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는 도덕으로 통치하는 것 아니다" … 근대정치론의 시작

[고전속 제시문 100선] (50) 마키아벨리 '군주론'
근대 정치학의 토대가 되고 있는 군주론은 권력을 얻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권모술수주의로 인식되어 오랫동안 비난을 받아 왔다. 그러나 마이카벨리가 이 책을 서술할 당시 이탈리아의 역사적 배경을 살펴보면 그의 작품이 정치적 혼란을 극복하려는 시대적 요구에 따라 쓰여졌음을 알 수 있다. 그가 살던 시대는 중국의 춘추전국시대처럼 군소 국가들의 대립, 외세 침략 등으로 혼란스러운 시대였다. 마키아벨리는 현실의 정치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법은 무엇인가를 논하면서 기존의 종교적,도덕적 관점을 철저히 배제했다. 그는 정치적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과 도덕적 이상의 추구는 차원이 다른 것으로 보았다. 덕을 베푸는 것이 도덕적 결과를 가져오는 게 아니라 정치 권력의 효율적 사용이 국가통치에서는 보다 좋은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당시까지 통용되던 이상적 군주에 대한 철학을 통째로 뒤집어 놓은 셈이다.

◆원문읽기-진정한 자비로움이란..

체사레 보르자는 잔인하다는 평판을 얻었지만 그의 가혹한 조치들로 인해 로마냐의 질서가 회복되었으며,로마냐를 통일시켜 평화롭고 충직한 지역으로 만들었다. 군주가 백성들의 단합과 충성을 유지할 수 있다면 잔인하다는 평판을 불러일으키지는 않을까 걱정해서는 안 된다. 혼란을 제멋대로 방치해 살인과 약탈이 넘쳐나도록 만드는 사람들에 비해 단지 몇 명만 처벌함으로써 더욱 더 자비로울 수 있기 때문이다. 무질서를 방치해 두는 사람들은 흔히 사회 전체에 해를 끼치게 되지만 군주의 명령에 따른 강제집행은 오직 특정한 개인에게만 해를 끼치는 것에 불과하다.

▶해설

체사레 보르자는 마키아벨리가 높이 평가한 이탈리아의 군주였다. 대중에겐 잔인하다는 혹평을 받았지만 마키아벨리는 그야말로 이탈리아를 무질서에서 구출할 자질을 가진 인물로 평가했다. 반면 당시 대중으로부터 지지를 얻었던 종교적 지도자인 사보나롤라 신부에 대해 마키아벨리는 지도자로서 부적합하다고 평가했다. 성직자들의 도덕주의는 현실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으며 오히려 혼란을 부추길 뿐이었기 때문이다.

◆원문읽기-인간은 악하고 이기적이다

두려움의 대상이 되는 것이 나은가? 존경의 대상이 되는 것이 나은가?의 질문에 대한 나의 견해는 존경의 대상이 되는 것과 동시에 두려움의 대상이 되는 것이 바람직하지만,이 둘 모두를 함께 성취하기란 힘들기 때문에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면 존경받기보다는 두려움의 대상이 되는 쪽이 낫다는 것이다. 인간은 배은망덕하고 변덕스러우며 사기꾼에다가 위선자이며 위험을 피하려 하고,이익에 혈안이 돼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중략) 인간은 두려움을 불러일으키는 대상보다 존경하는 대상을 해치려 할 때 덜 주저하게 마련이다. 존경이란 은혜에 대한 보답으로 유지되는데,인간은 극도로 이기적이므로 자신에게 유리한 기회가 생길 때마다 이런 은혜에 대한 보답의 마음을 저버리기 쉽다. 하지만 두려움은 처벌에 대한 공포로 유지되기에 훨씬 효과가 있다.

▶해설

인간은 선한가? 악한가?의 질문은 논술에 단골로 등장하는 주제이며,쉽게 답할 수 없는 문제이다. 인간은 전적으로 악하지도 선하지도 않으며,경우에 따라 극도로 선해지기도 하고,악해지기도 한다. 이에 대해 마키아벨리는 하나의 시금석이 되는 질문을 통해 답을 한다. 만일 선과 악의 양자택일 상황이라면 인간은 어느 쪽을 택할까? 마키아벨리는 악을 택한다고 답한다. 인간들은 평소에는 평화롭게 서로를 위하며 살아간다. 하지만 이러한 평화는 서로의 이해관계가 개입되기 전까지만 유지된다. 서로의 이익이 배치되면 손 대신 칼을 내민다. 이기거나 지거나의 양자택일 게임에선 언제나 자신의 이익을 택하게 되는 게 인간이다.

◆원문읽기-이상주의냐 현실주의냐?

나는 내 말을 듣는 이들이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는 내용을 쓰고 싶기에 이론과 추론보다는 실제 현실의 일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많은 사람들이 실제로는 존재한 적이 없는 이상적 국가를 상상해 왔다. 그렇지만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 문제는 '인간이 어떻게 살고 있는가'의 문제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그러므로 현실의 인간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의 문제를 소홀히 하는 군주는 권력을 읽고 말 것이다. 고결하게 행동하고자 하는 군주가 비양심적인 자들에 둘러싸이게 되면 파멸할 수 밖에 없다. 그러므로 권력을 유지하고자 하는 군주라면 필요한 경우 부도덕하게 행동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해설

세상이 어떻게 되어야 하는가?의 문제와 있는 그대로의 세상이 어떠한가?의 문제를 구분했다는 면에서 마키아벨리는 과학적이라고 평가받는다. 중세 이전의 기독교 사상이나,동양의 유교사상에선 세상이 어떠한가?의 문제는 세상이 어떠해야 하는가?의 문제보다 먼저일 수가 없었다. 그들에겐 세상이 어떠한(사악한) 이유는 어떻게(선하게) 해야하는 바를 실현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역사를 살펴보면 이런 도덕주의자들의 태도는 현실을 개선하는 데 도움이 되지 못했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도덕주의자의 대표적인 인물로 춘추시대의 묵자를 들 수 있다. 묵자의 사상을 주제로 한 영화 '묵공'을 보면 전쟁으로 혼란스러운 사회를 인간의 선량함에 대한 믿음으로 구원하려는 묵자의 제자가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그런데 전쟁으로부터 사람들을 구원하고자 했던 묵자의 제자는 오히려 사람들을 더 큰 혼란으로 빠지게 만들게 된다. 픽션의 결말은 권선징악이 대부분이지만, 현실에서는 그렇지 않은 것이다.

◆원문읽기-운명은 인간이 통제할 수 있다.

나는 운명을 무시시한 강에 비유한다. 강이 분노하면 평야는 물에 잠기게 되고,나무와 건물은 무너지고,토양은 다른 곳으로 쓸려가 버린다. 모든 사람이 달아나고 그 습격에 항복하고 만다. 어떤 방법으로든 그것을 멈추게 할 수는 없다. 하지만 강이 범람하기 전 인간은 제방과 둑을 쌓아 미리 예방 조치를 취할 수는 있다. 이렇게 하면 다음번에 다시 강이 불어도 제방이 범람하지 않을 것이고, 설령 범람하더라도 그 기세에 눌리지 않을 것이며 큰 손해를 입지 않을 것이다. 운명도 이와 마찬가지다. 운명은 자신에게 대항해 아무런 힘도 쓰지 못하는 곳에서 위력을 떨치며,자신에게 대항해 아무런 제방이나 둑이 건설돼 있지 않은 곳을 공격하게 마련이다. (중략) 나는 신중한 것보다 과감한 것이 더 낫다고 확실히 믿는다. 운명은 여성이기 때문에 군주가 여성을 지배하고자 한다면,거칠게 다루는 것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여성은 신중한 남자보다 과감한 남자게에게 굴복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운명은 여성이기 때문에 항상 강한 남성에게 끌리게 돼 있다.

▶해설

마키아벨리의 태도가 과학적이라고 했지만, 결국 그가 추구했던 것은 현실을 변화시키는 것이었다. 그는 현실을 개선하기 위해선 무엇보다 현실을 지배하는 것,즉 권력을 손에 얻어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인간은 손 안에 있는 것만을 통제할 수 있을 뿐 손 밖에 있는 것은 통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권력을 얻고 유지하는 방법론이 바로 군주론의 내용들인 것이다.


<군주론>의 의의

<군주론>이 묘사하는 이상적인 군주의 모습은 훌륭한 인품의 지도자상과는 거리가 멀다.오히려 잔인한 폭군의 모습에 더 가까워 보인다.그것은 마키아벨리가 정치와 도덕을 엄격하게 구분했기 때문이다.그래서 <군주론>은 근대 정치학과 리더십론의 출발점이기도 하다.

정치는 이상이 아닌 현실의 문제이다.현실의 인간을 다루는 방법이 결코 도덕적일 수만은 없다.그러므로 도덕적 관점에서 <군주론>을 비판하는 것은 합당치 않다.도덕적이고 따듯한 성품을 가진 군주가 통치에 실패하는 것보다는 명민한 두뇌를 가진 냉정한 군주가 엄정하게 질서를 확실히 잡는 것이 국가를 살찌우고 또 평화와 안정도 실현한다는 것이 바로 군주론의 골자다. <군주론>을 사악하다고 비난했던 성직자들도 이 책을 남몰래 숨겨두고 탐독했을 정도라고 한다.군주론은 플라톤 이래의 '철인 군주론'에 대한 반론이기도 하고 종교적 군주론에 대한 반론이기도 하다.

한편 동양 사회에서는 최근세에 이르기까지도 '도덕 군주'의 모델에서 벗어나지 못했다.이는 정치와 도덕이 혼재된 채,임금을 곧 백성의 아버지로 여기는 관점에 다름 아니다.왕도정치의 이상이라는 것도 알고 보면 플라톤의 철인군주와 다를 것이 없다.이런 관점은 지금도 남아있다고 볼 수도 있다.지도자의 도덕적 자질은 매우 중요한 덕목임이 분명하지만 다른 어떤 조건보다 국정을 다루는 능력이 리더의 조건이라는 점을 마키아벨리는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우리는 어떤 지도자를 원하는가.

이중한 에듀한경 연구원 doodut@edu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