있었고,실상 그것은 세계의 소수 주민과 다수 주민 사이의 격차로서 오히려 날이 갈수록 크게 벌어지기만 할 것이었다. 20세기의 역사를 이 사실만큼 요지부동한 힘으로 결정한 것도 없다.
▶해설=홉스봄은 산업혁명과 프랑스혁명이 각각 분리된 것이 아니라 변증법적 과정의 산물로 파악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프랑스혁명과 산업혁명은 '이중 혁명'으로 명명될 수 있다. 프랑스혁명에 의한 부르주아 계급의 부상과 자유주의적인 이데올로기의 전파,산업혁명에 의한 생산력의 향상은 결과적으로 선진국과 후진국(저개발국)의 차이를 영속화시켰다는 것이다. 혁명의 혜택을 받지 못한 극동,이슬람,아프리카는 유럽의 선진국가들에 의해 서서히 노예로 전락하게 되었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국제상의 구조적 문제점이 고착화된다는 데 있었다. 선진 자본주의가 정착되어 가는 유럽과는 달리 유럽 외 지역은 유럽에 의해 타의적이고 간접적으로 자본주의의 세례를 받았기에 발전이 더딜 수밖에 없었다. 결국 혁명에 의해서 봉건적 체제는 타파되었지만 새로운 신질서에 의해서 세계는 재편되어 가고 있었다.
김종현 S·논술 선임연구원 keatonn@nonsul.com
에릭 홉스봄(1917~ )은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에서 오스트리아계 어미니와 유태계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났다. 런던의 성 메리르본 고전문법학교를 다녔고 케임브리지의 킹스칼리지에 들어가 역사학을 전공했다. 홉스봄은 오늘날 활동하고 있는 최고의 마르크스주의 역사가로 손꼽히고 있다. 동시대 역사가로서 로드니 힐튼과 크리스토퍼 힐,그리고 에드워드 톰슨이 영국사 연구에 치중한 반면,홉스봄의 저작들은 영국, 유럽에서 라틴아메리카에 이르기까지 광범한 영역에 걸쳐 있으며,그 시기도 17세기부터 20세기 현대사까지 통괄하고 있다. 특히 '아래로부터 위로의 역사'적 시각에서 전체사로서의 역사 구도를 일관되게 견지해 당대의 정치와 경제,사회와 문화,예술 및 문화비평을 포괄하는 박식한 역사가의 면모를 유감없이 드러내고 있다. 역사 3부작 혁명의 시대(1962),자본의 시대(1975),제국의 시대(1987)는 그의 대표작으로,프랑스 대혁명과 산업혁명으로 인류사회가 어떻게 변화·발전해왔는가를,근대세계가 어떻게 형성되었는가를 방대한 자료를 통해 완전히 새롭게 해석해내고 있다.
◆원문읽기
유럽의 교역 및 자본주의적 기업에 의한 급속하고도 광범위한 팽창은 이미 이러한 문명과 세력들의 사회질서를 잠식하고 있었다. 이는 아프리카의 경우 전례 없이 활발하게 이루어졌던 끔찍한 노예무역을 통해서,인도양 주변에서는 경쟁적인 식민화 세력의 침투를 통해서,중동·극동에서는 교역과 군사적 충돌을 통해서 진행되었다. 이미 유럽에 의한 직접 정복은 16세기 에스파니아 및 포르투갈인들과 17세기 북아메리카 백인 정착민들의 선구적 식민지 개척에 의해,오래 전부터 이전 점유지역을 벗어나 상당히 뻗어나가기 시작했다. 영국인들에 의해 커다란 변화가 이루어졌는데,그들은 사실상 무굴 왕조를 쓰러뜨리고 인도의 일부 지역(특히 벵골)에 대한 직접적인 영토 지배를 이미 확립시켜 놓고 있었다. 우리가 다루는 시대가 되면 영국인들은 인도 전체의 지배자 및 관리자가 되는데,이는 이러한 목표를 향한 제 1보였다.
▶해설=프랑스혁명 이후 유럽에 의한 세계의 지배체제가 본격화된다는 점에서 프랑스혁명 직전의 세계―특히 유럽과 유럽 외 지역과의 관계를 중심으로 홉스봄은 살펴보고 있다. 18세기 후반까지도 유럽 이외 지역의 거대한 문명들은 대체로 동등한 입장에서 유럽의 상업,해상무역,군사세력과 맞서고 있었다. 오히려 문화 면에서는 동양의 문물을 유럽인들은 적극적으로 수용하였다. 하지만 절대왕정의 후원에 힘입은 자본주의적 교역상과 기업들은 점점 극동,인도,아프리카 지역의 사회를 잠식해가고 있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유럽 세력들이 단순히 총칼을 통해서 식민지화를 이룩하고 내키는 대로 착취해가지는 않았다는 점이다. 그들은 자본주의적 양식을 식민지와 기타 문명에 내재화시킴으로써 착취와 파괴를 자연스럽게 진행해 나갈 수 있었다. 즉,승인된 폭력과 만들어진 제도에 의해서 그것은 정당화되어 갔다.
◆원문읽기
프랑스혁명은 그 이전이나 이후의 모든 혁명 중에서 유일한 대중사회 혁명이었으며,이에 비견될 만한 어떠한 격변보다도 훨씬 더 급진적이었다. 미국의 혁명가들과 정치적인 공감 때문에 프랑스로 이주했던 영국의 자코뱅파들이 프랑스에서는 자신들이 온건주의자라고 느꼈던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다. 토머스 폐인은 영국과 미국에서는 극단주의자였지만,파리에서는 지롱드 당원 중에서도 가장 온건한 사람에 속했다. 대체로 말해서,아메리카 대륙에서는 혁명의 결과 영국,에스파니아,포르투갈의 정치적 지배만이 배제되었을 뿐 이전과 거의 마찬가지로 진행되고 있었다. 그러나 마담 뒤바리 시대가 발자크의 시대에 의해 대체되었다고 하는 것이 프랑스혁명의 결과였다.
▶해설=19세기 역사에 있어서 프랑스혁명은 정치와 이데올로기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혁명이었다. 프랑스혁명은 자유주의적이며 민주적인 정치용어와 논점을 제공하였으며 법전,과학적·기술적 모델,미터법을 제공하였다. 몇몇 역사학자들은 당시 단기적이고 자주 일어난 봉기들의 혁명적 성향을 들어 당시를 '민중혁명의 시대'라고 표현하며 프랑스혁명 또한 그 중 하나일 뿐이라고 분석하였다. 하지만 프랑스혁명은 당시의 여타 봉기와는 현격한 차이를 보인다. 여러 가지 면에서 차이점이 지적될 수 있지만 프랑스혁명의 독자성을 드러내주는 것은 혁명의 '급진성'과 '보편성'이었다. 프랑스혁명은 외적으로 나타나는 과격성을 고려하지 않더라도 혁명 과정에서 만들어진 제도,타파된 인습과 구습의 정도,과거와의 단절성은 혁명의 급진성을 선명하게 드러내 준다. 또 프랑스혁명에 내재된 이념과 제도들은 혁명이 종결된 후 유럽 전역에 영향을 미쳐 세계사의 지평을 바꿔 놓았다는 점에서 '보편성'을 띤다. 원문의 마지막 부분에서 '마담 뒤바리'는 전 근대성을 표상하고 '발자크'는 합리적인 원칙과 제도의 정착을 상징한다고 할 수 있다.
◆원문읽기
한 나라의 혁명이 전 유럽의 현상이 될 수 있다는 것,즉 그 혁명의 원리가 국경을 넘어 퍼져 나가고,그리고 더욱 고약하게도 혁명의 십자군이 한 대륙의 정치체제를 풍비박산시킬 수 있다는 것을 이제 알게 된 것이었다. 사회혁명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것,즉 국가는 왕국과는 따로 존재하는 그 무엇이고,백성들은 그 지배자와는 독립하여 존재하는 그 무엇이며,가난한 사람도 그 지배계급과는 독립하여 존재하는 그 무엇이라는 것을 이제 알게 된 것이다.
▶해설=사실 '프랑스혁명'이라는 어휘에서 '프랑스'는 혁명의 진원지로서 의미가 있는 것이지,혁명의 내용과 전부가 프랑스에만 한정되는 것은 아니다. 즉,프랑스혁명은 단일 국가 내부에서 일어난 국지적인 현상이 아니라 적어도 유럽적인 현상,더 확장시킨다면 전 세계적인 현상으로 파악할 수 있는 것이다. 200여년 전의 운송수단과 통신상태가 지금과 비교하기 어려울 만큼 낙후되어 있었던 점을 감안할 때 혁명의 영향과 전파는 실로 필연성을 띤 것이었다. 역사가 진보한다고 가정할 때 당시 전 유럽 곳곳에서 산발적으로 진행되고 있었던 봉기들은 단순히 우연적이고 개별적인 현상들이 아니었다. 봉건적 억압에서 새로운 시대로 나아가기 위한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발견될 수밖에 없는 작은 몸부림들이었다. 프랑스혁명을 통해서 '주체성'이 인식된 것 역시 주목해야 하는 점이다. 나 아닌 다른 대상과의 차이를 자각하고 자신의 사회적 위치를 인식함으로써 혁명은 가능해졌고,또한 혁명에 의해서 그러한 점은 더욱 고양되었다. 그렇게 하여 역사상 최초로 집단의식(시대정신)은 형성될 수 있었다.
◆원문읽기
이중 혁명의 시대가 가져온 경제적 귀결 가운데서도 선진국과 저개발국을 갈라놓은 이러한 분열이 가장 뿌리 깊고 영속적이었다는 것은 그 후의 사실들에 의해 입증되었다. 개략적으로 말해서 1848년까지는 몇 나라가 선두그룹에 속하는가가 분명해졌다. (이베리아 반도를 제외한) 서부 유럽과 독일,북부 이탈리아,중앙 유럽의 일부와 스칸디나비아 및 미국,그리고 아마도 영어를 사용하는 이민자들이 사는 식민지가 곧 이 그룹에 속했다. 또 한 가지 명백했던 것은 세계의 나머지 지역은 몇몇 작은 땅덩어리를 제외하고는 모두 뒤져 있거나,아니면 서양의 경제적 종속물로 전락했다는 사실이다. 러시아 사람들이 1930년대에 후진국과 선진국 간의 이 같은 격차를 뛰어넘는 방도를 개발해내기까지 이러한 격차는 움직일 수도,뛰어넘을 수도 없는 것으로 남아 있었고,실상 그것은 세계의 소수 주민과 다수 주민 사이의 격차로서 오히려 날이 갈수록 크게 벌어지기만 할 것이었다. 20세기의 역사를 이 사실만큼 요지부동한 힘으로 결정한 것도 없다.
▶해설=홉스봄은 산업혁명과 프랑스혁명이 각각 분리된 것이 아니라 변증법적 과정의 산물로 파악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프랑스혁명과 산업혁명은 '이중 혁명'으로 명명될 수 있다. 프랑스혁명에 의한 부르주아 계급의 부상과 자유주의적인 이데올로기의 전파,산업혁명에 의한 생산력의 향상은 결과적으로 선진국과 후진국(저개발국)의 차이를 영속화시켰다는 것이다. 혁명의 혜택을 받지 못한 극동,이슬람,아프리카는 유럽의 선진국가들에 의해 서서히 노예로 전락하게 되었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국제상의 구조적 문제점이 고착화된다는 데 있었다. 선진 자본주의가 정착되어 가는 유럽과는 달리 유럽 외 지역은 유럽에 의해 타의적이고 간접적으로 자본주의의 세례를 받았기에 발전이 더딜 수밖에 없었다. 결국 혁명에 의해서 봉건적 체제는 타파되었지만 새로운 신질서에 의해서 세계는 재편되어 가고 있었다.
김종현 S·논술 선임연구원 keatonn@nonsu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