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의 '성공' 잠재력 믿고 끝까지 도전하라"
"누구나 자신의 능력을 100% 이상 발휘할 수 있는 잠재력을 갖고 있어요. 최선을 다 하면 이루지 못할 게 없다는 얘기죠. '열정과 도전의식' 이것 만큼은 반드시 가져야 합니다."
이종수 현대건설 사장은 올해로 회사에 입사한 지 꼭 30년째가 된다. 경력사원으로 입사해 해외현장과 기획ㆍ관리ㆍ자금분야를 두루 거쳐 2006년 3월부터 국내 최대 건설회사인 현대건설 최고 사령탑(대표이사 사장)에 올랐다.
현대건설은 흔히 '건설 명가'로 불린다. 올해는 특히 현대건설 창립 60주년에 한국건설 60년을 맞는 해다. 우리나라 건설업의 역사와 현대건설 역사가 똑같은 셈이다. 더욱이 1963년부터 2003년까지 41년간 건설업계 1위 자리를 놓친 적이 없는 회사다. 현대건설이 우리나라 건설업체로는 처음으로 해외시장에 진출한 1965년이후 지난 40여년 동안 건설사 가운데 10위 이내에 계속 남아 있는 회사는 현대건설과 대림산업 2곳 뿐이다. 한마디로 건설업계의 산증인이라는 얘기다.
이런 회사의 최고경영자(CEO)를 맡고 있는 이 사장은 사실 '건설회사 사장' 하면 떠오르는 '카리스마'의 이미지와는 거리가 멀다. 유년기와 학창시절 역시 일반 학생들과 별반 다를 게 없었다. 평범하고 숫기없는 모범생 스타일이었다. 1949년 경기도 이천에서 태어나 초등학교 2학년 때 서울로 전학온 뒤 중ㆍ고등학교 학창시절을 서울에서 보냈다. 고등학교 2학년 때까지만 해도 그저 '조용하고 공부 잘하는 학생'이었다.
하지만 고3이 되자마자 큰 시련이 닥쳐왔다. 이른바 '고 3병'이었다. "고등학교 2학년 때까지는 무난했죠. 그런데 3학년 때 일이 생겼어요. 대입 모의고사를 치렀는데, 저도 모르게 문과에서 전교 1등을 했어요. 그런데 그게 문제였어요. 그 뒤로는 이상하게 집중이 안되더라구요. 머리가 아프고,공부도 안 되고…. 시험을 치를수록 성적이 떨어졌죠. 2학기 들어서는 학교 가기도 싫어서 결석도 많이 했어요."
이 사장은 "1등에 대한 부담감 때문이었던 같다"고 그 시절을 회상했다. 이 사장은 결국 입시에서 낙방했고,재수 끝에 연세대학교 경영학과에 입학했다. 대학 졸업 후 이 사장은 학군장교(ROTC)로 임관해 통역장교,사령관 부관(비서 역할) 등의 임무를 수행하다가 전역한 뒤 당시 삼성그룹 공채시험에 합격해 동양방송(TBCㆍ지금은 KBS로 통폐합)에서 첫 직장생활을 시작했다. 이후 2년 뒤인 1978년 5월 경력사원 공채를 통해 현대건설로 직장을 옮겼다. 해외근무를 하고 싶어서였다.
"경리부에서 2년 정도 근무한 뒤 리비아로 발령이 났어요. 리비아에서 도로공사를 땄는데 지사 개설 선발대로 뽑혔어요. 우리나라와 수교가 안된 상태라 스위스로 가서 1주일 만에 비자를 받아 들어갔어요. 리비아 공항에 도착했는데, 정말 암담했죠. 영어로 된 간판조차 하나 없어서 사방팔방 어디가 어딘지 알 수도 없고. 미리 알았다면 절대 안 갔을 거예요. 2년 동안 고생 참 많이 했어요. 쿠웨이트로 출장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라면이랑 김치 사와서 호텔에서 먹다가 걸려서 혼쭐이 나기도 하고…. 그래도 그 때 생각이 많이 나요. 피곤한 줄도 모르고 밤새도록 일하곤 했지요."
이 사장은 요즘도 해외 현장에 자주 다녀온다. 지난해 5월엔 하루에 3개국을 돌아다닐 정도로 바쁜 일정을 소화하기도 했다.
리비아에서 귀국한 이 사장이 자금과장을 맡고 있던 1982년의 일이다. 덩치 큰 건설회사의 자금을 관리하다 보니 하루에도 수천억원을 만지는 일이 다반사였다. 협력업체의 공사대금을 현금으로 줄 수도 있고,어음으로 결제할 수 도 있는 자리였다. 한 마디로 '힘이 센 자리'였다.
하지만 이 사장은 종전의 자금집행 관행을 확 바꿨다. 현금과 어음 지급기준을 명확하게 만든 뒤 현금은 은행계좌로 직접 입금하고 어음도 은행에 맡겨 협력업체가 바로 찾아갈 수 있도록 해줬다. 당시 덩치 큰 회사들에 관행처럼 굳어있던 기득권을 과감하게 포기한 결단이었다. "자금이란 투명하게 처리하는 게 가장 중요하다"는 이 사장의 소신이 반영된 결과였다. 그 덕분에 자금과장으로는 최장수 근무기록(3년 이상)을 갖게 됐다. 말레이시아로 발령 받은 후에도 같은 방식으로 자금을 관리하고 집행했다. 당시 해외 지점장으로부터 '내가 사람 복이 있다'는 칭찬도 받았다. '돈을 맡겨도 되는 사람'으로 인정받은 셈이다.
기획실에서 근무하던 1998년부터는 2년 넘게 하루도 빠짐없이 첫 전철로 출근하기도 했다. 현대건설을 창업한 고(故) 정주영 명예회장이 당시 오전 6시30분이면 회사로 출근해 받는 일일보고를 준비하기 위해서였다. "저를 포함한 3명의 임원은 매일 매일 비상이었죠. 그래서 항상 오전 6시 전에 출근했어요. 그 때 강남구 도곡동에 살았는데 오전 5시20분에 집에서 나와 매일 첫 전철을 탔어요. 회사에 도착하면 5시50분이었죠. 요즘은 그 때보다 1시간 늦은 오전 7시에 출근하니 얼마나 좋은지."
이 사장은 현대건설의 CEO에 오른 뒤에도 자신이 1인자라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맡은 역할과 직책에서는 모든 직원이 1인자이기 때문이란다. "누구나 어떤 부서에서든 1인자입니다. 자기가 맡고 있는 직책이나 역할을 충실히 하면,모두가 그렇죠. 제가 맡고 있는 CEO 역시 후배 직원들이 열정을 잃지 않도록 용기를 북돋워주는 역할이에요."
인재론 역시 명쾌하다. "사람이란 최선을 다하면 이루지 못할 것이 없어요. 사람의 능력이란 게 사실 살아가면서 100% 이상 발휘할 때가 별로 없잖아요. 70%만 발휘해도 대단한 거죠. 군대가면 유격훈련을 받는데, 땡볕에 목이 바짝바짝 마를 때는 진달래 꽃 따먹으면서 해갈했어요. 지금은 그걸 어떻게 했나 하는 생각이 들곤 하죠. 그런 것을 보면 누구나 자기가 가진 능력을 100% 이상 발휘할 수 있는 잠재력을 갖고 있는 것 같아요."
이 사장은 특히 사회진출을 준비하는 젊은이들에게 "예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는 게 한 가지 있다"고 조언한다. "제가 살아온 것과 요즘 사는 방식은 달라요. 요즘 젊은이들이 저같은 삶을 살면 실패할 수도 있어요. 하지만 변하지 않는 게 있습니다. 열정과 도전의식이죠. 그것은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저는 신입사원을 포함한 직원들에게 5년,10년 뒤 자신이 어떤 모습이 돼 있을 것인가 예측할 수 있도록 비전을 주려고 노력합니다. 그게 CEO가 할 일이죠."
이런 이 사장이 항상 마음에 새겨두고 있는 좌우명이 있다. 노자(老子)의 도덕경에 나오는 '상선약수(上善若水)'라는 말로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것이 가장 좋다'는 얘기다.
눈길을 끄는 것은 사장 집무실 책상 한 켠의 작은 액자에 담겨 있는 이 글귀가 컴퓨터로 직접 출력한 것이라는 사실이다. 유명 서예가에게 부탁해서 벽에다 걸어놓을 법도 하지만, 이 사장의 대답은 간단했다. "좌우명이란 게 마음 속에 새겨 인생의 좌표로 삼으면 되는 것이지, 누구한테 보여주기 위한 것은 아니잖아요?"
강황식 한국경제 기자 hiskang@hankyung.com
"누구나 자신의 능력을 100% 이상 발휘할 수 있는 잠재력을 갖고 있어요. 최선을 다 하면 이루지 못할 게 없다는 얘기죠. '열정과 도전의식' 이것 만큼은 반드시 가져야 합니다."
이종수 현대건설 사장은 올해로 회사에 입사한 지 꼭 30년째가 된다. 경력사원으로 입사해 해외현장과 기획ㆍ관리ㆍ자금분야를 두루 거쳐 2006년 3월부터 국내 최대 건설회사인 현대건설 최고 사령탑(대표이사 사장)에 올랐다.
현대건설은 흔히 '건설 명가'로 불린다. 올해는 특히 현대건설 창립 60주년에 한국건설 60년을 맞는 해다. 우리나라 건설업의 역사와 현대건설 역사가 똑같은 셈이다. 더욱이 1963년부터 2003년까지 41년간 건설업계 1위 자리를 놓친 적이 없는 회사다. 현대건설이 우리나라 건설업체로는 처음으로 해외시장에 진출한 1965년이후 지난 40여년 동안 건설사 가운데 10위 이내에 계속 남아 있는 회사는 현대건설과 대림산업 2곳 뿐이다. 한마디로 건설업계의 산증인이라는 얘기다.
이런 회사의 최고경영자(CEO)를 맡고 있는 이 사장은 사실 '건설회사 사장' 하면 떠오르는 '카리스마'의 이미지와는 거리가 멀다. 유년기와 학창시절 역시 일반 학생들과 별반 다를 게 없었다. 평범하고 숫기없는 모범생 스타일이었다. 1949년 경기도 이천에서 태어나 초등학교 2학년 때 서울로 전학온 뒤 중ㆍ고등학교 학창시절을 서울에서 보냈다. 고등학교 2학년 때까지만 해도 그저 '조용하고 공부 잘하는 학생'이었다.
하지만 고3이 되자마자 큰 시련이 닥쳐왔다. 이른바 '고 3병'이었다. "고등학교 2학년 때까지는 무난했죠. 그런데 3학년 때 일이 생겼어요. 대입 모의고사를 치렀는데, 저도 모르게 문과에서 전교 1등을 했어요. 그런데 그게 문제였어요. 그 뒤로는 이상하게 집중이 안되더라구요. 머리가 아프고,공부도 안 되고…. 시험을 치를수록 성적이 떨어졌죠. 2학기 들어서는 학교 가기도 싫어서 결석도 많이 했어요."
이 사장은 "1등에 대한 부담감 때문이었던 같다"고 그 시절을 회상했다. 이 사장은 결국 입시에서 낙방했고,재수 끝에 연세대학교 경영학과에 입학했다. 대학 졸업 후 이 사장은 학군장교(ROTC)로 임관해 통역장교,사령관 부관(비서 역할) 등의 임무를 수행하다가 전역한 뒤 당시 삼성그룹 공채시험에 합격해 동양방송(TBCㆍ지금은 KBS로 통폐합)에서 첫 직장생활을 시작했다. 이후 2년 뒤인 1978년 5월 경력사원 공채를 통해 현대건설로 직장을 옮겼다. 해외근무를 하고 싶어서였다.
"경리부에서 2년 정도 근무한 뒤 리비아로 발령이 났어요. 리비아에서 도로공사를 땄는데 지사 개설 선발대로 뽑혔어요. 우리나라와 수교가 안된 상태라 스위스로 가서 1주일 만에 비자를 받아 들어갔어요. 리비아 공항에 도착했는데, 정말 암담했죠. 영어로 된 간판조차 하나 없어서 사방팔방 어디가 어딘지 알 수도 없고. 미리 알았다면 절대 안 갔을 거예요. 2년 동안 고생 참 많이 했어요. 쿠웨이트로 출장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라면이랑 김치 사와서 호텔에서 먹다가 걸려서 혼쭐이 나기도 하고…. 그래도 그 때 생각이 많이 나요. 피곤한 줄도 모르고 밤새도록 일하곤 했지요."
이 사장은 요즘도 해외 현장에 자주 다녀온다. 지난해 5월엔 하루에 3개국을 돌아다닐 정도로 바쁜 일정을 소화하기도 했다.
리비아에서 귀국한 이 사장이 자금과장을 맡고 있던 1982년의 일이다. 덩치 큰 건설회사의 자금을 관리하다 보니 하루에도 수천억원을 만지는 일이 다반사였다. 협력업체의 공사대금을 현금으로 줄 수도 있고,어음으로 결제할 수 도 있는 자리였다. 한 마디로 '힘이 센 자리'였다.
하지만 이 사장은 종전의 자금집행 관행을 확 바꿨다. 현금과 어음 지급기준을 명확하게 만든 뒤 현금은 은행계좌로 직접 입금하고 어음도 은행에 맡겨 협력업체가 바로 찾아갈 수 있도록 해줬다. 당시 덩치 큰 회사들에 관행처럼 굳어있던 기득권을 과감하게 포기한 결단이었다. "자금이란 투명하게 처리하는 게 가장 중요하다"는 이 사장의 소신이 반영된 결과였다. 그 덕분에 자금과장으로는 최장수 근무기록(3년 이상)을 갖게 됐다. 말레이시아로 발령 받은 후에도 같은 방식으로 자금을 관리하고 집행했다. 당시 해외 지점장으로부터 '내가 사람 복이 있다'는 칭찬도 받았다. '돈을 맡겨도 되는 사람'으로 인정받은 셈이다.
기획실에서 근무하던 1998년부터는 2년 넘게 하루도 빠짐없이 첫 전철로 출근하기도 했다. 현대건설을 창업한 고(故) 정주영 명예회장이 당시 오전 6시30분이면 회사로 출근해 받는 일일보고를 준비하기 위해서였다. "저를 포함한 3명의 임원은 매일 매일 비상이었죠. 그래서 항상 오전 6시 전에 출근했어요. 그 때 강남구 도곡동에 살았는데 오전 5시20분에 집에서 나와 매일 첫 전철을 탔어요. 회사에 도착하면 5시50분이었죠. 요즘은 그 때보다 1시간 늦은 오전 7시에 출근하니 얼마나 좋은지."
이 사장은 현대건설의 CEO에 오른 뒤에도 자신이 1인자라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맡은 역할과 직책에서는 모든 직원이 1인자이기 때문이란다. "누구나 어떤 부서에서든 1인자입니다. 자기가 맡고 있는 직책이나 역할을 충실히 하면,모두가 그렇죠. 제가 맡고 있는 CEO 역시 후배 직원들이 열정을 잃지 않도록 용기를 북돋워주는 역할이에요."
인재론 역시 명쾌하다. "사람이란 최선을 다하면 이루지 못할 것이 없어요. 사람의 능력이란 게 사실 살아가면서 100% 이상 발휘할 때가 별로 없잖아요. 70%만 발휘해도 대단한 거죠. 군대가면 유격훈련을 받는데, 땡볕에 목이 바짝바짝 마를 때는 진달래 꽃 따먹으면서 해갈했어요. 지금은 그걸 어떻게 했나 하는 생각이 들곤 하죠. 그런 것을 보면 누구나 자기가 가진 능력을 100% 이상 발휘할 수 있는 잠재력을 갖고 있는 것 같아요."
이 사장은 특히 사회진출을 준비하는 젊은이들에게 "예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는 게 한 가지 있다"고 조언한다. "제가 살아온 것과 요즘 사는 방식은 달라요. 요즘 젊은이들이 저같은 삶을 살면 실패할 수도 있어요. 하지만 변하지 않는 게 있습니다. 열정과 도전의식이죠. 그것은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저는 신입사원을 포함한 직원들에게 5년,10년 뒤 자신이 어떤 모습이 돼 있을 것인가 예측할 수 있도록 비전을 주려고 노력합니다. 그게 CEO가 할 일이죠."
이런 이 사장이 항상 마음에 새겨두고 있는 좌우명이 있다. 노자(老子)의 도덕경에 나오는 '상선약수(上善若水)'라는 말로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것이 가장 좋다'는 얘기다.
눈길을 끄는 것은 사장 집무실 책상 한 켠의 작은 액자에 담겨 있는 이 글귀가 컴퓨터로 직접 출력한 것이라는 사실이다. 유명 서예가에게 부탁해서 벽에다 걸어놓을 법도 하지만, 이 사장의 대답은 간단했다. "좌우명이란 게 마음 속에 새겨 인생의 좌표로 삼으면 되는 것이지, 누구한테 보여주기 위한 것은 아니잖아요?"
강황식 한국경제 기자 hiska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