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면회 < 한국외대교수ㆍ정치외교학 >

☞한국경제신문 7월 2일자 A38면

독일 여성 총리 앙겔라 메르켈의 리더십이 국제무대에서 화제다. 2005년 11월 취임 이후 지난 한 해 동안 침체의 늪에 빠져 있던 자국내 경제 회복을 위해 온 힘을 기울였던 메르켈 총리가 이제 유럽과 세계 무대에서 세계인의 이목을 집중시키고 있다. 독일이 올해 유럽연합(EU) 의장국과 G8(서방선진 7개국+러시아) 의장국을 동시에 수임하고 있어 메르켈의 동선(動線)은 더욱 선명하게 드러난다. 옛 동독 출신이자 여성이라는 '약점'과 함께 사회민주당과의 대연정으로 힘겹게 임기를 시작한 메르켈 총리는 우려했던 것과 달리 굵직굵직한 국제적 현안들을 '단호함과 유연성'을 발휘하면서 눈에 띄는 성과를 내고 있다. 19세기 후반 유럽 정치를 주도했던 비스마르크 시대 이후,20세기 초반 연이은 세계대전의 주요 전범국가였던 독일이 국제무대에서 겪어야 했던 '원죄'의 굴레를 메르켈에게서는 읽을 수가 없다.

국제무대에서 보인 메르켈의 리더십은 올 상반기인 지난 6개월간에 집중돼 나타났다. 연초 미국과 유럽 사이의 경제 외교를 이끄는 첨병(尖兵)임을 선언하고 나선 메르켈은 연이어 중동지역 분쟁의 중재자를 자임하면서 국제무대에서 적극적인 행보를 내딛기 시작했다. 곧이어 메르켈 총리는 3월25일 EU 창설 50주년을 맞아 발표한 '베를린선언'을 통해 유럽헌법 부활의 디딤돌을 마련함으로써 EU를 이끄는 지도자로서의 위상을 제고했고,G8 회담에서는 미국 등 초강대국을 상대할 수 있다는 '세계적인' 지도자의 이미지를 깊게 새겨놓았다. G8회담에서 미국을 설득해 기후 변화 대책에 실질적인 합의를 도출한 것이나,미국의 동유럽 미사일방어(MD) 기지 설치를 둘러싼 미국과 러시아의 갈등을 해소하는 중재안을 도출한 중심에는 메르켈이 있었다. 메르켈 총리의 강인한 추진력과 유연한 중재력이 국제무대에서 빛을 발한 대목이다.

메르켈의 진가를 더욱 높인 것은 정치적 통합의 새로운 전기를 마련한 유럽헌법 '미니조약' 통과에 있다. 메르켈의 주도하에 EU의 새 조약이 지난달 22일 정상회의에서 진통 끝에 타결됨으로써 1957년 로마조약 이후 EU의 오랜 숙원 사업인 '정치통합'의 활로가 열리게 됐다. 이제 통합의 심화를 둘러싼 유럽 내부의 가장 큰 걸림돌은 제거됐으니 앞으로 EU의 국제적 영향력은 날로 증대할 것으로 보인다. 합의안 도출 과정에서 집요하게 반대 입장을 견지한 폴란드에 대해 보여준 메르켈의 단호함이 없었다면 합의안 도출은 불가능했을 것이라는 게 일반적인 평가다.

메르켈의 리더십은 일정 부분 메르켈 개인의 자질을 도외시하고 설명할 수 없는 노릇이지만,보다 정확한 해석은 추진력 있는 리더십을 가능케 한 정치·경제적 배경과의 상호관계 속에서 가능하다. 강력한 추진력을 바탕으로 한 메르켈의 리더십 뒤에는 안정된 국내 정치와 호조세를 보이는 거시경제 상황이 버티고 있다. 대연정(大聯政)을 통한 절대적 다수에 기초한 의회정치의 굳건한 뒷받침과 호조세를 보이는 최근의 독일 경제는 국제무대에서 거칠 것 없어 보이는 메르켈의 행보를 가능케 하는 주요 요인이다. 사민당과의 대연정을 통한 '안정된' 합의정치의 구현과 당초 예상보다 높은 2.7%(2006년)의 경제성장률은 메르켈의 행보에 힘을 더해준다. '추진력과 단호함,그리고 유연성'으로 요약되는 메르켈 리더십 비밀의 핵심은 바로 여기에서 기인한다.

지난 10년 가까이 유럽정치를 이끌어온 자크 시라크,게르하르트 슈뢰더,블레어 시대는 종말을 고했다. 이제는 독일의 메르켈과 프랑스의 니콜라 사르코지,그리고 영국의 고든 브라운의 시대다. 브라운과 사르코지가 우선적으로 이라크 전쟁 치유문제와 국내 경제 회복 문제에 집중해야 하는 상황에서 당분간 유럽 정치는 메르켈을 중심으로 진행될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이래저래 메르켈의 인기는 높을 수밖에 없는 정황이다. 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현재 지지율은 54%에 이른다. 사민당 당수의 지지율이 16%에 지나지 않으니,그녀의 인기가 어느 정도인지 실감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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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

정년연장ㆍ연금개혁으로 경제에 활력 불어 넣어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가 총리에 오른 지 벌써 1년반이나 흘렀다. 연정 출발 당시부터 많은 우려를 낳았던 메르켈이었지만 그는 예상 외로 외교 분야는 물론 내치에서도 비교적 성공적으로 총리직을 수행하고 있다.

물론 메르켈이 취임 후 지금까지 평탄한 길만을 달려온 것은 아니다. 취임 초기에 높았던 인기는 취임 6개월을 지나면서 떨어지기 시작,2005년 총선 당시 35%대에 이르던 지지율은 지난해 말 30% 아래로 미끄러졌고 지난해 말 실시한 한 여론조사에서는 독일 국민의 78%가 '메르켈 정부는 가장 긴급한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있다'고 답했을 정도였다.

당시 이 같은 반응은 메르켈이 취임 초기에 추진했던 부가세율 인상 등 개혁에 대한 거부감에서 비롯됐다.

그렇지만 그때부터 다시 6개월여가 지난 현재 메르켈의 리더십은 글로벌 외교무대에서는 물론 독일 내에서도 유감 없이 발휘되고 있으며 메르켈에 대한 지지도 역시 상승 곡선을 그리고 있다.

인기 회복의 비결은 다름아닌 독일 경제의 회복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메르켈은 취임 직후 고령화와 연금 문제를 동시에 손질했다. 퇴직 연령을 65세에서 67세로 늦췄고 의료보험제도를 현실에 맞게 개정하는 한편 출산장려책도 폈다. 부가세 인상도 생각보다 경제에 큰 충격을 주지 않았고 재정 건전화에 일조하고 있다.

이 같은 정책이 점차 효과를 거두기 시작하면서 독일 경제는 급속한 회복세를 보이고 있다. 2005년 0.9%에 불과했던 경제성장률은 지난해 무려 2.7%로 뛰어올랐다. 취임 1년 전만 해도 12%에 달하던 실업률은 지난해 10.8%로 낮아진 데 이어 올 들어서는 4년 만에 처음으로 9%대에 머물고 있다. 수출대국으로서의 면모도 쇄신하고 있다. 지난해 수출증가율은 13%를 넘어섰고 경상수지 흑자도 1166억유로(약 146조원)로 2년 연속 1000억유로(약 125조원)를 넘었다.

이처럼 경제가 호조를 지속하자 메르켈에 대한 국민의 지지 기반이 단단해지고 있는 것이다. 메르켈 총리는 올초 미국과 유럽연합(EU) 간 '대서양 횡단 경제협력체'(transatlantic Economic Partnership)를 구축할 것을 제의했다. 미국과 EU 간 경제협력을 강화하고 교류를 늘리기 위해 관련 법규와 규정,기술 표준 등을 통일하자는 것이다. 독일 경제의 안정이 결국 외교무대에서 메르켈 리더십의 원천이 되고 있는 셈이다.

김선태 한국경제신문 연구위원 kst@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