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 합리적이어서 존엄하다고?

[고전속 제시문 100선] (45) 도스토예프스키 '지하생활자의 수기'
도스토예프스키(1821~1881) 소설의 주인공은 언제나 지하생활자다. 그의 대표작 '죄와 벌'에서 살인을 저지른 라스콜리니코프도 그렇고,이 책의 주인공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이 작품에서 작가는 주인공의 이상한 캐릭터를 통해 하나의 위대한 사상을 말하고 있다. 인간의 존엄성은 자유에 있으며, 자유는 이성보다 비합리성에 있다는 것이다. 그의 소설 주인공이 하나같이 엉뚱하고, 변덕스럽고 기괴한 이유가 바로 그 때문이다.

19세기를 지배하던 합리주의적 사상들엔 한 가지 공통점이 있는데, 그것은 인간의 자유를 부정한다는 점이다. 그들은 간과했지만 자연을 분석하던 도구인 이성은 인간을 분석하는데 사용되었고, 이성에 의해 분석되고 설명되는 인간은 '주체'가 아닌 '객체'로 전락하였다.

당시의 사상가들은 이성만 있으면 '인간은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성은 사회를 바꿀 수 있으며, 인간을 바꿀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들은 '교육'에 주목했다. 지금까지 인간이 진보하지 못한 이유는 교육의 부재 때문이었고, 따라서 교육된 문명인은 구시대의 모습과는 전혀 달라질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도스토예프스키는 합리주의와 공산주의에 반대했다. 문명이 인간을 바꿔놓을 수 있다면 인간은 외부의 무언가에 의해 움직이는 꼭두각시,피아노 건반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은 인간의 주체성과 존엄성에 대한 모욕이다. 인간이 존엄한 이유는 자유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진정한 자유인은 이성에 의해 설명되지 않으며,예측과 통제가 불가능하다. 그리고 심지어는 자신의 이익에 반하는 짓도 할 수 있다고 믿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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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생활은 음울하고 방탕하며 야생에 가까울 만큼 고독했다. 나는 아무하고도 교제하지 않고, 말을 주고받는 것조차 피하면서 점점 나의 구석진 세계로 기어들었다. 근무처에서도 사람들의 얼굴을 보지 않으려고 애썼다. 동료들은 나를 괴짜 취급했을 뿐만 아니라, 나 자신 분명히 눈치 챌 일이지만 사뭇 역겨워하고 있는 것 같았다.

밤이면 밤마다 나는 겁먹은 마음으로 남몰래 더러운 음탕에 빠지곤 했다. 수치심은 아무리 추악한 행위를 하고 있는 순간에도 내 마음속을 떠나지 않았다. 그럴 때는 자신을 저주하고 싶은 심정이 되기도 했다. 이미 그 무렵부터 내 마음속엔 지하생활자의 심리가 자리잡고 있었다. 어쩌다 남에게 들키지나 않을까, 누구와 맞부딪치지나 않을까, 누가 내 얼굴을 알아보지나 않을까 하고 전전긍긍하는 상태에 있었다. 그래서 되도록 어두운 곳을 골라서 싸다녔다.

▶해설=지하생활자의 캐릭터에 대한 묘사다. 이러한 인간 유형은 도저히 정상이라거나 평범하다고 할 수 없다. 자기를 학대하고, 고통 속에서 쾌감을 발견하는 그의 모습은 합리적인 인간에겐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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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추악한 짓을 하는 것은 오직 자기의 참 이익을 모르기 때문이라고 말한 사람은 대체 누구인가? 이들의 생각에 의하면 '인간이란 그 지성을 일깨워주고 자기의 진짜 이익이 무엇인가를 알도록 눈뜨게 해주기만 하면 이내 더러운 행위를 집어치우고 선량 결백한 인간이 되고 말 것이다. 왜냐하면 계몽된 지성을 지니게 되고 자기의 진짜 이익을 알게 되면 선행 속에서 자기 이익을 발견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세상의 어느 누구도 자기 이익에 반대되는 짓을 일부러 할 리는 만무하므로 필연적으로 선을 행하게 될 것이다'하는 식의 논리다. 아아, 이 얼마나 유치한 생각인가!

▶해설=이 말을 최초로 한 사람은 합리주의의 시조인 소크라테스다. 그리고 이후의 모든 서양철학은 이에 기초한다. 합리주의는 인간은 자기에게 해가 되는 행동은 하지 않으며, 그렇게 한다면 그것은 무지에 기인한 것이라고 가르친다. 현대의 경제학 이론도 이런 합리적 인간을 모델로 삼고 있으며, 사회 개혁과 함께 교육을 통한 인간성 개선을 추구하는 사회주의도 마찬가지로 이런 합리적 인간관에 토대한 것이다.

하지만 도스토예프스키는 2000년 동안의 서양 합리주의를 여지없이 두들겨 부순다. 인간은 합리적이지도 않고 그래서도 안 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에게 이익보다 중요한 것이 자유이기 때문이다. 이익을 포기할 수 있는 선택의 권리야말로 인간의 진정한 자유이기도 하다.

◆원문 읽기

[고전속 제시문 100선] (45) 도스토예프스키 '지하생활자의 수기'
인간 자신의 이익의 체계로 온 인류를 갱생시키려는 이론을 긍정한다는 건, 내 생각으론 인간은 문명 덕택에 온순해지고 따라서 잔인성은 점점 없어져서 나중에는 전쟁 같은 건 할 수 없게 될 것이라는 주장을 긍정하는 것과 다를 바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체계니 추상적 기능이니 하는 것에 너무나 집착한 나머지 보면서도 보지 못하고 들으면서도 듣지 못하는 식으로 일부러 진실을 왜곡하기를 서슴지 않게끔 되어버렸다. 내가 이런 예를 든 것은 그것이 너무나 명백한 실례이기 때문이다. 우선 자기 주위를 한번 둘러보라. 피는 강물을 이루고 있을 뿐 아니라,샴페인이나 뭐처럼 사뭇 유쾌하게 솟구쳐 오르고 있지 않은가!

가장 세련된 살육자는 거의 한 사람의 예외도 없이 최고의 문명인들이다. 하여튼 문명 덕택에 인간이 전보다 더 피에 굶주리게 되었다고 말할 수 없더라도, 옛날보다 더러운 꼴로 굶주리게 된 것만은 확실하다. 옛날엔 유혈 속에서도 정의를 발견하고 양심의 가책 없이 마땅히 제재를 가해야 할 인간을 살육했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유혈을 더러운 짓이라고 생각하고 있으면서도 옛날보다 훨씬 대규모로 하고 있는 것이다.

▶해설=19세기 사람들의 머릿속에 들어있던 미래의 인간은 교육에 의해 계몽된 선량하고 합리적인 인간이었다. 새로운 문명사회에선 전쟁이나 살인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도스토예프스키는 절대 그렇게 되지 않을 것이라 예언한다. 실제로도 그렇다. 20세기를 지나 21세기를 살고 있는 우리에겐 대규모 전쟁과 학살ㆍ연쇄살인과 테러 그리고 최근의 총기난사 사건처럼 병적인 폭력에 이르기까지 합리적 인간관으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사람들의 모습을 목격하고 있지 않은가.

◆원문읽기

설사 인간이 정말로 피아노의 건반에 지나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리고 그것이 자연과학으로 수학적으로 증명되었다 하더라도 여전히 인간은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뭔가 이상야릇한 일을 저지를 것이다. 요컨대 단순히 배은망덕의 습성 때문에 자기를 주장하고 싶다는 이유만으로 말이다. 만약에 적당한 방법이 없을 때는, 파괴와 혼돈과 온갖 고통을 궁리해내서라도 자아를 주장할 것이다. 그때 인간은 온 세계에 저주를 뿌릴 것이다. 저주라는 건 오직 인간에게만 주어진 능력이므로(이것이야말로 특권이자, 인간을 다른 동물과 구별해 주는 특징이다) 아마 이 저주 하나만으로도 자기 목적을 달성할 것이다. 즉,자기는 피아노의 건반이 아니라는 걸 확신할 것이다. 어쩌면 당신들은 '혼돈이나 암흑이나 저주나 모두 표에 의해 계산할 수 있으므로, 이 예비적 계산이 가능하다는 것만으로도 모든 것을 저지할 수 있고,결국 이성의 승리로 끝날 것이다'라고 말할지도 모르지만, 그렇다면 인간은 일부러라도 미치광이가 되어 이성을 버리고서 자기주장을 관철하고야 말 것이다.

▶해설=결국 도스토예프스키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인간의 존엄성은 자유에 있으며, 인간을 진정으로 동물로부터 구분해 주는 것도 자유라는 것이다. 그러나 앞에서 강조한 주인공의 캐릭터가 자유인의 표본인 것으로 오해해선 안 된다. 이 작품은 도스토예프스키의 초기 작품으로, 작가가 그러했듯이 나약하고 병적인 인간의 모습을 거침없이 드러내주고 있다.이러한 인간의 병적인 모습은 자유를 위한 몸부림이며, 인간의 자유를 부정하는 것들에 대한 반항의 정도라고 보는 게 좋을 것이다.

이중한 에듀한경 연구원 doodut@edu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