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 혁명의 공통분모는 폭력
일찍이 시몬느 베이유는 폭력이 난무하는 상황(예컨대 전쟁)에서 "폭력은 폭력의 피해자를 사물로 뒤바꿔 버린다"고 말했다. 언론을 통해 반복적으로 노출되는 피해 상황과 사상자 수는 사태의 규모,그 이상의 것을 짐작하지 못하게 한다. 사망자 카운트가 하나씩 증가할 때마다 존재했을 떨림과 두려움, 고통, 소식을 전하는 손가락의 잔인함은 '타국에서 발생한 재앙을 구경하는 현대적인 경험'(수잔 손택,<타인의 고통>) 속에서 쉽게 지워진다.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 1906~1975년)는 20세기를 전쟁과 혁명의 세기,그 공통분모인 폭력의 세기로 규정한다. 인간들은 이성의 힘으로 폭력 수단을 발전시켜 왔지만, 이미 일상이 되어버린 각종 폭력에 감각이 무뎌지고, 오히려 자신들이 만든 파괴 수단에 의해 절멸할 위험에 직면해 있다. 결코 유쾌하지 않은 상황을 풀어내는 20세기의 저작이 21세기의 오늘을 훌륭하게 설명해낼 때, 저자의 통찰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또 진보하는 세상에 대한 의심과 어제와 같은 오늘을 살아가는 데 대한 한숨도 나온다.
한나 아렌트는 전쟁, 혁명, 테러가 밀도 있게 일어났던 세기를 살아냈다. 그의 고통, 고민, 저술, 사상은 철저히 그 존재를 기반으로 한다. 1906년에 태어나 1975년에 생을 마감한 아렌트는 유태인이었으며, 망명자였고, 심지어 여성이었다. 그가 <우리 망명자들 We Refugees>에서 '나라마다 쫓겨난 망명자들은 자신의 인민들의 전위를 상징한다'고 했듯이, 그는 한계 속에 놓여 있던 사람들의 삶에 주목하고 그러한 삶을 조장한 여러 가지 요인들을 탐구했다.
자신의 의지와 관계없이 물려받은 조건들로 인해 고통 받던 아렌트는 미국으로 망명하여 베트남 전쟁과 흑인들의 민권운동, 68혁명을 경험하게 된다. 그는 어쩔 수 없는 '어두운 시대의 사람'이었다. 특정한 목적을 위해 증오와 폭력이 빈번하게 사용되었으며 그에 대항하는 폭력이 존재하기도 했다. <폭력의 세기(On Violence)>에는 그 시대를 압도했던 '폭력'이라는 것에 대한 성찰이 담겨있다.
◆원문읽기- 폭력의 세기
20세기는 사실상 레닌이 예견했듯이, 전쟁과 혁명의 세기가 되었으며 결과적으로 전쟁과 혁명의 공통분모라고 일반적으로 믿어지는 폭력의 세기가 되었다. 하지만 현재 상황에서는 또 다른 공통 요인이 존재하는데,(중략) 폭력 도구들의 기술적 발전은 이제, 주지하듯이 어떤 정치적 목표도 그것들의 파괴적 잠재력과 조화를 이룰 수 없으며, 무력 갈등에서 그 실제적인 사용을 정당화할 수도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전쟁 행위-먼 옛날부터 국제 분쟁에서 무자비한 중재자였던-는 그 효율성의 대부분과 거의 모든 매력을 상실했다.
▶해설=많은 사상가들이 전쟁은 '외교 활동(또는 정치, 또는 경제적 목적의 추구)의 연장'이라고 설명한다. 전쟁은 국가 간 갈등 상황에서 벌어지는 다소 '폭력적'인 대화의 방법이며, 전쟁 행위가 존재하는 주요 이유는 국제 문제에 있어서 이 '최종적인 중재자'의 대체물이 아직까지 정치무대에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오늘날 벌어지는 전쟁의 목표는 승리가 아닌 전쟁 억제이며, 무기 경쟁은 더 이상 전쟁을 위한 대비가 아니라 평화를 위한 보증이다. 폭력 행동은 수단-목적 범주에 의해 지배되고, '폭력'이 갖는 부정적 함의는 목적을 통해 변호된다. 그런데 대개의 경우 수단에 의해서 목적이 압도될 위험에 직면해 있고, 아렌트는 이런 상황을 명백한 광적 상태로 규정한다.
◆원문읽기- 진보의 역설
진보는, 확실히, 우리 시대의 미신 박람회에 제출된 보다 심각하고 보다 복잡한 품목이다. 무제한적인 진보에 대한 비합리적인 19세기의 믿음이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져 온 이유는 주요하게는 자연과학의 경이로운 발전 때문인데 자연과학은, 근대 시대의 발원 이후로, 실제적으로 '우주' 과학이 되어 왔으며 따라서 광활한 우주를 탐험하는 끝없는 과업을 기대할 수 있었다.(중략) 과학의 진보는 인류의 진보(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든)와 일치하지 않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인류의 종말을 초래할 수도 있으며, 이와 마찬가지로 더 이상의 학문의 발달은 학문을 가치있게 만들었던 모든 것의 파괴로 끝나는 것이 당연할지도 모른다. 다시 말해서 진보는, 우리가 풀어 놓은 재앙스러울 정도로 급격하게 변동하는 과정을 평가하는 규준으로 더 이상 기능할 수 없다.
▶해설=아렌트가 살아가던 당시는 과학의 진보와 함께 인간의 삶도 진보하리라는 믿음을 의심하지 않았다. 과학 기술에 의한 직선적이고 연속적인 진보,어떤 수단을 통해서라도 목적을 달성하는 진보는 목적을 내세워 폭력 수단을 정당화하는 폭력에 대한 변론으로 나타난다.
폭력은 항상 도구를 필요로 하기 때문에, 과학 기술 혁명, 도구 제작의 혁명은 특히 전쟁 상태에서 눈에 띄게 나타난다. 무기가 진보함으로써 전쟁에 참여하는 군인은 적을 죽일 때 덜 민감해졌다. 칼이나 죽창으로 누군가를 죽일 때처럼 어떤 촉감을 느낄 필요가 없었으며, 어떤 군인들은 버튼만으로 일을 치를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피 냄새가 말끔히 제거되는 순간, 과학기술의 진보는 더 나은 상황을 가져다주기는커녕 '전 세계의 자살 수단'으로 변해간다. 폭력의 확산과 그 수단의 발전, 이 모든 것이 20세기 '진보'의 직접적인 산물이다.
◆원문읽기- 폭력과 권력
권력과 폭력은 대립적이다. 즉, 하나가 절대적으로 지배하는 곳에서, 다른 하나는 부재한다. 폭력은 권력이 위태로운 곳에서 나타나지만, 제멋대로 내버려둔다면 그것은 권력의 소멸로 끝난다. 이것은 폭력의 대립물을 비폭력으로 사고하는 것이 올바르지 않다는 것을 함의한다. 그래서 비폭력적 권력을 이야기하는 것은 실질적으로 동어반복이다. 폭력은 권력을 파괴할 수 있다. 그러나 폭력은 권력을 전혀 생산할 수 없다.
▶해설=권력이 곧 폭력이라는 통념이 만연한 가운데, 아렌트는 폭력의 대립물은 비폭력이 아닌, 권력이라고 주장한다. 아렌트에 의하면, '폭력'은 도구적인 힘으로 타인을 제압하고 자신의 의지를 관철시키는 것인 반면에 '권력'은 사람들의 공동행동과 상호지지 속에서 형성된 힘이다. 권력은 사람들이 함께 모여 제휴하고 행동할 때 생겨나는 것이기 때문에 처음부터 정당성(legitimacy)을 갖고 있다. 반면 폭력은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 그 목적을 통해서 정당화(justification)될 수 있을 뿐이다.
권력이 극대화되어 국민이 국가의 명령에 자발적으로 따른다면 폭력의 힘을 빌릴 필요가 없지만, 권력이 힘을 잃어 국민의 동의를 이끌어 내지 못할 때에는 폭력의 힘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권력이 폭력의 힘을 빌리려 시도하는 순간, 권력은 스스로의 상실을 증명하게 된다.
◆원문읽기- 폭력의 본성
폭력이 흔히 분노로부터 솟아오른다는 것은 상투어에 지나지 않고, 또 분노는 실제로 비합리적이고 병리적일 수 있지만, 다른 모든 인간 정서도 그럴 수 있다. 인간이 비인간화되는 조건-강제 수용소, 고문, 기근과 같은-을 창출할 수 있다는 것은 의심할 바 없는 사실이지만, 그러나 이것이 동물처럼 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리고 그런 조건에서는, 분노와 폭력이 아니라, 그것들의 뚜렷한 부재가 비인간화의 가장 분명한 징후이다.(중략) 정치 문제에 있어서 권력과 폭력이 생물학적 개념들로 해석되는 유기체적 사유전통보다 이론적으로 더 위험할 수 있는 것은 없다. 그러한 개념들이 오늘날 이해되고 있는 것처럼, 생명과 생명에서 나온다고 단정되는 창조성이 그 공통분모이므로, 마찬가지로 폭력도 창조성에 기반하여 정당화된다. 그러한 문제들에 관한, 특히 폭동에 관한 현재의 전체적인 논의에 스며들고 있는 유기체적 비유들-'병든 사회'라는, 폭동은 그 징후라는 통념-은 단지 폭력을 조장할 수 있을 뿐이다.
▶해설=아렌트는 분노와 폭력을 짐승 같거나 비이성적이고 비합리적이라고 치부하는 것에 반대한다. 명백히 분노할 만한 여건에 처해있을 때 분노하지 않는 것은 오히려 더 비인간적이며, 분노가 동반하는 폭력은 '자연스러운' 인간의 감정에 속한다는 것이다. 분노와 폭력이 비합리적인 것으로 변질하는 것은 사회 전체의 특정한 분위기와 성찰하지 않는 태도 때문이다.
또한 '폭력'의 본질을 연구하는 생물학적인 시각에 대해서도 비판하는데, 생명체의 창조성에 기반하여 폭력 역시 창조력을 갖는다는 부당한 신념을 조장하기 때문이다. 앞서 말했듯이, 폭력은 (권력을) 파괴할 수는 있지만 (권력을) 창조할 수는 없다. 실제로 폭력을 동반한 많은 혁명과 개혁, 시위들이 목적을 달성했지만, 그것은 수단으로서의 폭력에 의해 창조된 것이 아닌 이전 상태가 이미 공동체의 동의-즉 권력을 잃었기 때문이다.
폭력은 본질상 '항상 수단이 목적을 압도'한다. 그렇다면 극대화된 폭력은 어떻게 극복될 수 있을까? 사고하고 배려하는 인간들이 모여 함께 행동하고 폭력에 대응할 수 있는 행동 능력의 가능성. '모든 권력의 감소가 폭력의 공개적인 초대'라는 말을 말미에 붙이면서 아렌트가 강조하고 싶었던 것은 여론의 힘, 행동의 힘이었다.
석연숙 S·논술 선임연구원 verver@nonsul.com
일찍이 시몬느 베이유는 폭력이 난무하는 상황(예컨대 전쟁)에서 "폭력은 폭력의 피해자를 사물로 뒤바꿔 버린다"고 말했다. 언론을 통해 반복적으로 노출되는 피해 상황과 사상자 수는 사태의 규모,그 이상의 것을 짐작하지 못하게 한다. 사망자 카운트가 하나씩 증가할 때마다 존재했을 떨림과 두려움, 고통, 소식을 전하는 손가락의 잔인함은 '타국에서 발생한 재앙을 구경하는 현대적인 경험'(수잔 손택,<타인의 고통>) 속에서 쉽게 지워진다.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 1906~1975년)는 20세기를 전쟁과 혁명의 세기,그 공통분모인 폭력의 세기로 규정한다. 인간들은 이성의 힘으로 폭력 수단을 발전시켜 왔지만, 이미 일상이 되어버린 각종 폭력에 감각이 무뎌지고, 오히려 자신들이 만든 파괴 수단에 의해 절멸할 위험에 직면해 있다. 결코 유쾌하지 않은 상황을 풀어내는 20세기의 저작이 21세기의 오늘을 훌륭하게 설명해낼 때, 저자의 통찰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또 진보하는 세상에 대한 의심과 어제와 같은 오늘을 살아가는 데 대한 한숨도 나온다.
한나 아렌트는 전쟁, 혁명, 테러가 밀도 있게 일어났던 세기를 살아냈다. 그의 고통, 고민, 저술, 사상은 철저히 그 존재를 기반으로 한다. 1906년에 태어나 1975년에 생을 마감한 아렌트는 유태인이었으며, 망명자였고, 심지어 여성이었다. 그가 <우리 망명자들 We Refugees>에서 '나라마다 쫓겨난 망명자들은 자신의 인민들의 전위를 상징한다'고 했듯이, 그는 한계 속에 놓여 있던 사람들의 삶에 주목하고 그러한 삶을 조장한 여러 가지 요인들을 탐구했다.
자신의 의지와 관계없이 물려받은 조건들로 인해 고통 받던 아렌트는 미국으로 망명하여 베트남 전쟁과 흑인들의 민권운동, 68혁명을 경험하게 된다. 그는 어쩔 수 없는 '어두운 시대의 사람'이었다. 특정한 목적을 위해 증오와 폭력이 빈번하게 사용되었으며 그에 대항하는 폭력이 존재하기도 했다. <폭력의 세기(On Violence)>에는 그 시대를 압도했던 '폭력'이라는 것에 대한 성찰이 담겨있다.
◆원문읽기- 폭력의 세기
20세기는 사실상 레닌이 예견했듯이, 전쟁과 혁명의 세기가 되었으며 결과적으로 전쟁과 혁명의 공통분모라고 일반적으로 믿어지는 폭력의 세기가 되었다. 하지만 현재 상황에서는 또 다른 공통 요인이 존재하는데,(중략) 폭력 도구들의 기술적 발전은 이제, 주지하듯이 어떤 정치적 목표도 그것들의 파괴적 잠재력과 조화를 이룰 수 없으며, 무력 갈등에서 그 실제적인 사용을 정당화할 수도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전쟁 행위-먼 옛날부터 국제 분쟁에서 무자비한 중재자였던-는 그 효율성의 대부분과 거의 모든 매력을 상실했다.
▶해설=많은 사상가들이 전쟁은 '외교 활동(또는 정치, 또는 경제적 목적의 추구)의 연장'이라고 설명한다. 전쟁은 국가 간 갈등 상황에서 벌어지는 다소 '폭력적'인 대화의 방법이며, 전쟁 행위가 존재하는 주요 이유는 국제 문제에 있어서 이 '최종적인 중재자'의 대체물이 아직까지 정치무대에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오늘날 벌어지는 전쟁의 목표는 승리가 아닌 전쟁 억제이며, 무기 경쟁은 더 이상 전쟁을 위한 대비가 아니라 평화를 위한 보증이다. 폭력 행동은 수단-목적 범주에 의해 지배되고, '폭력'이 갖는 부정적 함의는 목적을 통해 변호된다. 그런데 대개의 경우 수단에 의해서 목적이 압도될 위험에 직면해 있고, 아렌트는 이런 상황을 명백한 광적 상태로 규정한다.
◆원문읽기- 진보의 역설
진보는, 확실히, 우리 시대의 미신 박람회에 제출된 보다 심각하고 보다 복잡한 품목이다. 무제한적인 진보에 대한 비합리적인 19세기의 믿음이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져 온 이유는 주요하게는 자연과학의 경이로운 발전 때문인데 자연과학은, 근대 시대의 발원 이후로, 실제적으로 '우주' 과학이 되어 왔으며 따라서 광활한 우주를 탐험하는 끝없는 과업을 기대할 수 있었다.(중략) 과학의 진보는 인류의 진보(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든)와 일치하지 않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인류의 종말을 초래할 수도 있으며, 이와 마찬가지로 더 이상의 학문의 발달은 학문을 가치있게 만들었던 모든 것의 파괴로 끝나는 것이 당연할지도 모른다. 다시 말해서 진보는, 우리가 풀어 놓은 재앙스러울 정도로 급격하게 변동하는 과정을 평가하는 규준으로 더 이상 기능할 수 없다.
▶해설=아렌트가 살아가던 당시는 과학의 진보와 함께 인간의 삶도 진보하리라는 믿음을 의심하지 않았다. 과학 기술에 의한 직선적이고 연속적인 진보,어떤 수단을 통해서라도 목적을 달성하는 진보는 목적을 내세워 폭력 수단을 정당화하는 폭력에 대한 변론으로 나타난다.
폭력은 항상 도구를 필요로 하기 때문에, 과학 기술 혁명, 도구 제작의 혁명은 특히 전쟁 상태에서 눈에 띄게 나타난다. 무기가 진보함으로써 전쟁에 참여하는 군인은 적을 죽일 때 덜 민감해졌다. 칼이나 죽창으로 누군가를 죽일 때처럼 어떤 촉감을 느낄 필요가 없었으며, 어떤 군인들은 버튼만으로 일을 치를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피 냄새가 말끔히 제거되는 순간, 과학기술의 진보는 더 나은 상황을 가져다주기는커녕 '전 세계의 자살 수단'으로 변해간다. 폭력의 확산과 그 수단의 발전, 이 모든 것이 20세기 '진보'의 직접적인 산물이다.
◆원문읽기- 폭력과 권력
권력과 폭력은 대립적이다. 즉, 하나가 절대적으로 지배하는 곳에서, 다른 하나는 부재한다. 폭력은 권력이 위태로운 곳에서 나타나지만, 제멋대로 내버려둔다면 그것은 권력의 소멸로 끝난다. 이것은 폭력의 대립물을 비폭력으로 사고하는 것이 올바르지 않다는 것을 함의한다. 그래서 비폭력적 권력을 이야기하는 것은 실질적으로 동어반복이다. 폭력은 권력을 파괴할 수 있다. 그러나 폭력은 권력을 전혀 생산할 수 없다.
▶해설=권력이 곧 폭력이라는 통념이 만연한 가운데, 아렌트는 폭력의 대립물은 비폭력이 아닌, 권력이라고 주장한다. 아렌트에 의하면, '폭력'은 도구적인 힘으로 타인을 제압하고 자신의 의지를 관철시키는 것인 반면에 '권력'은 사람들의 공동행동과 상호지지 속에서 형성된 힘이다. 권력은 사람들이 함께 모여 제휴하고 행동할 때 생겨나는 것이기 때문에 처음부터 정당성(legitimacy)을 갖고 있다. 반면 폭력은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 그 목적을 통해서 정당화(justification)될 수 있을 뿐이다.
권력이 극대화되어 국민이 국가의 명령에 자발적으로 따른다면 폭력의 힘을 빌릴 필요가 없지만, 권력이 힘을 잃어 국민의 동의를 이끌어 내지 못할 때에는 폭력의 힘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권력이 폭력의 힘을 빌리려 시도하는 순간, 권력은 스스로의 상실을 증명하게 된다.
◆원문읽기- 폭력의 본성
폭력이 흔히 분노로부터 솟아오른다는 것은 상투어에 지나지 않고, 또 분노는 실제로 비합리적이고 병리적일 수 있지만, 다른 모든 인간 정서도 그럴 수 있다. 인간이 비인간화되는 조건-강제 수용소, 고문, 기근과 같은-을 창출할 수 있다는 것은 의심할 바 없는 사실이지만, 그러나 이것이 동물처럼 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리고 그런 조건에서는, 분노와 폭력이 아니라, 그것들의 뚜렷한 부재가 비인간화의 가장 분명한 징후이다.(중략) 정치 문제에 있어서 권력과 폭력이 생물학적 개념들로 해석되는 유기체적 사유전통보다 이론적으로 더 위험할 수 있는 것은 없다. 그러한 개념들이 오늘날 이해되고 있는 것처럼, 생명과 생명에서 나온다고 단정되는 창조성이 그 공통분모이므로, 마찬가지로 폭력도 창조성에 기반하여 정당화된다. 그러한 문제들에 관한, 특히 폭동에 관한 현재의 전체적인 논의에 스며들고 있는 유기체적 비유들-'병든 사회'라는, 폭동은 그 징후라는 통념-은 단지 폭력을 조장할 수 있을 뿐이다.
▶해설=아렌트는 분노와 폭력을 짐승 같거나 비이성적이고 비합리적이라고 치부하는 것에 반대한다. 명백히 분노할 만한 여건에 처해있을 때 분노하지 않는 것은 오히려 더 비인간적이며, 분노가 동반하는 폭력은 '자연스러운' 인간의 감정에 속한다는 것이다. 분노와 폭력이 비합리적인 것으로 변질하는 것은 사회 전체의 특정한 분위기와 성찰하지 않는 태도 때문이다.
또한 '폭력'의 본질을 연구하는 생물학적인 시각에 대해서도 비판하는데, 생명체의 창조성에 기반하여 폭력 역시 창조력을 갖는다는 부당한 신념을 조장하기 때문이다. 앞서 말했듯이, 폭력은 (권력을) 파괴할 수는 있지만 (권력을) 창조할 수는 없다. 실제로 폭력을 동반한 많은 혁명과 개혁, 시위들이 목적을 달성했지만, 그것은 수단으로서의 폭력에 의해 창조된 것이 아닌 이전 상태가 이미 공동체의 동의-즉 권력을 잃었기 때문이다.
폭력은 본질상 '항상 수단이 목적을 압도'한다. 그렇다면 극대화된 폭력은 어떻게 극복될 수 있을까? 사고하고 배려하는 인간들이 모여 함께 행동하고 폭력에 대응할 수 있는 행동 능력의 가능성. '모든 권력의 감소가 폭력의 공개적인 초대'라는 말을 말미에 붙이면서 아렌트가 강조하고 싶었던 것은 여론의 힘, 행동의 힘이었다.
석연숙 S·논술 선임연구원 verver@nonsu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