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디오를 켜다

[오태민의 마중물 논술] (16) 이제 대동(大同)이라는 라디오는 끄자
수도권 교외에서 매일 서울로 출퇴근 하는 직장인들에게 버스를 타는 것은 하나의 고역이다. 사람에 치이고 교통체증에 물리는 러시아워를 피하려면 해뜨기 전에 버스에 올라야 한다. 그런데 새벽 버스에는 또 다른 어려움이 기다리고 있다. 부족한 수면을 버스 안에서라도 채우겠다고 기대해보지만 이 기대는 자주 배반당하고 만다. 버스기사가 크게 틀어 논 활기찬 라디오 소리 때문이다. 버스기사들의 방송 취향은 독특하기로 정평이 나 있다. 나라가 곧 뒤집힐 것 같은 목소리를 소유한 아나운서의 시사 프로그램이나 전쟁터로 군인을 실어 나르는 데 딱 어울릴 만한 행진풍의 음악으로 승객들의 옅은 잠을 흔들어 놓고야 만다. 이 정도 세상 돌아가는 일은 알아야 하고 지금은 편히 의자에 기대 잠을 잘 때가 아니라고 윽박지르는 것 같다.

부족한 잠을 채우려는 일념에 적잖이 방해되는 것이 틀림없을 것 같은데 아무도 이의를 달지 않고 묵묵히 감내한다. 누구 하나쯤 '어이,기사양반 거 라디오 좀 끕시다'라고 말할 만도 한데 그런 사람을 보았다는 사람조차 만나기 어렵다. 혹자는 새벽 버스에 노인이나 아주머니들이 타지 않기 때문이란다. 지하철 같은 공공장소도 자신의 안마당 같은 주인의식으로 큰소리로 호통치거나 빈자리를 위해 전속력으로 내달릴 수 있는 특권을 부여받은 그분들의 예측하기 어려운 '간섭'을 간절히 초청하고픈 때와 장소가 있다면 바로 새벽버스다.

◆방송과 대동(大同)의 추억

아버지에게 김일 선수와 차범근 선수의 공통점이 무엇인지를 여쭤보라. 운동선수라는 점을 제외하고 두 선수가 아버지 세대에게 공통적으로 불러일으키는 추억이 있다. 두 선수 모두 1960,70년대 온 동네 사람을 TV 앞에 끌어모았던 전력이 있다. 두 선수의 매력 때문이기도 하지만 당시에는 무엇보다 TV 자체가 드물었다. TV는 도시에서도 흔한 물건이 아니었다. 농촌에서는 한 마을 걸러 한 대씩 있었다. 김일 선수의 박치기나 차범근 선수의 문전돌파는 TV가 있는 집 마당에서 동네 아이들과 함께 그 몸짓을 되풀이해가며 감상하곤 했다.

방송이 한때 대동(大同)의 축제를 마련하던 계기였다면 버스기사들의 행동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다. 기사들은 혼자 듣기 위해 라디오 볼륨을 높인 것이 아니다. 처음에는 정보에 메마른 도시민들을 위한 서비스 차원에서 시작되었을 것이다. 멍하니 앉았거나 피곤하게 서있는 승객들에게 잠시나마 흥겨움을 선사하기 위한 배려였을 것이 틀림없다. 프로그램 취향은 독특하지만 그런 방송이 버스를 이용하는 서민들의 평균적인 선호에 가장 가까웠으리라.

◆침묵이 상책이 된 이유

방송이 담당했던 대동의 역할은 어디까지나 과거의 일일 뿐이다. 오늘날 승객을 배려한답시고 라디오를 켜는 순간 사회적인 행복을 감소시키게 되어 있다. 어떻게 라디오 하나로 사회적인 행복을 감소시킬 수 있을까? 승객마다 방송의 효용이 다르기 때문이다. 우연히도 버스기사와 라디오 청취 취향이 비슷한 승객이 있다고 하자. 이 사람은 자신이 원하는 방송을 원하는 장소와 시간에 공짜로 들을 수 있으니 행복이 증가할 것이다. 취향이 아주 똑같지는 않더라도 방송이 그다지 싫지 않은 승객의 만족감도 다소 증가한다. 물론 싫거나 조용히 잠을 청하려는 승객들은 오히려 행복이 감소한다. 라디오를 좋아하는 승객과 싫어하는 승객의 분포는 알 수 없다. 따라서 라디오 방송이 총 행복을 감소시킬지 증가시킬지도 알 수 없다.

20년 전이라면 많은 승객이 좋아할 것이라고 버스기사가 독자적으로 판단한 방송에 대해 항의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누군가는 정말 그 방송 때문에 큰 만족을 얻고 있을지 모르기 때문이다. 항의하고자 하는 승객이 펼 수 있는 논리라 봐야 자신이 원하지 않는다는 정도다. 이런 이기적인 행동이 깍쟁이라고 비난받던 대동사회였다. 싫으나 좋으나 입 다물고 있는 게 상책이라는 것이 몸에 밴 학습이다.

◆이제,라디오를 꺼주세요

상황은 바뀌었다. 날로 발전하고 있는 휴대용 방송 수신장비 때문이다. 버스기사의 독단적인 방송이 승객들의 총효용을 증가시키려면 그 방송을 꼭 들어야 하는 승객이 많아야 한다. 그런데 그 방송이 꼭 필요한 승객은 워크맨이나 MP3혹은 PMP를 휴대하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방송을 청취하는 이익이 클수록 버스기사의 취향에 운을 맡길 수 없는 노릇이다. 이런 승객일수록 개인용 방송장비를 휴대하기 위해 지불하는 비용보다 이익이 크다.

반면,맨 몸으로 버스에 오른 승객들은 방송으로 얻을 행복이 작거나 방송 때문에 불행해질 확률이 큰 승객들이다. 결론적으로 버스기사는 방송에 큰 가치를 두지 않거나 심지어는 원하지 않는 승객들만을 위해 방송서비스를 하고 있는 셈이다.

개인 휴대용 방송장비가 흔해지고 저렴해질수록 버스기사가 방송을 통해 끼칠 손실은 더욱 커진다. 장비의 값이 싸질수록 공짜 청취의 이익은 작아지지만 방송 때문에 당하는 고통에는 변함이 없기 때문이다.

◆몸으로 때우는 세금

세금은 현금으로 지불한다. 그러나 전통사회에서는 물건으로 내기도 하고 또 몸으로 때우는 세금도 있었다. 부역(負役)은 국가 대소사에 동원돼 노동으로 지불하는 세금이다. 그러나 부역은 지나치게 불공평해서 악명이 높았다. 하는 일이 비슷했던 전통사회에서조차 사람들마다 시간의 기회비용은 저마다 달랐다. 어떤 사람에게 하루의 가치는 10에 불과하지만 다른 어떤 사람에게는 100일 수도 있다.

겉으로 보기에는 똑같은 하루라도 자기가 없으면 온 가족이 하루를 굶어야 하는 사람에게 하루 노동이 갖는 의미는 남다르다. 또 시간만 동일할 뿐 하는 노역의 내용이 동일할 수도 없었다. 같은 공사판이라 해도 뼈 빠지게 힘든 일이 있는 반면 설렁설렁한 일도 있었다. 누구를 어디에 배치하느냐는 전적으로 관리의 판단에 달렸다. 평소 관리와 잘 지내거나 힘 있는 사람들과 그렇지 않는 사람들에게 돌아가는 일거리는 다를 수밖에 없었다. 평등해 보이는 부역은 불공평했고,또 비리의 온상이었다. 부역은 차츰 현물이나 현금납으로 변했으며 이 변화를 근대화를 측정하는 중요한 척도로 삼기도 한다.

◆박찬호,유승준 그리고 싸이

박찬호 선수가 미국 메이저리그에서 승승장구할 무렵 그의 군 입대는 국가적인 문제가 되었다. 절정기를 군에서 보냈다가는 2류로 밀려날 것이라는 여론이 원칙론을 압도했다. 박찬호 한 명을 위해서만은 아니었지만,그가 계기가 되어 우수한 선수들의 병역 면제 길이 열렸다. 국제대회 입상은 병역에 버금가는 국가에 대한 봉사로 인정받을 수 있었다.

얼마 뒤 가수 유승준은 팬들과의 약속을 저버리고 미국 시민권을 획득했다. 여론은 병역기피가 시민권 획득의 직접적인 원인이라고 단정했다. 유승준은 입국도 거절당했고 아직까지도 용서받지 못하고 있다. 최근 싸이의 재입대가 화제다. 공익으로 근무하는 동안 콘서트를 다니며 사실상 연예 활동을 했다고 한다. 그의 복무를 감독해야 할 관청이나 담당자에게 책임을 물어야 할 것 같은데 병무청은 재입대를 추진하고 있으며 다수 여론은 이에 동조하고 있다.

'공인의 의무'라든가 '신성한 군복무' 같은 말은 이런 일만 터지면 자동으로 나오는 개념들이다. 이런 익숙한 개념들을 잠시 뒤로 물리고 다음 학생 글처럼 기회비용이라는 관점에서 이 문제에 접근해 보자.

▶학생글: 안가은(명지외고 2학년)

(…) 군 면제를 희망하는 가수들에게 비난을 쏟는 이들은 박찬호 선수는 국위선양을 하지만,가수들은 국위선양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며 군 면제에 대한 권리가 없다고 말한다. 하지만,이는 따지고 보면 잘못된 말이다. 가수들도 얼마든지 군에 들어가 있을 시간 동안에 문화 활동을 통한 국위선양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사회적 문제의 배후에는 '군대에 가는 것은 커다란 개인적 손실'이라는 사람들의 인식이 자리잡고 있다. 이는 실제로도 맞는 말이다. 회피 대상이 된 군입대. 그것이 바로 이러한 대응을 만들어 낸 문제인 것이다. 타인에게 손해를 주지 않는 선까지의 이익 추구가 보장되는 사회에서 군 입대란 오히려 국가가 개인의 이익추구를 막는 것으로밖에 보이질 않는다. 마땅한 보상도 없이 얼마든지 다양한 가능성의 가치를 창출해 낼 수 있는 대한민국 청년들의 시간을 일률적으로 소비했기 때문이다. 이는 마치 시장에 내놓는다면 수십 억원을 호가할 수도 있는 도자기가 시골집 개밥그릇으로 쓰이는 것과도 같다. 엄연한 '침해'가 되는 이러한 군 입대의 의무화는 '애국'이라는 가면을 쓰고서 앞서 언급한 여러 사회적 이슈의 발생 말고도 사회의 총체적 이익을 갉아먹는 골칫거리 역할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