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체, 폐허 위에서 예술을 논하다

"진리는 추악하다.

우리는 진리로 말미암아 멸망하지 않도록 예술을 가지고 있다."


-니체


[고전 속 제시문 100선] (42) 프리드리히 니체, '비극의 탄생'
우리가 경험하는 세계는 늘 변화한다.

철학자들은 이렇게 변화하는 현상을 고정시키기 위해 이데아, 원상, 실체, 물(物) 자체 등의 개념으로 튼튼한 집을 지었다.

그러던 어느 날 니체(F.W.Nietzsche 1844~1900년)가 망치를 들고 나타나 튼튼하게 보였던 집을 마구 부수기 시작한다.

현상의 배후에 있으리라고 기대한 원상으로서의 플라톤의 이데아가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진리의 척도로 작용하던 '본질'의 자리가 사라졌으므로 그동안 진리로 간주해 왔던 것은 더 이상 진리라 말할 수 없게 된다.

따라서 절대적인 하나의 관점은 존재하지 않으며 그때그때마다 해석된 다양한 관점들이 있을 뿐이다.

니체는 부서진 원상의 파편들 속에서 '신은 죽었다'고 외친다.

진리를 추구하던 이성적 인간은 삶의 생생함을 망각한다.

개념으로 만들어진 딱딱한 세계를 벗어버리는 것이 바로 '예술'의 세계다.

예술은 가상의 아름다움과 도취를 즐기며 삶의 다양하고 풍부한 의미를 되살린다.

니체는 『비극의 탄생』에서 예술이 삶에서 지니는 의미를 그리스 비극을 통해 펼쳐 보인다.

1.아폴론적인 것과 디오니소스적인 것

니체는 음악의 정신으로부터 그리스 비극이 탄생되는 과정을 '아폴론적인 것'과 '디오니소스적인 것'이라는 두 가지 충동으로 설명한다.

◆원문읽기

"예술의 발전은 '아폴론적인 것'과 '디오니소스적인 것'의 이중성과 관련이 있다.

(…) 그리스에서는 아폴론적 인간인 조각가의 예술과 디오니소스의 예술인 비조형적 음악예술이 그 기원과 목적에서 크게 대립하고 있다는 우리 인식은 그들의 두 예술 신 아폴론과 디오니소스에 결부되어 있다.

두 개의 몹시 상이한 충동은 대체로 공공연히 대립된 채 서로서로 보다 힘찬 재탄생을 유발하며 공존해 나간다.

그렇게 '예술'이라는 공통의 단어만이 외견상으로 연결시켜주고 있는 그 대립적 충동의 투쟁은 지속된다.

그러다가 마침내 그리스적 '의지'의 어떤 형이상학적인 기적을 통하여 그들은 결혼하여 나타나고 이 결혼 속에서 디오니소스적이기도 하고 아폴론적이기도 한 아티카(고대 그리스 아테네 지역) 비극이 형성되는 것이다."

▶해설=니체에 의하면 인류문명의 근원이라는 영예를 받을 수 있는 그리스 민족의 위대함은 그리스 비극세계를 묘사한데 있다.

그리스인만큼 인생의 어두운 측면과 모순,비합리성에 대한 예리한 감수성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삶을 밝게 표현하려고 혼신의 노력을 다한 민족도 드물었다.

어둠과 공포와 전율이 가득한 시기에 그리스인들은 그들의 전율을 신화 속의 상징으로 표현했다.

삶의 고뇌를 이겨낼 수 없게 되자 가상과 환영을 통한 구원의 길을 찾게 된다.

그리스인은 생존의 어두운 심연을 주저없이 직시하면서 그 위에 환상적인 아름다움의 세계를 구상해 어두움에 견뎌보려는 노력이 아폴론적 조형예술을 창조해낸다.

◆원문읽기

"꿈의 체험의 이러한 즐거운 필연성은 역시 그리스인들에 의하여 그들의 아폴로신 속에 표현되어졌다.

모든 조형력의 신으로서의 아폴로는 동시에 예언의 신이다.

그 어원에 따른다면 '빛나는 자', 즉 빛의 신인 그는 내면의 아름다운 가상까지도 지배한다.

(…) 그러나 꿈속의 모습이 병적으로 적용되지 않기 위하여, 넘어서지 말아야하는 저 섬세한 한계선 역시 아폴로의 모습에 결여되지 말아야 한다.

(…) 그 모습이란 적절한 한정,광폭한 격정으로부터의 자유, 조형의 신의 저 지혜로운 평정이다."

▶해설=아폴론적인 충동은 시간과 공간에 제한을 가함으로써 모든 개체가 형태를 갖도록 해준다.

또한 아폴론적 충동은 구체적인 형상으로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아름다움을 만든다.

아름다운 가상을 통해 현실과 다른 완벽한 세계를 만들며 결정에서도 절도를 유지한다.

이런 아폴론적인 것은 "태산 같은 파도가 끝없이 아득히 광란하는 바다 위에 몰아칠 때 조그만 배를 믿고 앉아 있는 한 선원처럼 세계의 고뇌 속에 개체화의 원리(principium individuationis)를 잊으며 유유히 앉아있는 개인과 같다."

◆원문읽기

[고전 속 제시문 100선] (42) 프리드리히 니체, '비극의 탄생'
"우리가 '개체화의 원리'가 이런 식으로 깨어졌을 때 인간의 가장 깊은 근저로부터, 즉 바로 자연으로부터 솟구쳐 나오는 즐거움에 넘친 황홀감을 이 공포에 덧붙여 본다면, 우리는 디오니소스적인 것의 본질을 볼 수 있을 것이다.

(…) 모든 원시인이나 원시 민족이 그들의 찬가에서 말하고 있는 마취적 음료의 영향을 통하여, 혹은 모든 자연을 흥겹게 관통하는 봄의 힘찬 접근의 때에, 저 디오니소스적 격정이 눈뜨게 된다.

(…) 디오니소스적인 것의 마력 하에서는 인간과 인간 사이의 결합이 다시 이루어질 뿐만 아니라 소외되고,대립되고, 억압된 자연이 자신의 잃어버린 탕아인 인간과 다시금 화해의 제전을 축하하게 된다."

▶해설=세계의 전체를 가상의 아름다운 꿈속에서 극복하려는 개체화의 원리가 부서지면 인간은 자연의 가장 깊은 근저로부터 즐거움에 넘치는 황홀감에 빠져들고 세계의 근원과 개체는 혼연일체가 된다.

아폴론적인 것이 찢어진 틈 사이를 엿볼 때 삶의 진상은 각기 개별적으로 그 형체가 있는 것을 낳았다가 또 이를 파괴시켜 나가는 무한한 유전을 거듭해 가는 근원적인 의지력 그 자체였다.

니체는 아폴론적인 세계의 밑바닥에 있는 강렬한 충동을 디오니소스적인 것으로 설명한다.

이성이 잠자고 의지가 준동하는 세계, 디오니소스적인 도취 속에서 개체는 스스로를 망각하고 존재와 나는 함께 춤을 춘다.

음악이나 비극 그리고 삶의 본질적인 힘은 하나다.

디오니소스적인 것은 근원적인 하나(das Ur-ein)를, 그리고 아폴론적인 것은 이 근원적인 하나의 모사(模寫)를 가능하게 해주는 힘들이다.

니체는 디오니소스적인 것에 서정시와 천재를, 아폴론적인 것에 조각가와 서사시인을 대응시킨다.

서정시와 서사시의 결합은 합창곡이고 이 합창곡이 바로 비극의 시발점이다.

'비극이 비극적인 합창곡으로부터 성립되었다는 것'은 그리스의 합창곡이 서사시와 서정시, 곧 아폴론적인 것과 디오니소스적인 것으로 형성되어 있다는 것을 뜻한다.

그렇다면 그리스의 합창곡이나 비극은 모두 두 힘으로 구성되며 양자에 있어서 내용의 힘은 디오니소스적인 것이고, 형식적인 힘은 아폴론적인 것임이 밝혀진다.

비극은 디오니소스적인 것의 아폴론적인 형상화이다.

2.이론적 인간의 탄생과 비극의 죽음

니체는 이론적 인간인 소크라테스와 에우리피데스의 비극이 비극의 풍요로움을 빼앗아갔다고 주장한다.

◆원문읽기

"저 근원적이고 전능적인 디오니소스적 요소를 비극에서 제거시키고 비극을 완전히 새롭게 비(非)디오니소스적 예술, 도덕, 세계관 위에 건립하는 것, 이것이(…) 에우리피데스의 경향이다.

(…) '미학적 소크라테스'의 (…) 최고의 법칙은 '아름답기 위해서는 모든 것이 지적이어야 한다.' 이것은 '아는 자만이 유덕(有德)하다'와 병행한다.

이 기준을 손에 들고 에우리피데스는 모든 개체를 측정했고, 그것을 이 원리에 맞게 수정했다.

(…) 에우리피데스에 있어서의 문학적 결손과 퇴보라고 간주하는 것은 저 철저한 비판과정의 산물이고 저 과감한 이지성(理知性)의 산물이다."

▶해설=소크라테스의 '이론적 인간'은 이론의 힘으로 세계를 완전하게 알 수 있다는 태도를 취함으로써 그리스 비극은 몰락으로 이끌었다.

소크라테스 이후 디오니소스적 세계의 깊숙하고 고통스러운 어두운 충동 대신에 의식의 명료함이 지배한다.

소크라테스는 신화적인 상징을 개념화했다.

명석하고 철저한 냉철 속에서 모든 상징적인 것을 파괴하고 와해한다.

니체는 비극으로부터 음악을 추방시키고 삶의 근본적인 힘인 충동을 이론화했기 때문에 소크라테스를 부정적으로 평가한다.

철학의 진리, 도덕의 선, 종교의 신 앞에서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는 허무하고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된다.

그러나 니체는 이런 진리, 선, 신들이 이 세계를 부정하기 위해 고안해낸 창작물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예술은 변하는 가상세계의 가상을 긍정하면서 예술적 충동으로 아름다움의 세계를 만든다.

니체는 예술의 세계에서 삶을 삶 자체로 인정하고 춤출 수 있는 놀이 공간을 보여주었다.

인간은 예술을 통해 근원적 삶의 혁명을 경험한다.

이은희 Sㆍ논술 선임연구원 polaris@nonsu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