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없는 방랑이 만들어낸 조선의 풍속도

[고전속 제시문 100선] (51) 이중환 '택리지(擇里志)'
이중환의 '택리지'(擇里志:살만한 터를 선택하기 위한 책)를 읽다보면 떠오르는 두 사람이 있다. 한 사람은 섬진강의 시인 김용택이고 다른 한 사람은 보들레르이다. 이중환 김용택 보들레르 이 세 사람의 공통점은 우리의 답답하고 팍팍한 삶을 자신의 방식대로 인상 깊게 풀어간 사람들이라는 점이다. 팍팍한 삶 앞에서 섬진강 시인 김용택은 '저무는 강변으로 가 이 세상을 실어오고 실어가는 강물에 자신의 마음 한 끝을 적셔 풀어 보내며' 삶을 위로했다. 그리고 하늘에서 '내리는 광막한 비마저 자신을 꽁꽁 가두는 감옥의 쇠격자'로 생각했던 보들레르는 '음울'이라는 시에 정신적 우울을 담아 자신을 잠시 동안 해방시켰다. 이중환은 명문가의 자제로 태어났다. 젊은 나이에 과거에 오르고 문학과 재략(才略)으로 세상을 놀라게 했지만 불행히 먼 지역으로 귀양 가게 되고 택리지를 저술하기까지는 한(恨) 많은 삶을 살았다.거처할 집도 없이 떠돌아 다니는 신세가 되어 매일매일 어떻게 지낼 수 있었을까? 산과 물, 토지, 명승지, 경치 좋은 곳, 피난처 등등 30여년간 방랑길에서 온갖 것과 만나 꽉 닫힌 마음을 트며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얻지 않았을까? 그가 속했던 삶의 벽장 안에서 숨죽이며 소리 없이 사라져가는 슬픔을 흘려보내고 끝없는 방랑이 만들어낸 이야기 택리지를 읽어보자.

1. 사민총론(四民總論)

◆ 원문 읽기

옛날에는 사대부가 따로 없고 모두 민(民)이었다. 그런데 민은 네 가지로 분류된다. 사(士)로서 어질고 덕(德)이 있으면 임금이 벼슬을 주었고, 벼슬을 못한 자는 농·공·상이 되었다. 옛날 순임금은 처음 역산(歷山)에서 밭 갈고, 하빈(河濱)에서 질그릇을 구웠으며, 뇌택(雷澤)에서 고기잡이를 하였다. 밭갈이한 것은 농부의 일이며, 질그릇 구운 것은 공인(工人)의 일이며, 고기잡이한 것은 상인(商人)의 일이다. 그러므로 임금 밑에서 벼슬하지 않으면 농·공·상이 되는 것은 당연하다.(중략)

후세에 와서 인품이 옛날보다 못하여 기품에 어짐과 어리석음이 있고, 술업(術業)에도 능통하고 막힘이 있다. 그리하여 사대부는 농·공·상의 일을 할 수 있어도 농·공·상을 본업으로 하던 자는 사대부의 일을 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부득이 사대부를 중하게 여기게 되었는데, 이것이 후세의 자연스러운 추세이다.(중략)

사대부는 살만한 곳을 만든다. 그러나 시세(時勢)에 이로움과 불리함이 있고, 지역에 좋고 나쁨이 있으며, 인사(人事)에도 벼슬길에 나아감과 물러나는 시기의 다름이 있는 것이다

▶해설=실학의 대학자 이익의 재종손이었던 이중환은 임금들의 표본이었던 순임금 역시 밭 갈고 질그릇 굽고 고기잡이하였으니 사대부란 따로 없으며, 모두 한 백성으로 되어 있을 뿐이라고 말한다. 다만 세월이 지남에 따라 유학자들이 꿈꾸고 기억하는 세상은 점점 사라지고 한 백성이었던 사람들 사이에 차이가 생기게 되어 네 종류의 백성으로 나뉘게 된다. 따라서 임금이 벼슬을 주어 살아가는 사대부가 생겨나는 것도 세월의 자연스러운 추세이다. 천하에 좋은 이름이 사대부이니,사대부는 성인의 법을 준수하여 덕을 닦기 위해 자신이 거처할 곳을 만들어야 한다.

2. 팔도총론(八道總論)

◆ 원문 읽기

강원도(江原道)

강원도는 함경도와 경상도 사이에 있다.서북쪽으로 황해도 곡산·토산 등의 고을과 이웃하였고,서남쪽으로는 경기도·충청도와 서로 맞닿아 있다. 철령에서 남쪽으로 태백산까지는 산등성이 동쪽에는 아홉 고을이 있다. 북쪽으로 함경도 안변과 경계가 닿은 흡곡과 통천, 고성, 간성, 양양과 옛 예맥의 도읍이었던 강릉과 삼척, 울진, 그리고 남쪽으로 경상도 영해부와 경계가 맞닿은 평해가 그곳이다.(중략)

동해는 조수가 없어 물이 탁하지 않아서 벽해(碧海:깊고 푸른 바다)라 부른다. 항구와 섬 같은 앞을 가리는 것이 없어 큰 못가에 임한 듯 넓고 아득한 기상이 자못 굉장하다. 또한 이 지역에는 이름난 호수와 기이한 바위가 많아, 높은 데 오르면 푸른 바다가 넓고 멀리 아득하게 보이고 골짜기에 들어가면 물과 돌이 아늑하여, 경치가 나라 안에서 참으로 제일이다.

▶해설=이중환의 택리지에는 한반도 전역에 걸친 지형, 풍토, 풍속, 교통 등이 자세하게 다루어져 있다. 남한 지역 지리에 익숙한 우리들에게 함경도며 평안도, 황해도 이야기는 국토가 본래 여덟 개의 도로 되어 있음을 다시 한 번 상기시켜준다. 그 중 강원도 편에서 마음이 머무는 이유는 다른 곳에 비해 많이 다녀본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홍상수의 영화 '강원도의 힘'을 보고나서 왜 영화 제목이 '강원도의 힘'인지 오랫동안 의문이 가시지 않았던 적이 있었다. 강원도가 나라 안에서 경치가 제일 좋은 것이 가능한 이유들 중 하나가 아닐까?

3. 복거총론(卜居總論)

◆ 원문 읽기

무릇 살터를 잡는 데는 첫째 지리가 좋아야 하고, 다음 생리가 좋아야 하며, 다음으로 인심이 좋아야 하고, 또 다음은 아름다운 산과 물이 있어야 한다. 이 네 가지에서 하나라도 모자라면 살기 좋은 땅이 아니다.

그런데 지리는 비록 좋아도 생리가 모자라면 오래 살 수가 없고, 생리는 좋더라도 지리가 나쁘면 이 또한 오래 살 곳이 못 된다. 지리와 생리가 함께 좋으나 인심이 나쁘면 반드시 후회할 일이 있게 되고, 가까운 곳에 소풍할 만한 산수가 없으면 정서를 화창하게 하지 못한다.(중략)

지리(地理)

먼저 수구를 보고, 그 다음으로 들의 형세를 본다. 그리고 다시 산의 모양을 보고, 다음에는 흙의 빛깔을, 다음은 조산(朝山)과 조수(朝水)를 본다.

무릇 수구가 엉성하고 널따랗기만 한 곳에는 비록 좋은 밭 만 이랑과 넓은 집 천 칸이 있다 하더라도 다음 세대까지 내려가지 못하고 저절로 흩어져 없어진다. 그러므로 집터를 잡으려면 반드시 수구가 꼭 닫힌 듯하고, 그 안에 들이 펼쳐진 곳을 눈여겨본 후 구해야 한다.

생리(生利)

사람이 세상에 태어나서 바람과 이슬을 음식 대신으로 삼지 못하고, 깃과 털로 몸을 가리지 못한다. 그러므로 사람은 자연히 입고 먹는 일에 종사하지 않을 수 없다. 위로는 조상과 부모를 봉양하고, 아래로는 처자와 노비를 길러야 하니, 재리(財利)를 경영하여 넓히지 않을 수 없다.

인심(人心)

우리나라 팔도 중에 평안도는 인심이 순후가기가 첫째이고, 다음은 경상도로 풍속이 진실하다. 함경도는 지역이 오랑캐 땅과 잇닿았으므로 백성의 성질이 모두 굳세고 사나우며, 황해도는 산수가 험한 까닭에 백성이 사납고 모질다. 강원도는 산골 백성이어서 많이 어리석고, 전라도는 오로지 간사함을 숭상하여 나쁜 데 쉽게 움직인다. 경기도는 도성 밖 들판 고을 백성들의 재물이 보잘 것 없고, 충청도는 오로지 세도와 재리만 좇는데, 이것이 팔도 인심의 대략이다.

산수(山水)

전라도와 평안도는 내가 가보지 못하였지만 강원, 황해, 경기, 충청, 경상도는 내가 많이 가본 곳이다.(중략) 산수는 정신을 즐겁게 하고 감정을 화창하게 하는 것이다. 살고 있는 곳에 산수가 없으면 사람이 촌스러워진다. 그러나 산수가 좋은 곳은 생리가 박힌 곳이 많다. 사람이 자라처럼 모래 속에 살지 못하고, 지렁이처럼 흙을 먹지 못하는데, 한갓 산수만 취해서 삶을 영위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기름진 땅과 넓은 들에 지세가 아름다운 곳을 가려 집을 짓고 사는 것이 좋다.

▶해설=이중환이 찾아 헤맨, 사람이 살만한 곳은 지리, 생리, 인심, 산수가 두루 갖춘 곳이다. 인문적 주거조건에 해당하는 생리와 인심을 이중환은 더욱 강조하고, 사람들이 살기에 가장 적합한 곳은 풍속이 아름답고 인정이 넘치는 곳이어야 한다고 말한다. 한 가지 매우 안타깝게 생각하는 것은 전라도와 평안도 지역을 가보지 않은 체 두 지역의 인심을 논한 대목이다. 그 마을과 지역의 인심은 살아봐야 아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전해오는 이야기를 마치 사실인 것처럼 단정적으로 표현한 점은 비판받아야 한다.

이중환의 택리지를 읽고 남는 질문이 있다. '우리는 지금 살만한 곳에 살고 있는가? 우리는 이웃들과 훈훈한 동네 인심을 만들며 살만한 곳으로 만들어 가고 있는가? 그리고 어디에 내 삶의 짐을 풀고 살 것인가?

김옥란 S·논술 선임연구원 ybus0303@nonsu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