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항쟁' 20주년 어떤 의미로 남았나

[Focus] "이젠 국가의 품격을 높여갈 때"
너무 흔하고 자연스러워 사람들이 그 존재 자체를 잘 못 느끼는 것들이 있다. 공기,물,햇빛 같은 것들이 그렇다. 헌법 제1조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라는 사실도 이제는 공기처럼 자연스러워졌다. 그러나 지금 고등학생들이 태어나기 전,1987년 이전에는 달랐다. 민주주의는 '타는 목마름'이었고,자유를 이야기할 때는 주위부터 살펴야 했다.

1987년 6월 한국 현대사의 한 획을 긋는 대사건이 있었다. 시민,학생들이 군사독재 정권에 항거해 끝내 항복을 받아낸 '6월 항쟁'이다. 국민의 힘으로 민주주의를 쟁취했다는 점에서 '한국의 명예혁명'으로도 불린다.

그로부터 20년이 지났다. 물리적 시간은 누구에게나 똑같이 20년이 흘렀지만 개개인의 의식속 시계에는 너무 큰 간극이 있다.어쩌면 이 간극이 지금 한국사회 갈등의 뿌리인지도 모른다.

◆1987년에서 2007년까지

2007년은 여러가지 의미를 되새기게 됐다.올해는 1987년 민주화의 20주년이고,1997년 외환위기의 10주년이기 때문이다. 강산이 두 번 바뀌는 동안 세상은 정말 많이 변했다. 나라 밖에선 1990년대 들어 동구 공산주의가 몰락했고 1997년엔 외환위기가 아시아를 휩쓸고 지나갔다. 나라 안으론 '문민정부'(김영삼) '국민의 정부'(김대중) '참여정부'(노무현) 등 군 출신이 아닌 문민 대통령이 15년째 이어가고 있다. 더이상 독재나 대통령의 장기집권은 발 붙일 수 없게 됐고,자유와 민주주의를 한껏 구가하는 세상이 됐다.심지어 좌파 정당도 등장했고 북한에도 수시로 왕래한다.

경제 면에서도 지난 20년의 성과는 눈부시다.1인당 국민소득은 6배(1987년 3321달러→2006년 1만8732달러)로 불어났고,나라경제 규모는 세계 19위에서 11위로 치솟았다. 그래서 대한민국은 2차 세계대전 이후 85개 신생독립국 중 유일하게 민주화와 경제발전을 동시에 이룬 나라로 평가받는다.

◆민주화는 특정세력의 전유물이 아니다

한국의 민주화는 1987년에야 완성된 것인가? 그렇다면 1987년 이전은 비(非)민주 역사였나? 해방직후 한 영국 기자는 "한국에서 민주주의는 쓰레기통에서 장미꽃을 피우기보다 어렵다"고 비판했다.일제 식민치하에서 자주·자치·자립의 역량을 키우지 못한 채 해방을 맞았기 때문에 나온 말이다. 하지만 대한민국은 건국에서부터 의회민주주의, 3권 분립, 보통선거 등 민주주의적 제도기반을 갖추고 출발했다. 이런 제도가 뿌리내리기까지 시행착오도 많았지만 4·19혁명, 광주항쟁 등 부단한 민주화 투쟁과 국민적 공감이 1987년에 한꺼번에 분출된 것이다.

이렇듯 오랜 산고(産苦)를 겪은 민주화는 하루 아침에 쟁취한 게 아니다. 물이 끓기 전까지 지속적인 가열이 필요하듯이 건국 이후 60년 현대사가 바로 민주화의 역사인 셈이다. 특히 먹고사는 게 더 급한 개도국에선 정치 민주화가 어려운데,1970~80년대 이룬 경제발전과 중산층 형성은 민주화의 든든한 토대가 됐다. 따라서 민주화라는 성과는 특정세력의 전유물이 될 수 없는 것이다.

◆'87년 체제'는 유효한가

6월 항쟁으로 구축된 '87년 체제'는 대통령을 국민 손으로 뽑는다는 절차적 민주화에는 성공했지만 오히려 더 많은 과제를 드러냈다. 직선제는 필요조건일 뿐이다.실질적인 민주사회가 되는 데 필요한 사회적 역량 면에선 거꾸로 후퇴한 측면도 많다는 지적이다. 문민 대통령들이 집권한 뒤 외환위기를 초래했고 양극화와 이해집단 간 갈등은 더욱 심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른바 '민주화 세력'들이 대거 정부와 정치권에 대거 참여했지만 국정운영 능력은 국민들에게 실망감을 안겨주기 충분했다. 머리속 시계추가 1987년에 멈춰 있기 때문이다.

1997년 외환위기 이후 10년은 민주화를 넘어 세계화가 아젠다로 떠올랐다. 하지만 이에 대한 극복 의지와 비전 제시보다는 당장 대중 인기에 영합하는 포퓰리즘이 더 잘 먹히는 시대가 됐다. 하나의 극단에서 다른 편의 극단으로 급격한 쏠림현상이 일어난 셈이다.

◆이제는 나라의 품격을 높여야

6월 항쟁이 민주화의 큰 전환점이 된 것은 사실이지만 민주화가 종착역은 결코 아니다. 선진 민주국가들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한가지 공통점이 나타난다. 그것은 특정 인물에 의한 인치(人治)가 아니라,누가 지도자가 되든 법과 원칙을 통해 이끌어가는 법치(法治)국가의 모습이다. 개인의 창의와 자유를 존중하지만 개인·집단간 끊임없는 갈등·충돌을 조정하고 합리적 질서를 갖춰나가는 사회이다.이를 나라의 품격,즉 국격(國格)이라고 한다. 국격을 높이는 것이 1987년에서 멈춘 시계를 21세기로 돌리는,선진화된 민주국가로 거듭나는 계기가 될 것이다. 실질적인 민주화는 21세기에 걸맞는 보편적인 가치와 미래를 지향할 때 품위 있는 사회로 완성될 것이다.

오형규 한국경제 연구위원 ohk@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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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해 6월, 무슨 일이 있었나

1987년 6월, "독재 타도! 호헌(護憲) 철폐!"를 외치며 25년의 군사독재에 눌렸던 국민들이 거리로 뛰쳐나왔다. 시위 구호를 외치는 것만으로도 연행돼 얻어맞던 시절임에도 대학생은 물론 '넥타이부대'로 지칭되던 직장인 등 일반시민과 성직자들까지 가세했다. 훗날 '한국의 명예혁명'으로 불리게 된 6월 항쟁이다.

6월 항쟁의 직접적인 도화선은 그해 1월14일 치안본부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서울대생 박종철군이 물고문을 받다 숨진 사건이다.경찰은 당시 "'탁'치니 '억'하고 죽었다"며 사건을 은폐하려 했다. 이 사건이 알려지자 궁지에 몰린 전두환 정권은 "일체의 개헌 논의 중단"을 선언한 4·13 호헌조치를 단행했다. 그러나 5월18일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이 박종철군 고문 치사사건 은폐조작 사실을 폭로하면서 반정부 시위는 전국적으로 번져나갔다. 6월9일엔 연세대생 이한열군이 시위 도중 머리에 최루탄을 맞아 중태에 빠졌다(7월5일 사망).

이를 계기로 학생·종교계·재야 등이 결집된 민주헌법 쟁취 국민운동본부(국본)를 중심으로 6월10일 대규모 궐기대회가 열렸다. 이후 매일 수만명이 거리로 나서는 반정부시위가 이어졌고,급기야 26일에는 100만명이 넘는 대규모 인파가 운집해 직선제 개헌을 요구했다. 이에 위기의식을 느낀 정권은 사흘 뒤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담은 6·29선언을 내놓음으로써 사실상 독재정권의 막을 내리게 된다. 그해 10월27일 국민투표에 통해 현재 헌법으로 직선제 개헌이 이뤄졌다.

그러나 개헌 투쟁에 앞장섰던 김영삼,김대중 씨는 국민들의 민주화 염원에도 불구,서로 갈라서 출마함으로써 이듬해 대선에선 집권 민정당의 노태우 후보가 어부지리로 당선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