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 속 제시문 100선] (37) 미셸 투르니에 '방드르디, 태평양의 끝'
『방드르디,태평양의 끝』은 현대 프랑스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 미셸 투르니에(1924~ )의 데뷔작이자 대표작이다.

제목의 방드르디는 프랑스어로 금요일이란 의미인데,『로빈슨 크루소』의 프라이데이를 대신하는 인물이다.

작가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내가 볼 때 1719년에 나온 디포의 『로빈슨 크루소』에는 극도로 충격적인 두 가지 문제점이 있습니다.

우선 그 소설에는 방드르디(프라이데이)가 있으나마나 한 존재로 취급되어 있어요.

그는 단순히 빈 그릇일 뿐이지요.

진리는 오로지 로빈슨의 입에서만 나옵니다.

그가 백인이고,서양인이고,영국인이고,기독교인이기 때문입니다.

나의 의도는 방드르디가 중요한 역할을,아니 심지어 끝에 가면 가장 핵심적인 역할을 맡는 소설을 써보자는 데 있었어요."

『로빈슨 크루소』를 처음으로 읽기 직전에 작가는 인류학자 클로드 레비스트로스의 강의를 듣고 있었다.

당시까지도 서구인은 서구 사회와 (열대 원주민 사회 등의) 비서구 사회 간의 구분이 곧 문명과 야만,합리성과 비합리의 우열 구분과 일치한다는 편견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하지만 그러한 구분이 서구인들의 지배욕을 합리화하는 편견에 불과하다는 것이 레비스트로스의 인류학이 투르니에에게 전하는 메시지였다.

서구인들의 편견은 주체가 타자(자신과 다른 존재)와 맺는 관계의 근대적 양상을 기초로 한 것이었다.

근대적 주체의 시선을 통해 볼 때,'다름'은 비합리적이고 야만적인 '열등함'이 된다.

하지만 『방드르디,태평양의 끝』에서 '다름'은 '열등함'을 넘어 '새로움'을 표상하는 주인공으로 재탄생한다.

『로빈슨 크루소』의 주인으로 다시 태어난 프라이데이,바로 방드르디이다.

이제 그 새로 쓰인 역전의 드라마를 해석해보도록 하자.

◎ 원문 읽기

[고전 속 제시문 100선] (37) 미셸 투르니에 '방드르디, 태평양의 끝'
그는 이제 인간이란 소요나 동란 중에 상처를 입고 군중에 밀리면서 떠받쳐 있는 동안은 서 있다가 군중이 흩어지는 즉시 땅바닥에 쓰러져버리는 부상자와 비슷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를 인간성 속에 지탱시켜 주고 있던 그의 형제들인 군중이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갑자기 물러가 버리자 이제 그는 두 다리에 의지하여 혼자 서 있을 힘마저 없어진 자신을 느낄 수가 있었다.

그는 땅바닥에 코를 처박은 채 닥치는 대로 아무것이나 먹었다.

그는 엎드린 채 변을 보고,자신의 따뜻하고 물렁물렁한 배설물 속에서 뒹굴었다.

▶해설=로빈슨은 난파되어 무인도에 홀로 남은 자신을 발견한다.

타인은 존재하지 않고,섬만이 타자로 존재한다.

고독은 그에게서 의지를 빼앗고,그를 진창으로 몰아넣는다.

그 속에서 그는 몽상에 빠진 채 점점 인간성을 잃어간다.

하지만 생존의 욕구는 그를 일으켜 세운다.

중요한 것은 일어선 후의 삶의 방식이다.

◎ 원문 읽기

이제부터 내가 깨어 있건,잠을 자건,글을 쓰건,요리를 하건 나의 시간은 기계적으로,객관적으로,거부할 길 없이 완벽하고 정확하게, 통제 가능한 방식으로 똑딱거리는 소리에 의해 논리화된다.

악의 힘에 대한 나의 승리를 정의해 주는 이 형용사들에 나는 얼마나 굶주려 왔던가! 나는 내 주위의 모든 것이 이제부터는 측정,증명,확인되고 수학적이고 합리적으로 되기를 요구한다.

섬을 측량하고 이 땅 전부의 평면을 축소한 지도를 만들고 그것을 토지 대장에 기록해야 한다.

풀포기 하나하나에 꼬리표를 붙이고 새 한 마리마다 발고리를 끼우고 젖먹이 동물 한 마리마다 불로 지져 도장을 찍고 싶다.

이해할 길 없고 헤아릴 길 없으며 무엇인가 속에서 부글거리며 끓고 해로운 소용돌이로 가득 찬 이 섬이 추상적이고 투명하며 뼛속 깊이까지 들여다보이는 구조로 변모할 때까지 나는 끊임없이 노력하리라!

▶해설=로빈슨에게 진창은 패배이며 악이다.

그렇다면 그에게 승리는 무엇일까? 이성적 질서이다.

로빈슨은 물시계를 만들어 무형의 시간에 질서를 새겨 넣는다.

측정하고 경작함으로써, 타자인 스페란차(무인도의 이름)에 질서를 강요한다.

혼자이면서도 헌장을 만들고 총독이 된다.

형법을 만든다.

이렇게 도덕적이고 합리적인 질서를 확립한다.

이는 타자로서의 자연이 지배의 대상이 됨을 뜻한다.

로빈슨의 이러한 투쟁은 서구 근대화를 상징하는 것이기도 하다.

하지만 『로빈슨 크루소』의 로빈슨과는 달리,이 작품의 로빈슨은 그러한 노력으로도 고독을 물리치지 못한다.

◎ 원문 읽기

그는 처음에는 물시계가 멈춤으로써 다만 일과표의 틈이 늦추어지고 시급한 그의 작업이 중지될 뿐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는 이 휴가가 그 자신의 일이라기보다는 섬 전체의 문제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마치 사물 하나하나가 본래의 관습적인―그리고 소모적인―방향으로 기울어지기를 그치고 그의 본질로 되돌아와서 모든 속성들을 마음껏 개화시키며,그들 자체의 완성 이외에 다른 어떠한 이유도 찾지 아니하며,순진하게 그 자체로만 존재하는 것 같았다.

마치 신이 어떤 갑작스러운 사랑의 충동을 받아 그의 모든 피조물들을 축복하기로 한 것처럼,엄청난 부드러움이 하늘로부터 떨어지고 있었다.

▶해설=물시계가 멈추고 질서를 향한 로빈슨의 작업이 중지된다.

스페란차는 평소에 로빈슨의 사소한 걱정들에 가려져 있던 면모를 드러낸다.

따뜻하고 우정에 찬,'다른 섬'으로 존재한다.

섬이 로빈슨의 의식적인 목적을 위한 대상이기를 멈추고,그 자체로 의미를 드러낸다.

하지만 로빈슨과 섬의 균형은 순간으로만 존재한다.

이 시대의 우리가 시계를,컴퓨터를,스케줄을 오래도록 멈추어 두지 못하는 것처럼,로빈슨도 오래도록 물시계를 멈추어 두지 못하기 때문이다.

◎ 원문 읽기

나는 처음에 그가 내 짐승들을 좋아한다고 생각했었다.

(중략) 그는 동물들과 동등한 자격이다.

그는 그들에게 좋은 일을 할 생각도 없고,그들의 사랑을 받으려고 애쓰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그는 짐승들을 거침없이,무심하게 또 잔인하게 대한다.

그런 태도가 나에게는 더없이 역겹게 느껴지지만 그와 짐승들과의 관계에는 전혀 방해가 되는 것 같지도 않다.

▶해설=로빈슨과 함께 하게 된 방드르디에 대한 대목이다.

『로빈슨 크루소』에서와는 달리,로빈슨은 자신이 교육시켜야 할 열등한 방드르디에게서 이윽고 '다른 방드르디'를 발견한다.

로빈슨은 방드르디가 동물들과 맺고 있는 관계가 자신의 것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것임을 깨닫는다.

방드르디는 지배와 질서를 향한 의지가 아니라 자신의 천성을 따랐다.

그가 그럼으로써 자연과 균형을 이루고 있음을,로빈슨은 느끼게 된다.

질서와 지배를 추구하는 로빈슨에게 그렇듯 '다른 방드르디'는 방해자이자 위협이 된다.

로빈슨의 담배를 훔쳐 피우던 방드르디의 실수로 거대한 폭발이 발생한다.

그가 로빈슨이 난파선으로부터 옮겨놓은 화약상자들에다 담배 파이프를 던졌던 것.이 폭발은 로빈슨과 방드르디 사이의 갈등의 폭발이기도 하다.

섬 전역에 로빈슨이 구축한 문명의 흔적들이 모두 사라져 버린다.

로빈슨은 처음에 섬에 발을 디뎠을 때와 같이 아무 것도 가진 것 없는 상태로 되돌아간다.

하지만 그것은 로빈슨이 은근히 바라고 있던 것이었다.

물시계와 논밭과 헌장과 형법이 사라진 스페란차는 이제 로빈슨에게 순간이 아니라 영원히 '다른 섬'이 된다.

방드르디는 '다른 방드르디'가 된다.

로빈슨에게 두 타자는 지배의 대상이 아니라 새로운 무언가이다.

다름이 새로움이 된 것이다.

로빈슨은 그 새로움을 받아들임으로써 방드르디와의,그리고 스페란차와의 균형을 회복한다.

◎ 원문 읽기

무엇보다도 그의 비위에 거슬리는 점은 이 문명되고 지극히 고상한 사람들이 순진할 정도로 태연스럽게 과시하고 있는 거칠음,증오,탐욕이 아니었다.

이 사람들 이외에 부드럽고 호의적이며 너그러운 다른 사람들을 상상하는 것은―아마도 그런 사람들을 찾아내는 것은―그다지 어렵지 않을 것이었다.

로빈슨이 볼 때 악은 그보다 훨씬 더 깊은 데 있었다.

그는 마음속으로 그 사람들 모두가 열에 들뜬 듯이 추구하는 것으로 보이는 여러 가지 목적의 어쩔 수 없는 상대적 성격이 바로 악의 바탕이라 비판하고 있었다.

왜나하면 그들은 모두 목적을 추구하고 있었고,그 목적이란 어떤 획득,어떤 부,어떤 만족 따위였다.

그렇지만 무엇 때문에 그 획득,부,만족을 추구한단 말인가?

▶해설=로빈슨을 구해줄 사람들이 나타나지만 그는 그들을 따라가지 않는다.

그들은 문명 속에서 이유도 모르고 획득,부,만족을 추구하면서,타자를 지배하려 한다.

그 '무거움'이 결국은 자신의 천성마저 지배하려는 억지스런 노력과 권태의 순환으로 귀결됨을,로빈슨은 이미 알고 있다.

로빈슨은 스페란차에 남아 '가벼움'을 추구한다.

그 어떤 목적도 없이 천성에 맞는 삶 자체를 유희로 삼는다.

로빈슨이 이제 방드르디로 다시 태어난 것이다.

문명 속에서 '획득,부,만족' 좇기에 여념이 없는 우리로서는 로빈슨의 선택이 공허해 보이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우리가 문명을 대가로 너무 많은 것을 희생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방드르디가 된 로빈슨은 묻고 있다.

이석연 Sㆍ논술 수원학원 원장 blachand@nonsul.com